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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백년편지] 각인된 기억 -이정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백년편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글 형식의 글입니다.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 접수를 받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문의 : 02 -733-5027】

 

1949년 6월 26일.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아침에 라디오를 트는 순간,

아 ~ 아 ~

하늘도 땅도 우는 소리

바다조차 우는 소리

임이여 듣습니까?

임이여 듣습니까?

임이 계시오매 든든한 양 믿었더니

두 겨레 갈라진 땅 이대로 두시고서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한 남자가 울부짖으며 시를 읊었다. 짧은 시지만 길게 기일게 흐느끼며 시를 읊어서 그 울림이 광활한 벌판에서 폭풍우를 몰고 오는 우레 소리처럼 강하고 장엄하게 들려 왔다. 딱 한번 들은 그 시는 내 머리 속에 각인되었고, 내 가슴속에 들어와 촛불처럼 나를 밝힌다. 그 시는 백범 김구 선생이 젊은 군인 안 두희가 쏜 총에 맞아 쓰러지던 날 온 국민이 충격에 빠졌을 때에 라디오를 통해 들은 시다.

 

퇴근해 돌아오신 아버지께서도 침통한 표정을 지으시고, "어렵게 독립되어 서로 합심해 나라를 지켜야 할 이때에 이런 변고가 생기다니?" 하시며 몹시 괴로워 하셨다. 학교에 가니 선생님들의 표정도 어두웠다. 조회 시간에 아침 체조도 생략하고 단상에 올라가신 교장 선생님께서 학생 여러분 오늘은 우리나라의 지도자이신 김구 선생님이 돌아가셨으니 모두 머리 숙여 묵념하고 그분의 명복을 빌자고 하셨다. 묵념 후에 교장 선생님께선 나라사랑의 훈시를  길게 기일게 하셨다.

 

조회가 끝나고 교실로 돌아온 단임 선생님께서도 오늘 수업은 애국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공부하도록 하자고 하시며 너희는 우리나라가 언제 해방이 되었는지 아는 사람 있으면 말해봐!” 하셨다.

1945. 8.15일입니다. 하고 한 아이가 크게 대답했다.

그럼 우리나라를 침략 했던 나라는?”

“일본입니다.”

우리는 한 목소리로 교실이 떠나갈 만큼 크게 대답했다.

“그래요,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36년 동안 많은 학대를 받았어요. 그때 우리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신 애국지사들이 참 많으셨는데, 그분들 중에 한 분이신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갑자기 돌아 가셨어요.”그러니 우리는 훌륭한 지도자를 한 분 잃고 말았다. 하시며 김구 선생님께서 독립을  위해 애쓰신 여러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그러니 너희들도 그분의 뜻을 받들어 열심히 공부해서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하셨다. “오늘은 이것으로 수업을 마칠 테니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나라를 사랑 하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라”고 하시며 조용히 나가셨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라디오를 켜니 어제 들었던 시가 또 흘러 나왔다.

 

아 ~ 아 ~

하늘도 땅도 우는소리

바다조차 우는소리

임이여 듣습니까?

임이여 듣습니까?

임이 계시오매 든든한 양 믿었더니

두 겨레 갈라진 땅 이대로 두시고서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그 시를 들으며 어린 마음에 큰 산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고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엄습해 혼자 라디오를 바라보며 울었던 기억이 있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애국지사들의 혼신과 고통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해방은 되었지만 남북으로 두 동강이 나서 사상과 이념으로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조국이 되고 말았다. 전쟁 없는 통일을 이루어 완성된 조국을 만들고자 애쓰시던 김구 선생님께서는 그날 그렇게 젊은 군인 안 두희 총에 쓰러져 고달픈 생을 마감 하셨다. 그리고 국민들의 통곡 소리를 뒤에 두고 영영 떠나가셨다.

 

그 후 정확히 1년이 되는 날 또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피 비린내 나는 6. 25. 전쟁이 발발 했다. 그 끔찍한 동족상쟁은 한국을 초토화시키고 전 세계의 젊은이들까지 유엔군으로 와서 희생당하는 비극 중에 비극의 전쟁이었다.

 

6.25. 이전에 서울에서 공부하던 어느 황해도 청년은 전쟁 발발로 고향집엘 못가고 국군으로 징집되어 백마고지에 부대 배치를 받았다고 한다. 야간 전투에서 인민군과 육박전을 벌이고 아침에 전과를 보고하기 위해 현장에 가서 죽어 있는 인민군이 자기 친 동생인 것을 확인하고 통곡하다 실신해 버렸다고 한다. 그 장면을 지켜본 동료들도 총대를 집어 던지고 함께 통곡을 했다는 이야기는 뼈가 저리고 저린 이야기다.

 

말 그대로 동족상쟁이 되고만 육이오 전쟁 이였다. 이런 비극을 막으려던 김구 선생이 살아 계셨더라면, 피비린내 나는 이 전쟁은 막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이 가슴을 치게 했다. 나는 요즘 신문에서 가끔 그분의 아들인 김 신씨의 행적을 읽는다. 김 구선생의 둘째 아들인 김 신씨는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항일 운동을 보고 배우며 자랐다.

 

일본 공군의 1937년 중국 난징 폭격을 목격하고, 훗날 공군력으로 조국 독립에 기여하리라 다짐하며 조종사의 꿈을 키웠다. 드디어 그는 공군 생도가 되어 미 공군 랜돌프 기지에서 정식 비행 훈련을 받아 조종사가 됐다. 그리고 귀국해 공군 학사 사관 후보 생으로 임관했다. 1947년 귀국한 그는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군에 입대해 이듬해 공군 창설에 기여 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 다음날 26일 일본으로 건너가 미 공군의F-51 머스탱 전투기를 인수했으며 일주일 훈련 한 뒤 한국에 돌아와 실전에 투입됐다. 그는 1951년 지리산 공비토벌과 항공작전에 임했고 같은 해 10월 한국 공군 단독 출격 작전 등 19 차례의 전투 출격에서 무공을 세웠다.

 

전쟁이후에는 공군본부 행정 참모 차장을 거쳐 1960년부터는 2년 동안 공군 참모 총장을 지냈다. 재임기간에 유도 무기인 GAR-8 유도탄을 도입하는 등 공군력을 강화하는데 이바지했다. 군복을 벗은 뒤엔 주(駐) 대만 대사, 교통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두루 거치며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독립기념관 이사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백범 김구 선생 기념 사업회 회장을 맡아 김구 선생의 독립정신을 선양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리고 94세 노환으로 생을 마감 했다. 그는 회고록에 백범 김구선생의 가족이라는 것이 큰 자랑이자 짐이었다고 썼다. 그러나 백범의 아들로 태어나 백범의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나라를 사랑하며 국가에  공헌하고 아버지 곁으로 그는 갔다. 하늘나라에서 백범이 장하다 내 아들, 하고 반기시는 모습을 상상 하며 이글을 마치려는데, 조병화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꿈의 귀향] 조 병화.

나는 어머님(아버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아버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니(아버님)께 돌아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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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정자

한빛 문학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