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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화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씨앗과 열매 / 김정애

석화 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33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올해 아흔네 살 되는 우리 엄마가 이야기보따리를 풀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나는 내 앞가림을 착실히 했다.”라는 말씀이다. 흐뭇한 어조로 말하는 엄마의 얼굴에는 홍조가 어린다. 수많은 세월 속에서 허리는 꼬불었지만 착한 인생을 살아온 엄마의 자존심은 꼿꼿하다.

 

지금으로부터 62년 전 엄마는 전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남게 되자 시골에 사는 우리 아버지와 재혼하였다. 당시 아버지에게는 여섯 살 되는 딸, 네 살 되는 아들, 그리고 년로한 부모님까지 있었다. 아버지는 엄마보다 십오 년 년상이지만 유식하고 시비 바른 사람이었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가 존경스럽고 좋았다고 한다.

 

결혼 뒤 엄마는 일 년 만에 나를 낳았고 몇 년 뒤에는 동생까지 낳았다. 큰집살림인지라 만만치 않았지만 재롱을 떠는 우리가 있어서 행복했단다.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우리들을 보면서 학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엄마와 의논했더니 엄마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첫돌도 안 되는 동생을 업고 서둘러 이사했다.

 

이사한 뒤 아버지 건강은 그다지 좋지 않아 집주변에 심은 채소밭이나 가꾸고 간혹 돼지죽이나 한두 번 주면 그뿐이었다. 엄마는 유일한 로동력이라 쉬지 않고 일하였다. 학교는 집에서 오리쯤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지어야 했다. 매일 밥한 끼 먹으려 해도 밥상을 세 개나 펼쳐야만 했지만 엄마는 싫은 내색 없이 살았다. 그런 엄마 마음을 아는지 우리 형제들은 소학교 때 반급에서 반장을 맡고 초중에 가서는 단서기 직무까지 맡았고 늘 모범생상장을 타다 엄마에게 바쳤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길 줄이야. 문화대혁명이란 폭풍우는 작은 농촌 마을도 빼놓지 않고 지나갔다. 어느 날 반란파라는 사람들이 아버지를 찾아와 “당신 동생이 반역자라는데 당신도 의심스럽다.”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난 조직에 참가한 적도 없고 그러니 반역한 적도 없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반란파들은 로실(성실)하지 못하다고 투쟁대회에 세웠다. 대회가 끝난 뒤에도 생산대담배건조실에 가두어 놓고 번갈아 망을 보면서 고문과 매를 반복하였다. 며칠 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원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렸고 얼마 안지나 억울한 아버지는 우리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나갔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엄마는 죽을 만큼 힘들고 괴로웠지만 이를 악물고 살아야 했다. 낮에는 생산대 일, 밤에는 집안일, 밤에 낮을 이어가면서 초심을 잃지 않고 굳세게 살았다. 참군한(군대 입대한) 오빠는 아버지가 세상 떴다는 소식을 듣고 그 충격으로 병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량식이 귀하던 그 세월에도 밤새도록 엿을 달여 오빠에게 넘겨주면서 “장롱 속에 감춰놓고 혼자 먹으라.”고 당부했다. 부대에서 돌아온 오빠는 청년조직에서 써주지 않아 몇 년 동안 생산대(문화혁명 당시의 맨 아래 행정구역, 현재의 ‘촌’)에서 일만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대대 당지부서기가 오빠를 찾아와 단총지서기(공산주의청년단 총지부 서기)를 맡으라고 하였다. 오빠와 집식구들은 모두 기뻤다. 정치생활이 시작됐으니 희망이 보여 기쁠 수밖에… 오빠는 이듬해 대학에 추천받아 의학원에 가게 되었고 대학교에서 입당까지 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오빠는 연변병원에 취직하였다.

 

연변위생학교를 졸업한 언니는 통화지구위생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지금은 퇴직하고 북경에서 손자 손녀를 돌보고 있다. 매년 돌아오는 생일과 설 명절은 잊지 않고 있으며, 남동생의 대학입학통지서는 또 다시 엄마를 기쁘게 했다. 이름도 쓸 줄 모르는 엄마가 대학생 아들을 둘씩이나 두다니 기쁠 수밖에 없다. 남동생은 건축학원을 졸업한 뒤 기업가로 성장하였다.

 

동생은 농촌에 있는 엄마를 모셔와 줄곧 한집에서 살았다. 동생네 부부 역시 효자이고 효부이다.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언니와 오빠한테는 온화하고 야단도 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말투가 거칠고 야단도 잘 치는 호랑이엄마였다. 어린 나는 엄마를 리해할 수 없었고 그런 엄마가 싫고 아버지가 무조건 좋았다. 언니는 새옷을 해주었지만 나는 기본상 언니가 입던 옷을 입었다. 그런 언니와 오빠는 엄마가 낳지 않았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게 되였다. 둘째딸인 나는 형제들 가운데서 내세울 것도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에 늘 마음이 괴로웠다.

 

그때 나는 어정쩡한 나이에 문화대혁명의 아픔을 겪게 만든 세상도 원망했고 대학시험을 못 치게 한 엄마도 원망했다. 심지어 엄마는 나에게 해준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만사는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다. 엄마가 왜 나한테 해준 게 없겠는가? 농촌에서 연길로 이사왔을 때 나는 혼자 힘으로 인력거에다 짐을 싣고 다니면서 과일장사를 하였다. 과일 장사로부터 한걸음 한걸음 발전해 오늘은 몇 명 직원을 거느리는 중형마트를 경영하는 경영인으로 되었다.

 

 

지난 몇 십 년을 돌이켜보니 엄마는 한결 같이 내가 하는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팬이였다. 이 딸이 너무 늦게 마음을 열게 되여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지금부터라도 나에게 효도할 기회를 줘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엄마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마음이 측은해진다. 사십대 중반에 혼자된 엄마… 온갖 역경 속에서도 곁에서 우리를 지켜온 엄마!

 

엄마가 뿌린 사랑의 씨앗이 우리 형제들 가슴속에서 꽃피고 열매를 맺어 우리 모두가 저마다 하는 일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나는 말한다. 엄마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