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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멀리 보는 눈이 있었다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1]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생각하는 정치인 세종은 신하인 관리들과는 현실정치에서 다른 먼 앞을 보는 눈과 깊이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해 본다. 관리는 자기가 맡은 직(職)의 위치에서 자기 업무에 충실하면 된다. 나라의 큰 책임을 진 사람은 현재의 일만이 아닌 미래에 벌어질 결과를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소인배는 과거에 얽매이고 관리는 현재에 살고 지도자는 미래에 눈[視點]을 두고 살 것이다. 여기 한 예로 북방의 여진족에 대한 대비한 세종의 멀리 보는 눈을 살필 수 있다.  

 

멀리보기[후일지효-後日之效]의 눈

 

세종은 임금으로 날마다의 일을 처리하는 것 외에도 나라의 미래를 보고 ‘천년사직’을 유지해 가야 한다. 나라의 경계를 지키는 일이 그 중 하나다. 김종서(1390~ 1453)와 조말생의 예가 있다.  

 

후일지효(後日之效, 김종서에게 4진의 형세와 앞으로의 추세를 보고하게 하다): 오늘날 변방을 개방하는 것으로써 상책을 삼으면 의심이 없다. 뜻밖에 첫해의 큰 눈[雪]과 이듬해의 큰 역질(疫疾)로서 사람과 가축이 많이 죽었고, 지난해의 적변(賊變, 도둑의 변)으로 지치고 죽은 사람이 또한 적지 않았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내 뜻으로는 오히려 대사를 이루려면 처음에는 반드시 순조롭지 못한 일이 있어도 뒷날의 공을 들인 보람은 반드시 바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종실록》 19년 8월 6일, 雖然予意猶以爲成大事者, 其初必有不諧之事, 後日之效, 必可望也)

 

김종서에게 4진의 형세와 앞으로의 추세를 보고하게 하며 나온 말이다. ‘옛날의 나라를 다스린 분은 그 토지를 넓히는 데에 힘썼사오니, 공험진(公嶮鎭, 고려시대 윤관이 개척한 9성의 하나) 이남은 버릴 수 없습니다.’ 하는 상소도 있었고 유생들에게 책시(策試, 계책을 물어서 답하게 하던 과거)할 때에 이를 물었었다. ‘후일지효’는 여러 노력들은 당장에는 힘이 드나 반드시 뒷날에 그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는 실천적 의지와 신념이다.
 
비위 관리 조말생을 지켜보다

 

실제 사람을 내치지 않고 아껴 둔 예로 조말생(趙末生 1370~ 1447)이 있다. 조말생은 태종과 세종대에 걸쳐 신임을 받을 정도의 능력을 갖춘 군사전문가였다. 그러나 문제는 ‘김도련 노비 소송 사건’에 얽힌 전형적인 탐관오리의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조말생은 김도련에게 뇌물을 받고 형조 관리들을 포섭해 김생과의 소송에서 승소를 이끌어내어 김생의 후손 426명이 억울하게 노비가 되고, 그들의 재산은 모두 김도련이 차지하게 된 일에 연루되었다. 세종 4년에 문제가 벌어져 세종 8년에 중신들까지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세종은 유배지 평산에 있던 조말생을 사면해주고 2년 뒤 1430년(세종 12년) 4월에는 회수했던 직첩(職牒,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까지 돌려주자 또 다시 조정이 시끄러워졌다. 우사간 변계손과 신포서가 조말생의 재임용을 영구히 막으라고 청하지만 세종은 듣지 않는다.

 

2년 뒤 1432년(세종 14년) 12월 8일에 세종은 조말생을 동지중추원사에 제수하고 이에 사간원에서 부당함을 상소하고, 이견기의 11차례 상소에 이르기까지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연일 조말생의 관직을 거둘 것을 간청한다. 그해 12월 15일 조말생은 자신도 조금은 부끄러웠는지 스스로 사직을 청하지만 세종은 물리치고 12월 17일 권도를 내세우고 이틀 동안 대간들이 전원 사직 시위를 펼쳤으나 세종은 대간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세종 15년 당시 함길도 백성들은 여진족의 잦은 침입과 명나라 사신이 행차할 때마다 공물을 징발당하는 등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세종은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여진족을 섣불리 정벌하다 국경이라도 침범하면 명나라와 외교적 마찰이 빚어질 수 있었다.

 

조말생은 태종 때부터 병조판서로 8년을 복무하고 대마도 정벌에 참여했던  경험으로 명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세종은 군사작전 수행능력이나 외교력이 뛰어난 조말생을 1433년(세종 15년) 1월 19일 함길도 관찰사에 임명한다. 그해 4월 파저강 전투가 있게 된다. 조말생은 함길도에 부임하자 명나라 조정을 설득한 후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고 북방을 안정시키는 공을 세우게 되고 이에 조말생에 대한 비난은 누그러진다. 파저강 전투는 최윤덕이 지휘하였으나 그 밑작업에서 조말생이 맡은 바가 컸던 것이다. 

 

조말생은 능력이 있어 공도 세우고 동시에 탐관오리이기도 하다. 선비의 도로 보면 조말생은 식견이나 행실이 변변하지 못한 선비지만 세종의 자리에서 보면 국가의 경계를 지켜내는 군사전문가이다. 세종은 뇌물비리 사건과 국가의 안위를 같은 자리에 놓고 비교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보인다. 이때 국가의 안위를 더 걱정하고 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언젠가 북방문제는 일어날 것이고 그때 조말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예비하고 있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몇 역사 연구가들이 조말생을 옹호한 세종에 대해 비난하기도 하지만 임금이라는 자리에서 전체를 그리고 먼 앞을 깊게 보아야 하는 ‘관점[위치]’의 차이가 있음도 고려해 볼 일이다.

                   


조말생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조말생趙末生, 1370~1447 세종 29년) : 북방 안정에 힘쓴 조선 초기의 문신. 개국 이후 네 번째 장원급제자로 명성을 얻었다. 세종 1년에는 이조참판을 거쳐 형조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태종 14년에 김도련 노비소송사건에 크게 개입하여 회인을 거쳐 황해도 평산 땅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1428 세종의 비호로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으며 함길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북방을 안정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