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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천 원의 행복

길거리 옛 책들을 찾는 것, 시간의 낭비 아니다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77]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초겨울에 접어든 요즈음에 나는 천 원의 행복 속에 빠져들고 있다. 시중에 점점 많아지고 있는 천 원짜리 전문점을 가주 간다는 뜻은 아니다. 나에게 이 행복을 주는 곳은 동대문 밖 종묘 옆 담자락 주위로 펼쳐진 중고시장이고 그 가운데서도 옛 책들을 파는 몇몇 서점이다.

 

지하철 1호선 동묘앞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가면 거기서부터 동묘공원 담을 따라서 청계천까지 광범위하게 중고품 시장이 펼쳐져 있어서 대낮에는 엄청난 숫자의 시민들이 오셔서 자기한테 필요한 물건을 골라 흥정하고 사가는 풍경이 정겹다.

 

그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오른쪽에 하나 또 저 안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두 개의 큰 중고책 서점, 다른 말로 하면 옛 책 서점이 있는데 각 서점 앞에는 길에다 책을 널어놓고 한 권에 천 원씩을 받고 책의 주인을 찾는다.

 

길에 누워서 주인을 기다리는 이 책들은 베스트 셀러였던 소설류나 수필들, 혹 신변잡기류, 철 지난 자기개발서적, 곧 돈 벌어 성공하는 법, 여행안내서, 요즘 쓸모없는 사전류 등등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어떻게 보면 이미 용도가 끝난, 도서라는 지식유통체계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는 것 같은 그 책 더미 속에 가끔 보물이 숨어 있다. 그 보물들이 나에게 천 원의 행복을 주는 주인공들이다.

 

 

어느 날 한쪽 구석에서 《질그릇 아내》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띄었다. 표지가 특별한 것도 아니고 정말 그냥 질그릇 그대로의 별 느낌도 없는 디자인인데 손이 가서 펼쳐보니 모 방송기자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여러 번 한 기자의 부인이 남편의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을 넘다가 돌아오는 과정에서 그 힘든 매 순간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남편도 어떻게 살아났는지를 자세히 기록한 일종의 병상 다큐멘터리였다.

 

사실 그 정치인은 대학 같은 과 후배이기도 해서 어떻게 사고를 당했고 어떻게 살아났는지가 궁금했는데, 그 책을 보니 사고가 난 것은 내가 북경 특파원으로 나가 있을 때여서 미처 주목하지 못했고, 그렇지만 그를 살리기 위해 직장의 선후배들이 얼마나 열심히 피를 모아 주었는지, 매 순간 주위 사람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는지가 자세히 기록돼 있고 무엇보다도 가장 힘들었던 부인이 이를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알 수 있어서, 건강한 몸으로 직장을 마친 나와 그 후배와 비교도 되고 해서, 천 원이라는 작은 돈이 참 크게 쓰였구나 하고 느끼게 해주었다.​

 

같은 날에 눈에 띈 것이 《그 청년 바보의사》라는 책이다. 그 책의 뒤표지에는 이런 문구가 써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그가 ‘참 의사’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래 그가 ‘참 의사’인가? 요즈음에도 ‘참의사’가 있다는 거지?” 이런 생각으로 책장을 넘겨 보니 추천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 젊은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명망가나 의료계의 권위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학계에 뚜렷한 업적을 남긴 의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한 추억을 잊지 못하고 그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 의사는 누구였나? 이름은 안수현, 고대 의대 91학번. 내과전문의였다. 고대부속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를 마치고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단정하게 깎은 짧은 머리에 키는 178센티로 훤칠했고 늘 푸른색 바지를 즐겨 입었다. 그는 환자들에게는 따뜻했고, 동료들에게는 친절했으며 자신에게는 의사로서 엄격했단다.

 

의약분업 사태로 전국의 의사들이 파업할 때 그는 병원에 남아 환자 곁을 지켰다. 하루 한두 시간 겨우 눈을 붙이고 한 끼를 먹어가며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는 의대생 시절부터 ‘스티그마’란 ID로 신앙과 음악과 책에 관한 글을 쓰는 작가였고 다양한 클래식 음악과 좋은 책들을 소개하는 문화공간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남몰래 30회가 넘는 헌혈을 했고 의사로서 수많은 말리 환자들의 임종을 지켜봐 주었다.

 

그러다가 2006년 1월, 서른셋이라는, 예수와 같은 나이에 우리 곁은 갑자기 떠났다. 이 책은 그러한 청년 의사 본인의 기록과 주위의 글들이 모아진 일종의 회고록인데 마디마디마다, 고비마다, 그가 실천한 인간 사랑을 볼 수 있다. 그 젊은 의사야말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환자들의 얼굴이 그 의사에게로 오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들을 예수를 대하듯 한 분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한동안 의사고시 문제로, 의사파업 문제로 의사들의 사람과 행동이 다시 우리들의 관심으로 올라섰고, 코로나 사태로 많은 의료진이 온갖 고생을 참아 넘기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런 가운데, 참으로 우리가 모르던 어느 청년 의사의 삶도 이렇게 고귀할 수 있구나 하는 것, 그리고 그런 의사들이 무척 많을 것이란 믿음도 이 천 원짜리 책을 통해 내가 알게 되었다.​

 

지난해 언젠가는 《땅끝의 아이들》이란 책이 역시 노천, 곧 길바닥에서 눈에 들어왔다. 이민아 간증집이라고 되어 있는데 가만히 보니 이민아 이분은 이어령 장관의 따님이다. 그 유명하신 이 장관의 장녀이니 무척 명석했을 것은 물을 필요도 없는데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고인은 결혼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쿨을 거쳐 캘리포니아주 LA 지역 검사를 지냈고 첫아들이 먼저 세상을 뜨고 곧 찾아온 병마와 싸우는 등 질곡 있는 삶을 보냈으나 1992년 세례를 받은 후 2009년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시작했다.

 

《땅끝의 아이들》 은 이때 쓴 책이다. 이어령 장관께는 필자가 책을 내면서 추천사도 받았고 출판기념회에도 오셔서 좋은 말씀을 해주시는 등 필자하고는 가까운 편인데, 그 따님의 이야기는 잘 보도가 되지 않아 궁금하던 차였다.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하니 아! 이 따님의 삶은 또 이런 힘든 것이 있었구나 하고 알게 된다. 이어령 장관이라는 걸출한 분의 딸이라는 것이 그녀의 삶을 옥죄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본문에 이렇게 나온다.

 

 

“태어났을 때부터 저는 이 세상에서 안식처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제 그대로의 모습이 너무나 세상에서 원하는 기대치와 달랐기 때문에 제가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동안에 저를 잃어버렸어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나 자신이 싫고, 그래서 사랑을 받을 수도 사랑을 할 수도 없는 완전히 자기만의 방안으로 들어가서 갇혀버린 사람들, 저는 그 사람들이 땅 끝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 땅끝에 있는 아이였던 것 같아요....지금 이 세상에서 소외되어 자신만의 동굴 안에 혼자서 숨어있는 그런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요.​”

 

부모의 반대에도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한 남자와 이혼을 했고. 가장 사랑했던 맏아들은 스물다섯 꽃 같은 나이에 돌연사하고, 본인은 암 선고를 받고, 다섯 살 아이는 특수자폐 판정을 받고, 다시 자신은 실명(失明)을 당하고 하는 모든 고통이 닥쳐왔을 때 이민아는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고 목사가 되어 많은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비록 다시 병마가 도져 2012년 3월에 결국 먼저 갔지만 그 분이 간 곳이 분명 천국이었음을 우리는 의심할 수가 없다.​

 

그 전에 딸이 시력을 잃게 되자 아버지인 이어령 장관은 생전 찾지도 않던 하나님을 찾아 딸의 눈을 돌려주면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이겠다고 했고, 시력이 돌아오자 신앙에 귀의해서 간증집도 내곤 하셨다. 지금은 이 장관 당신도 현재 암으로 힘이 든 상황인데 암을 받아들이고 담담히 생활하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저런 유명 인사의 삶의 뒷모습, 본 모습, 그분들의 삶의 의미를 거리에서 우연히 본 작은 책을 통해 알게 된다.

 

​이런 책들을 보다 보니 공교롭게도 기독교 신앙으로 삶의 고통을 이겨낸 사례들이 언급됐지만, 길거리의 책방에는 그런 책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의 애환이 녹아있고 깔려 있다. 요즈음 더욱 그 의미가 두드러지는 느리게 사는 삶,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며 의미를 찾아가며 사는 삶이 우리들의 화두가 되었는데 그런 사조의 원조라고 할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도 천 원으로 받은 행복의 하나다.​

 

프랑스의 철학 교수며, 에세이스트인 피에르 쌍소(Pierre Sansot, 1928-2005)의 이 책이 번역돼 나온 것은 2000년. 이미 20년이나 지난 책이지만 표지건 본문이건 새것처럼 깨끗해서 기분이 좋은 이 책은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삶, 그것은 마치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다가오고, 햇살처럼 확 퍼져 나간다. 그것은 세차게, 도도하게 흘러가는 강물이나 거세게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이기보다는 섬세한 작은 물방울들 같은 것이다. 그것은 강함 힘이기보다는 부드러운 빛과 같은 것이다.”

 

느림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삶의 선택에 관한 문제이다. 어느 한 기간을 정해놓고서 그 안에 모든 것을 처리하려고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우리를 서두르게 만들고 있는 이 사회, 그리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따르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과제다.

 

 

영국의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프리스틀리(J B Priestley 1894-1984)도 젊을 때 게으른 화가 친구와 함께 시골 오두막을 찾은 적이 있다. 거기서 그는 친구와 함께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가장 가까운 늪지를 따라 해발 600여 미터의 구릉까지 빈들거리며 올라간다. 거기서 풀밭에 큰 대자로 드러누운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해를 다 보낸다. 그러고는 해가 지면 천천히 내려오는 것이다. 100년 전의 이 빈둥거림도 느림의 철학을 이미 먼저 실천한 사례일 것이다. 현대사회의 온갖 분주함과 그것으로 잃어버리는 우리들 자신의 본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책에서 권하는 느리게 사는 방법을 실천해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우리말로 번역된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외국의 수준 높은 글을 담은 책도 있다. 며칠 전에 건진 책은 《일본어 수필 전집》이란 책인데, 여기에는 일본의 NHK국제방송이 일본을 대표하는 지성인들에게 각각 일본문화의 특성을 외국인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해서 모인 글을 일본의 고단샤(講談社)란 출판사가 <나의 일본문화론> 시리즈로 펴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좋은 글들만을 뽑아 모은 것이다.

 

물론 이 글들은 번역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일본어를 배우는 분들이 조금만 공부하면 알 수 있을 정도로 쉬운 문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어쨌든 일본문화의 특성을 알고 싶어 했던 필자로서는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오오카 마코토(大岡信),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 오오에 켄사부로(大江健三郞) 같은 저명한 일본 문화인들이 일본문화의 특성을 간략하게 정리해 소개하는 것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데서, 공부하는 데는 아주 제격이다. 이런 책이 1994년에 4판으로 나왔다가 나의 손에 들어오는구나.

 

문제는 이런 책들도 길에 있다가 주인을 만나지 못하면 금방 폐지로 처리되어 어딘가에 불쏘시개가 되어버린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책들은 처음에 저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쓴 것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치 폐품처럼 변해, 주인이 선택해주지 않으면 완전히 유랑인이 되었다가 불에 타 연기로 변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뿐 아니라 인류가 고민하고 기록하고 정리한 이런 책들이 점점 너무도 빨리 완전 폐품으로 전락한다는 것이 우리 시대의 문제다.

 

 

그래서 누구는 느리게 살라고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조금은 조급해진다. 저기 저 좌판에 있는 책들이 다 쓰는 사람들의 생각과 역사와 기억이 있고 책 나름대로 다 뜻이 있고 도움이 되는 책들인데 누구든 소용되는 사람들이 이 책을 보고 가지고 갔으면 하는 것이다. 시내버스 한 번 타는 값도 안 되는 겨우 천 원이다. 천 원으로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인생의 교훈을 배우고 인생을 사는 방법을 배우고 그것으로 삶을 의미 있게 하는 온갖 고민들이 이 길거리 좌판에 널린 책 속에 있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의 엄중함으로 대면접촉이 사실상 금지되는 요즈음, 겨울 찬 바람이 불어도 노천의 책들은 자신을 선택할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굳이 사람들하고 대면할 필요 없이 책만 펴보면 된다. 조금만 시간을 내어 청계천 동묘 서쪽 일대의 길거리 옛 책들을 찾아가 보는 것은 결코 시간의 낭비가 아님을 나는 증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