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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임금으로 살기와 개인 이도로 살기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0]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생각하는 정치를 편 세종은 유교 국가를 표방한 조선에서 백성은 개인적으로 종교를 가지고 있었을까? 한마디로 나라의 이념과 관계없이 개인이 갖는 정신적 세계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세종의 가족인 수양은 불교에 심취해 있으며 세종의 뜻을 받아 여러 불경을 펴내는 것을 도운 실마리를 다음 대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수양대군과 성임의 대화를 보자. (이하 실록내용 대화체로 구성)

 

수양대군 : 너는 공자의 도(道)와 석가가 누가 낫다고 이르느냐.

주서 성임(成任) : 공자의 도는 내가 일찍이 그 글을 읽어서 대강 그 뜻을 알거니와, 석씨(釋氏)에 이르러서는 내가 일찍이 그 글을 보지 못하였으니, 감히 알지 못합니다.”

수양 : ‘석씨의 도가 공자보다 나은 것은 하늘과 땅 같을 뿐만 아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비록 좌소용마(挫燒舂磨)* 하고자 할지라도 베푸는 바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그 이치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말한 것이다.” (《세종실록》 30년 12월 5일)

* 좌소용마(挫燒舂磨) : 몸을 꺾어 태우고 찧어서 가는 것.

 

세종, 불교 선언이 아니라 신하들의 인지를 기대

 

세종 또한 불교에 대해 ‘나는 불교를 믿는다’는 선언이 아니라 내가 믿고 있음을 신하들이 인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이심전심, 공인된 묵인을 기다리는 마음이라 하겠다.

 

불교 : (집현전에서 왕비를 위한 불경 펴냄의 뜻을 거둘 것을 아뢰나 받아들이지 아니하다 )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들은 고금의 사리를 통달하여 불교를 배척하니, 현명한 신하라 할 수 있으며, 나는 의리는 알지 못하고 불법만을 존중하여 믿으니, 무지한 인군이라 할 수 있겠다(可謂無知之君矣). ... 하물며, 내가 근년에 병이 많아서, 궁중에 앉아 있으면서 다만 죽을 날만 기다릴 뿐인데, 그대들은 나를 시종(侍從)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내가 불교를 믿는가 안 믿는가를 알 것이다. 그대들이 비록 고집하여 다시 청하지마는, 내가 접견하지 않으므로 개설하고 변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혹시 상소를 올리더라도, 내가 친히 보지 않으므로, 그대들의 뜻을 환하게 알기가 어려울 것이니 번거롭게 다시 청하지 말라.”(《세종실록》 28년 3월 28일)

 

세종은 죽음을 거론하며 불교에 빠져 있음을 고백한다. 이런 상황은 세종이 불교에 심취한 것이 아니라 개인 이도가 불교에 기운 것이다.

 

세종이 불교를 앞세워 정치를 한 일은 없다. 불교의 교리를 경연 등에서 펴지도 않았다. 불교와 관련해 한 일은 흥천사 복원이나 불교를 소개하는 《석보상절》 그리고 석가를 찬양하는 《월인천강지곡》등을 펴낸 것일 뿐이다. 불교는 펴되 정치화하지는 않았다. 다른 해석으로는 당시 창제한 훈민정음을 백성들 사이에 퍼져 있는 불교를 통해 확산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독서를 통한 마음 닦기 이것이 유교의 길이라면 수행을 통한 마음의 지혜를 얻고자 했던 것이 바로 불교다. 나의 마음이 비어 있는 상태. 무심의 경지, 이는 불교를 통해 다다를 수 있는 세계다. 불교 사상은 모든 생명과 금수초목은 물론 흙 한 줌, 돌멩이 한 개에 이루기까지 최대의 의미를 부여하는 화엄학이면서 동시에 모든 생명의 무상함을 선언하고 있다. 화엄과 무상이라는 이율배반적이라는 모순이 불교 속에 있는 것이다. (신영복, 《강의》, 돌베개, 2013, 47쪽)

 

정신과 몸이 피폐한 세종, 안식을 불교에서 얻다

 

‘종교니까 종교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고 동어반복으로 말해야 할까? 세종이 왜 불교에 빠졌을까? 이때는 세종이 아니라 개인 이도로 돌아간 셈이다. 그러면서 차츰 정무는 후반기 들어 “임금이 늙고 병들면 세자(世子)가 정사를 섭행(攝行)하는데, 이것은 예부터 내려오는 관례다.”(《세종실록》 25년 4월 17일)하면서 세자에게 넘겼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고(《세종실록》 25년 12월 30일) 난 뒤 이제는 ‘나도 한 사람의 백성이 되었다’는 안도감과 성취감을 맛보게 된다.

 

그런데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 이여가 죽었다.(《세종실록》 26년 11월 26일) 이어서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 이림이 죽었다.(《세종실록》 27년 1월 16일) 살아생전 한을 간직하면서도 아이들과 지아비를 사랑하던 부인 소헌왕후가 죽었다.(《세종실록》 28년 3월 24일) 세종의 몸이 노쇠했다기보다 여기저기가 온통 아픈 것이다.

 

세종 말기에 이르러 몸은 아프고 아들과 부인은 죽고 정신과 몸이 피폐한 때 안식을 불교에서 구하고자 한 일이 있었다.

 

왕비를 위한 불경 : “대군으로 하여금 왕비를 위하여 불경을 만들게 하려고 의향을 보였더니, 대신들이 모두 옳다고 하는 까닭으로 이에 따랐던 것인데, ... 내가 이미 불교를 좋아하는 임금인데, 경 등이 모두 버리고 이를 잊었지마는, 나는 이단의 일로써 경 등을 허물하지 아니하니, 그것을 알 것이다.” 하였다. (《세종실록》 28년 10월 4일)

 

세종은 먼저 기존의 틀을 깨지 않으면서 도덕과 윤리 사이, 유교와 심학 사이, 풍수와 무교 사이를 오가며 그들의 실체를 알고자 했다. 우선은 기존의 틀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이라는 새로운 자[尺]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 했다. 세종에게서 새로움이란 기존 사상들 사이의 충돌, 일례로 사람과 사물의 변화 사이에 있는 제3의 세계에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