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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학자 김슬옹과 함께 떠나는 한글 여행

훈민정음 정신을 드높인 책 "동국정운" 대표집필자 신숙주

한글 학자 김슬옹과 함께 떠난 한글 여행 3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보한재 신숙주(申叔舟, 141782(음력 620) ~ 1475723(음력 621)

태어난 곳: 전라남도 나주 한글마을

무덤이 있는 곳: 경기도 의정부 고산동 산 53-7


올해는 보한재 신숙주 선생 탄신 600돌이 되는 해다. 훈민정음 반포와 보급, 국방, 외교 등 그가 남긴 업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세조 집권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빛나는 업적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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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는 훈민정음 반포와 보급에 절대적인 업적을 남긴 조선 전기의 학자요 관리였다. 43번 국도를 따라 의정부에서 남양주 방향으로 가다 교도소 입구 건너편 고산동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로 들어서면 신숙주 선생묘라는 길안내 교통표지판이 보인다. 여기서 조금 더 가다 고산초등학교를 지나면 삼거리가 나오고 그 왼쪽 산 중턱에 바로 보한재 신숙주 무덤과 한글 공적비가 있다.

 

이 묘소는 신숙주의 무덤과 신도비, 사적비가 있는 곳으로 고령 신씨 문중공파 종중에서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다. 무덤은 부인 윤 씨와의 합장묘이며 두 개의 무덤 가운데 왼쪽이 신숙주 무덤이다. 무덤 사이에는 고종 건양 2년인 1897년에 세운 묘비가 있고, 앞에는 상석(사람이나 동물 모양의 돌)과 향로석(향피우는 화로를 놓은 돌)이 있고 무덤 좌우에는 문인석(문인 모양의 돌)과 무인석(무인 모양의 돌) 한 쌍씩이 서 있다. 문인석이 무인석보다 한 계단 위에 있다.






 

묘역 아래에는 신도비(임금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가 두 개 서 있다. 하나는 비각 안의 신도비이고 또 하나는 그 밑 길 옆의 신도비다. 비각 안의 신도비는 이승소가 글을 지어 성종 8(1477)에 세운 것이다. 이 신도비는 받침돌과 비몸이 정사각형이고 신도비의 글씨는 마모가 심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 밑의 신도비는 언제 세웠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 옆에는 1971년 한글학회에서 한글날 세운 문충공 고령 신숙주선생 한글창제 사적비가 있다.

 

신숙주가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나주로 지금은 한글마을로 지정돼 있지만 아직은 마을 꾸미기가 제대로 안 되었다.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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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는 보통 보한재라는 호로 흔히 불린다. 한가로이 공부에만 열중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신숙주는 태종 17년인 1417년에 태어났다. 세종이 임금이 되기 1년 전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세조, 예종, 성종을 더불어 섬기고 57살 때에 운명했다.

 

신숙주가 처음 벼슬에 오른 것은 스물두 살 때인 1438(세종 20)에는 두 번의 과거에 붙어 동시에 생원과 진사가 되었다. 이후 훈민정음 창제 전인 스물다섯 살 때인 1441년에는 집현전부수찬을 지냈고 창제 1년 전 26살 때인 1442년에는 일본으로 가는 사신단의 서장관에 뽑혀 국가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반포하는 데 매우 큰 공을 남긴다. 훈민정음 반포 직전인 1445년에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같은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 동시 통역사인 손수사와 함께 중국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받고자 요동반도에 유배를 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여러 차례나 다녀왔다.

 

1447(세종 29)31살 때에는 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응교가 되었고 동국정운》⋅《사성통고를 펴내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 36살 때인 1452(문종 2)년에는 수양대군이 명나라 사신 대표로 갈 때 서장관으로 함께 가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다.

 

37살 때인 1453(단종 1)년에는 수양대군이 이른바 계유정란을 일으켰을 때 외직에 나가 있었으나 일찍이 수양대군과 가까웠던 탓에 공신이 되고 곧 도승지에 올랐다.

 

42살 때인 1460(세조 6,)년에는 강원함길도의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야인정벌을 위하여 출정하여 국방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53살 때인 1471(성종 2)년에는 성종의 명으로 세종 때 서장관으로 일본에 갔던 경험을 살려 해동제국기를 지었다. 이 책은 조선 시대 내내 일본과의 외교 지침서가 되었다.

 

54살 때인 1472(성종 3)년에는 세조실록》ㆍ《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이어 세조 때부터 작업을 해온 동국통감의 펴냄을 총괄하였다 . 또 세조 때 펴냄을 명받은 국조오례의의 고쳐 펴냈고 여러 나라의 음운에 밝았던 그는 여러 번역 관련 책을 펴넸으며, 또 일본여진의 중요 지역을 표시한 지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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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444216. 훈민정음 28자를 만든 지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세종임금은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 이선로, 이개, 돈녕부 주부 강희안 등을 어전으로 불러 들였다. 세자 이향(뒤에 문종)과 둘째 아들 진양대군(수양대군) 이유, 셋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도 참석하였다.

 

세종: 중국 발음책 고금운회(중국 송나라 황공소 지음)를 한글로 두치는(번역) 일이 꽤 진척이 되어 그대들을 치하하기 위해 불렀소. 짐이 왕자들을 통해 수시로 보고는 받아서 알고는 있지만 이렇게 빨리 진척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소.

최항: 소신들은 전하가 가르쳐 주시고 시킨 대로 했을 뿐이옵니다.

세종: 외국어에 능한 부수찬(신숙주), 이 일을 해보니 새 문자가 어떻.

신숙주: 새 문자의 효용성이 신묘하여 어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중국 발음 책은 전하께서 자상하게 알려 주신 바와 같이 한자는 뜻글자이온지라 자신들의 발음조차 정확히 적을 수 없어 두 글자를 쪼개 설명하는 반절법을 만들어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를테면 ()’자의 경우 이를 반으로 쪼갠 자의 과 같고 와 같다는 식이옵니다. 그런데 우리 정음(한글)은 그대로 라고 적을 수 있으니 얼마나 쉽고 정확한지 모르옵니다.

세종: 원나라 웅충이 몽골 글자인 파스파(1269년에 반포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사라진 문자) 문자로 발음을 적은 것은 어떠하오.

신숙주: 파스파 문자도 소리 문자인지라 중국의 반절로 적은 것보다 훨씬 낫사오나 역시 우리 정음 처럼 정확히 적을 수 있는 문자는 아니옵니다.

 

그림을 잘 그리고 글씨도 잘 쓰는 강희안도 한 마디 거들었다.

 

강희안: 섬세한 발음을 정확히 적으니 새 문자가 마치 소리가 꿈틀대는 그림 같사옵니다.

세종: 바로 그렇소. 내가 몽골의 파스파 문자를 참고해서 새 문자를 만들기는 했으나 바로 그런 차이가 있소. 파스파 문자는 닿소리(자음) 30, 홀소리(모음) 8, 기호 9개로 되어 불편해 실제로는 거의 쓰이지 않고 있으니 그런 불편한 문자를 우리가 본받을 필요는 없소. 이제 새 문자의 중요성은 그대들 이 더 잘 알 줄 믿소.

박팽년: 한자든 중국어이든 우리말이든 발음을 정확히 적어 표준을 만들어야 천하를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사오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세종: 그렇기에 세 왕자를 모두 참여시킨 것이오. 중국인들은 땅이 넓어서 그런지 발음이 몹시 혼란스럽소. 이제 우리는 우리가 만든 문자로 표준 발음을 정할 것이오. 그래야 정확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겠소? 이제 번역이 어느 정도 끝났으니 신하들 모두에게 이 업적을 널리 알릴 것이오. 세자는 이들에게 넉넉히 상을 내리도록 하라.

모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러한 중국 발음책 뒤치는 일을 미심쩍은 마음으로 지켜보았던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 등 집현전의 원로학자 일곱 명은 집현전 한 연구실에서 긴급 회합을 가졌다. 이들은 새 문자가 하층민들도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인데다가 중국의 정통 발음까지도 우리식으로 정리한다는 말을 듣고 급히 모인 것이었다. 이리하여 4일 뒤인 220일 세종의 새 정음(문자) 정책을 반대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세종은 이들의 대표인 최만리 부제학과 깊은 토론을 나누었고 어느 정도 설득이 되자 다시 본격적인 표준 발음 정리와 해설서 집필에 매달렸다. 반대 상소가 올라온 1년 쯤 지난 144517일 세종 임금은 신숙주, 성삼문과 동시 통역사 손수산 등을 불렀다.

 

세종: 내 그대들을 부른 것은 중국 요동 땅에 다녀오게 함이오.

성삼문: 요동 땅은 천릿길이온데 어인 일이오니까?

세종: 그대들도 중국의 저명한 음운학자인 황찬을 알 것이오. 그가 요동에 귀양 와 있다 하니 가서 만나보고 오시오.

신숙주: 중국 운서에 대한 번역과 연구 자문을 구하고 오란 말씀이온지요.

세종: 그렇소. 중국 운서를 통해 정확한 중국 발음과 이에 대한 짜임새 있는 이해가 가능은 하지만 그래도 중국학자의 설명을 듣는 것이 백 번 낫겠지요.

 

세 신하는 연구 코치까지 꼼꼼하게 챙겨주는 임금의 섬세한 배려에 그저 탄복할 뿐이었다. 몇 달이 걸리는 고된 일정이었지만 그들은 좀 더 완벽한 새 문자 해설을 위해 기꺼이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식 발음 표준서인 동국정운을 완성하고 중국발음책도 정확히 옮길 수 있었다.

 

이런 고된 여정에서 신숙주와 성삼문이 직접 남긴 시가 남아 있다.

 

잇소리, 혓소리, 입술소리, 어금닛소리, 발음 아직도 익숙지 못하니

중국 사신 길 기자를 묻는 헛걸음 되었네.

삼경의 초생달에 고향 생각 떠오르고

한때의 훈훈한 바람 나그네 시름 흔드누나.

요동 하늘에 먼지이니 먼 시야 희미하고

골령에 구름 걷히니 푸르름 드러나네.

소매 속에서 때때로 제공들의 글을 보며

되는 대로 흥얼대니 작별의 설움 새로워라“ _신숙주 

 

나의 학문 그대보다 거칠고 못 미

요양의 리 길 함께 감 부끄럽네.

자리 위 호족 장사치는 나와 무릎 마주하고

하늘가의 먼 나그네 인정을 못 이겨 하네

꿈속의 고국 참으로 갈 수 없는데

봄 지난 동산의 숲은 푸르기만 하구나

글귀마다 모두 백설의 명곡이니

화답하여 온갖 시름 잊을 수 있네“ _성삼문

 

세종대왕은 144312월에 훈민정음 28자를 완성한 뒤에 이 새 글자를 알리기 위한 해설서 집필을 집현전 일부 학자들에게 명했다. 바로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이 그들이었다. 정인지는 세종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 총책임자였고 최항은 30, 나머지는 20대 후반의 젊은이들이었는데 음운에 밝았던 신숙주와 성삼문은 더욱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황찬과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와 토론을 나누었고 어떤 것을 배워왔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두 젊은이의 이런 노력이 훈민정음 해례본 저술에 매우 큰 도움을 주었음은 틀림이 없다.

 

특히 신숙주는 훈민정음 해례본 집필뿐만 아니라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하는 동국정운을 세종과 함께 펴내는 중추적인 구실을 했다. 


 


세종 임금이 죽기 몇 년 전인 14503 월 어느 날이었다. 서울 한성엔 중국 사신단이 머무르고 있었다. 정인지, 김하, 성삼문, 신숙주 등은 동시 통역사 손수산을 데리고 중국 사신을 만나고 있었다.

 

사신 : 이 분들은 어떤 벼슬살이를 하고 있습니까?

김하 : 집현전의 학자들입니다.

정인지 : 조선이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어 바른 음을 배우려 해도 스승이 없습니다. 대인께서 많은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가 중국음을 처음에는 쌍기 학사에게 배웠는데 그분은 중국 복건 땅 사람이었습니다.

사신 : 복건(福建) 땅의 음()이 조선과 비슷하니 그곳 발음으로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나서 중국어 발음 이론 책인 홍무정운을 가지고 한참 서로 토론하였다. 이 때 토론한 홍무정운이란 책이 세종 임금이 훈민정음 만들 때 많이 참고한 책이었다. 훈민정음 해설 책을 낼 때는 여기에 참여한 신숙주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에게 큰 도움을 준 책이다.

 

이로부터 5년 뒤인 1455(단종 3)년 신숙주는 중국 발음 책을 자세한 풀어쓴 홍무정운 역훈(洪武正韻譯訓)16권 펴냄을 끝내고, 머리말을 써서 그 책을 임금께 바쳤다. 그리고 또 이 책을 우리식으로 풀어 쓴 사성통고(四聲通攷)라는 책도 펴냈다. 우리말 연구에 귀중한 보물들이다. 아쉽게도 이 책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을 최세진이 보완하여 펴낸 사성통해(四聲通解)라는 책이 남아 있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이 완성되기 2년 전인 1453, 단종이 임금이 된지 1년 되던 해 신숙주는 성삼문과 더불어 중국어 교재인 직해동자습역훈평화(直解童子習譯訓評話)를 함께 펴냈다. 이렇게 늘 함께 연구한 성삼문도 뛰어난 학자였으나 세조를 반대하여 일찍 죽는 바람에 많은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훈민정음 발음 책 동국정운 대표 저자

 

1448년 어느 날 정음청에서 신숙주는 밤늦도록 동국정운을 집필하고 있었다. 그날은 성삼문과 박팽년도 퇴청하지 않고 같이 연구에 몰입하고 있었다. “소리를 알아야 음을 알고, 음을 알아야 음악을 알며, 음악을 알아야 정치를 알게 된다.”는 세종 임금의 말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이제 서서히 눈꺼풀이 무거워지려던 차라 먼저 신숙주가 입을 열었다.

 

숙주: 여보게들 이제 동국정운마무리를 하려니 감개무량하이.

삼문: 우리는 본문 교정이 거의 다 끝나 가는데 자네 서문 쓰는 것은 어찌 돼가나.

숙주: 마침 서문의 한 문장이 내 스스로를 감동시키는 구먼. 이것 보게 “”하늘과 땅이 서로 어울려 통하니 사람이 생기고, 음양이 서로 만나 기운이 맞닿으매 소리가 생겨났다.”라는 말 어떤가.

팽년: 참으로 명문이네. 사람이 다르면 소리도 다르고, 지방이 다르면 소리도 다르니 뜻은 통할지라도 소리가 다른 경우가 많은 것 아니겠나?

삼문: 우리나라 풍습과 기질이 이미 중국과 다르니, 말의 소리가 중국과 다른 까닭은 당연한 것 아닌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자네들이 매끄럽게 연결해 주었네.

숙주: 글자가 만들어지지 못했을 때는 훌륭한 사람의 바른 길은 하늘과 땅 이치에 따랐고, 글자가 만들어진 뒤에는 훌륭한 사람의 길이 책에 실리었으니, 훌륭한 사람의 길을 연구하려면 마땅히 글의 뜻을 먼저 알아야 하고, 글의 뜻을 알기 위한 요령은 마땅히 말소리부터 알아야 하니, 말소리는 곧 훌륭한 사람의 길을 배우는 시작이다. 이리하여 우리 임금(세종)께서 말소리에 마음을 두시고 모든 것을 두루 살피시고 훈민정음을 만드셔서 모든 후손들의 영원한 길을 열어 주셨다.

 

이리하여 신숙주는 여러 신하들과 밤낮으로 연구하여 1449동국정운을 펴냈다. 이 책 머리말에서 신숙주는 이렇게 적었다.

 

이제 훈민정음을 적으면 그 어떤 소리도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하니, 훈민정음은 실로 소리를 전하는 중심 줄인지라. 아아, 소리를 살펴서 말소리를 알고, 말소리를 살펴서 음악을 알며, 음악을 살펴서 정치를 알게 되나니, 뒤에 보는 이들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으리로다.

 

동국정운은 바로 가장 이상적인 말소리의 표준을 적은 책이었다. 신숙주는 동국정운이란 책을 펴낸 것만으로도 훈민정음 연구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