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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바다의 삼별초 뱃길 탐험

제주 곳곳에 남아있는 삼별초 피의 유적지들

[삼별초는 오키나와(유구) 왕국의 탄생 주역들] 6

[우리문화신문=채바다  삼별초뱃길탐험대장]  제주의 삼별초 유적지들은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어찌 보면 제주도 전 지역이 삼별초 유적지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진 항파두리성을 비롯하여 해안선을 따라가다 보면 환해장성들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 회에 소개한 화북의 송담천과 동제원도 빼 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역사의 현장과 유적들이 많이 훼손되어 살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의 현장처럼 소중한 유산은 없다. 또한 제주의 크고 작은 항포구들은 삼별초뿐만 아니라 역사시대 수많은 해양 세력들이 이용했던 중요한 관문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옛 포구도 산업화에 밀려 옛 정취를 찾아보기에는 너무도 아쉬움들이 많다. 이러한 포구 유적들은 제주인의 삶 속에서 애환들이 숨겨져 있는 곳이다. 여기서 기록에 나타난 중요한 포구들을 열거 하면 화북포 조천포’, ‘함덕포’, ‘성산포, ‘조공포’, ‘애월포’, ‘명월포군항포등을 들 수 있다


화북포
(禾北浦) 


   
▲ 삼별초 뱃길탐험을 위해 화북포를 출항한다.

제주시 화북동의 화북포는 별도 북쪽에 있는 포구로 베린냇개또는 별도포라고 불렀다. 포구와 인접한 곳에는 화북진성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에 뭍(육지)과 뱃길을 이어주던 대표적인 포구 중 하나로 제주에 부임하는 관리와 유배를 온 사람들이 이 포구를 이용하였다. 1555년 을묘왜변 때 1천여 명 왜구들이 이 포구를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 조선 후기 노론의 거두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 그리고 최익현 이 포구를 통해 상륙했다.  

이곳 포구에는 항해자들의 해신을 모시고 안전 항해를 기원드렸던 해신사(海神祠)가 있다. 1820(순조20)에 목사 한상묵(韓象黙)이 세우고 헌종 7년에 목사 이원조(李源祚)가 중수했다. 헌종 15년에 목사 장인식(張仁植)이 비를 세웠다. 예전에는 해마다 5월에 목사가 제사를 지냈다, 필자는 탐라국 탄생 신화에 나타난 벽랑국 3공주의 뱃길(강진)과 삼별초 뱃길 탐험항해(2011,10.진도)를 이곳 해신사에서 성공적인 항해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항해를 하였다. 

이곳 화북포(禾北浦)북쪽에서 벼를 실어오는 포구라 하여 별도(別刀)’라 부르는 지명 유래가 있다. 송담천 전투와 동제원 터는 삼별초의 격전지임을 떠올리게 되는 중요한 곳이다  

추사 김정희의 시 영주 화북진 도중(瀛州 禾北鎭 途中)”에서 당시 심정들을 만나게 된다. 

마을 안 아이들이 무얼 보려 모였는지
귀양살이 면목이 하도나 가증(可憎)한데
끝끝내 백천 번을 꺾이고 갈릴 때도
임의 은혜 멀리 미쳐 바다 물결 아니 쳤네 

느린 바람 불어오면 노 저어 떠나는 배
천 리 바닷길이 아득하기만
예부터 이곳은 애간장 끊는 곳.
그래서 진() 이름이 이별시키는 칼이란다.“
 

조천포(朝天浦)


   
▲ 1960년대 조천포(朝天浦),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현용준

조천포는 제주시에서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조천진성과 연북정 조천관이 있다. 포구의 옛 모습을 찾기 어렵다. 제주의 자연과 지형지물들을 조화롭게 이용했던 아름다운 포구이다. 전략적으로 이러한 해안선을 잘 이용한 선조들의 지혜에 놀라게 된다.  

조천진성은 그 흔적만 더듬어 본다. 그 아쉬움을 달래 주는 것이 연북정이다. 조천포는 제주로 부임·이임하는 관리들과 조공선들이 들고 나갔던 해상 교통의 관문가운데 하나이다. 주변에는 아직도 조선시대의 통신수단인 조천연대(朝天煙臺,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5), 연북정(戀北亭, 제주특별자치도유형문화재 제3), 이 자리 잡고 있다. 조천포는 이문경 부대의 삼별초가 개경정부가 제주에 보냈던 관군을 화북동 일대에서 물리친 다음 조천포에서 웅거했다. 

 
연북정(戀北亭)


   
▲ 연북정, 문화재청 제공

연북정은 원래 조천진성 외곽에 있는 객사(客舍)로 알려 지고 있다. 1590(선조 23) 절제사 이옥(李沃)이 조천진성을 동북쪽으로 돌려 쌓은 다음에 그 위에 옮겨 세워서 쌍벽정(雙碧亭)’이라고 했을 정도로 청산도 푸르고 녹수도 푸르러서 쌍쌍이 푸르다는 뜻으로 제주도의 아름다운 절경을 보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후 1599(선조 32) 제주목사 성윤문(成允文)이 이 건물을 보수하고 연북정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연북(戀北)’은 북쪽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북쪽에 있는 임금을 그리워하는 충정을 보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밖에도 조천포구는 진시황을 명을 받고 불로초를 찾으러 제주로 온 서불과, 조천석(朝天石)이라는 돌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서 서불이 상륙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전래들은 진시황의 불로불사의 약을 찾기 위해 곤륜산에서 천년된 나무로 배를 만들고 동남동녀 500명과 함께 영주산을 찾아 이곳 금당포(金塘浦, 지금의 조천포구)에 도착해 하늘에 감사의 제를 지냈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애월포(厓月浦)

   
▲ 애월포 구엄리 "도대불"(김영조 기자)

애월포는 지금의 애월항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옛 모습들은 현재 애월 초등학교 근처의 옛 애월진성을 만나게 된다. 이곳 또한 해안선이 잘 발되어 있어서 한반도의 남서 해안의 도서들과 해상 교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곳이다. 애월진성은 옛 원형들을 확인하는데 중요한 유적이 되고 있어서 주변에는 삼별초와 여몽 연합군들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진 상징적인 곳이다. 당시 방어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성벽과 축조방법들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필자는 진도에 퇴각했던 7백 년 전 삼별초의 해상 이동 탐험항해를 화북항에서 출발하여 진도-추자도를 왕복하는 탐험항해를(2011,1024-30)를 성공적으로 이루워 낸 바 있다. 

여기서 주목 할 것은 진도에서 제주로 상륙하려면 북서풍을 이용한 해류와 조류를 이용하면 애월포에 당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 할 수 있었다. 고대 항해는 범선 항해시대로 바람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풍향에 따라서 도착지가 동서로 갈리게 된다. 한반도의 서남 도서에서 제주로 향하는 범선 항해는 주로 이러한 북서풍을 이용한 항해가 대세를 이루게 된다.  

지리적 환경과 항해학적 요소(바람, 해조류 이동) 때문에 북쪽에서 제주항을 바라보면 한라산의 중심선 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동쪽으로 조천포, 함덕포 세화, 종달, 성산포로 서쪽으로는 애월, 한림, 한경, 대정 등의 포구가 발달했는데 풍향의 세기에 따라 상륙지가 다르게 된다. 이러한 항해는 범선 항해 시대부터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60-70여 년 전 강진 지역 항해자들의 육성을 통하여서도 확인 할 수 있었다.  

 

명월포(明月浦), 명월진성(明月鎭城)

   
▲ 명월포를 중심으로 한라산 쪽에 자리잡은 명월진성(明月鎭城), 김영조 기자

명월포는 오늘날 한림항이다. 북쪽으로 비양도를 마주 보고 있어서 진도와 추자도를 거쳐 제주로 상륙하는데 중요한 거점 항구라 하겠다, 

명월포는 1270(고려 원종 11)에 삼별초의 별장(別將) 이문경(李文京)이 고려에서 파견된 관군을 진압하고 탐라를 점령할 때 상륙한 곳이며, 김방경(金方慶)이 삼별초를 정벌할 때에도 그 일진이 이곳으로 상륙하였다. 1374(공민왕 23) 목장을 관리하기 위해 몽고에서 파견된 몽고인 목자牧胡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최영(崔瑩) 장군이 상륙한 곳도 명월포였다. 

명월포를 중심으로 한라산 방향으로 명월진성이 자리 잡고 있다. 전략적으로 서북쪽에서 들어오는 여몽 연합군 해상 진입을 조망할 수 있다. 진도에서 김통정이 이끄는 삼별초가 여 · 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섬멸되어 최후를 마감 했다는 중요한 전쟁터가 명월포를 중심으로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또한 명월포를 중심으로 명월진성 또한 삼별초의 숨결들을 확인할 수 있는 격전지들을 쉽게 만나게 된다. 붉은오름,새별 오름 들이다. 또한 파군봉(破軍峰, 해발 85미터)은 군대를 격파한 봉우리라는 뜻에서 그 당시 상황들을 떠올리게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여몽연합군이 삼별초군을 크게 격파한데서 붙여졌다고 한다. 마루에 오르면 멀리 육지가 잘 보인다. .이외에도 .‘바굼지오름’, ‘붉은오름’, 새별 오름등이 있다. 

항파두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삼별초의 식수원으로 사용했던 옹성물과 구시물, 장수물, 유수암천등은 중요한 삼별초의 유적지로 손꼽게 된다.

 

옹성물과 구시물

   
▲ 삼별초가 먹는물로 썼던 식수원 유적 "구시물"(제주관광공사 제공)

이 물은 삼별초가 먹는물로 썼던 식수원 유적이다. 옹성물은 항파두리 북쪽 극락사 뒤에 있다. 이름은 옹성 안에 물이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 과거에는 수량이 풍부 했으나 지금은 그 양이 말이 줄어들었다. '구시물''옹성물' 동쪽 길가에 있는 샘물이다. 물의 보호를 위해 반원형의 석축을 쌓았다. '구시물'명칭은 구유의 제주방언에서 따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시물 북편 지점에 고려시대 때 만든 것으로 보이는 목조구유통이 발굴되었다. 구유는 소나 말 따위의 가축들에게 먹이를 담아주는 그릇으로 구유의 제주방언에 해당하는 구시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발굴된 목재구유는 사각의 테두리 각목과 테두리곽 내부로 4개의 널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닥 널판의 면적은 470×265로 대형 구유통으로 높이는 최소 70정도이다. 목재판의 밑은 널판 중앙부분에 각목이 놓여 있었고 20가량의 황색점토를 다져놓았다. 

 

장수물과 유수암천(流水岩泉)

   
▲ 애월읍 유수암리에서 솟아오르는 용천수 “유수암천”, 유수암리 마을 제공

장수물은 항파두리성 북서쪽 '골그미내' 가에 있는 샘물을 말한다. 장수물은 삼별초 장수들의 이용했다는 유래와 물의 흐름으로 보아 이 물을 마시면 무병장수한다는 상징적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삼별초가 사라진 뒤에도 마을 사람들은 이물을 소중하게 생각하여 집안에 크고 작은 제일(祭日)이 있으면 반드시 이 물을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유수암천은 제애월읍 유수암리에서 솟아오르는 용천수다.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옛날부터 물이 맑고 깨끗하기로 유명한 유수암리(流水岩里) 마을을 따라 흐른다. 고려시대 삼별초가 여몽 연합군에 대항해 최후까지 싸운 장소인 제주항파두리항몽유적지(사적 제396)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데 당시 삼별초는 애월읍 상귀리에 있는 구시물과 옹성물 이외에도 이 물을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삼별초 최후 뒤의 제주도 운명

제주에는 삼별초가 최후를 맞은 뒤 원은 500여명의 몽골군을 주둔시켰으며 이후 1,500여명의 몽골군이 제주에 주둔하면서 몽골군과 탐라 여인 사이에 혼인이 이루어졌고 이들 자손들은 제주에 계속 거주하면서 목호란에 참가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목호의 반발에 공민왕은 최영장군으로 하여금 전함 314, 장병 25,605명을 주어 목호 정벌에 나섰다. 명나라를 치려고 나선 이성계의 요동정벌군의 38,830명인 것에 비하면 얼마나 많은 정벌군이 출병했는가를 알게 된다. 공민왕의 정치적인 의도를 유추하게 된다. 

원나라를 멸망시킨 명은 탐라에 귀속권을 내세워서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고려로써는 이런 명나라의 야욕을 차단하기 위해서라 서둘러 탐라를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최영의 토벌군과 묵호의 치열한 공방전은 법화사와 범섬으로 이어지면서 최후를 맞는다. 이 전투의 승리로 고려는 원나라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전기가 되고 있다.  

제주도는 그 어디에 가서도 고려와 몽골의 침략으로 시작 되는 원나라 탄생 그리고 삼별초의 역사 유적지로 얼룩져 있는 피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피의 역사를 언제까지 기억해야 하는가. 이제 우리 모두가 피의 기억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발전의 토대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