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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화 시인이 만난 연변의 배달겨레

한국 대통령상 받은 조선족 기업가 김의진

새해벽두의 훈훈한 소식,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 명예회장 수상
[석화 시인이 만난 연변의 배달겨레 5]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2019년 새해의 벽두, 중국조선족사회는 위쳇을 달구는 훈훈한 소식 한편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1월 2일 아침 10시, 북경의 주중한국대사관에서 노영민(卢英敏) 대사가 “제12회 세계 한인의 날”을 기하여 유명한 조선족 기업가이며 사회활동가인 김의진(金毅振, 63세) 선생에게 한국 ‘대통령상’을 전달했다는 기별이었다.

 

노영민 대사를 비롯한 한국대사관 관계자, 재중한국단체 임원, 중국조선족사회 지성인 등 2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서 김의진선생이 받은 《대통령표창장》에는 2018년 10월 5일자로 한국 문재인 대통령이 쓴 사인과 함께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 명예회장 김의진: 귀하는 재외동포 권익신장을 통하여 국가 사회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므로 이에 표창합니다."라는 글자가 씌어있었다. 김의진선생과의 일문일답을 적는다.

 

 

 

- 중국조선족으로 유일하게 한국대통령의 “표창장”을 받았다. 축하한다.

 

“이 표창장은 중국 땅에서 분투하고 있는 전체 조선족사회에 대한 한국대통령의 칭찬으로 여러분들을 대신하여 오늘 내가 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먼저 백여 년 전 우리의 선조들이 이 땅에 와서 개척하고 정착하고 학교를 세워 자녀들에게 교육을 시켰으며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을 거치며 ‘중국의 오성 붉은기에 조선족의 피도 물들어있다.’는 말처럼 중국의 해방과 건설을 위해 이바지하였다.

 

따라서 이 상은 그분들이 받아야 마땅하다. 다음으로 개혁개방 이후 수많은 중국조선족이 중한 양국의 친선교류를 위해, 지역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우리의 문화 전승을 위해 많은 이바지를 하였다. 나는 오늘 그들을 대표하여 이 상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이 영광은 나 개인의 것이라기보다 우리 민족사회의 공동발전을 위해 애쓰는 많은 지성인들 모두의 영광이다.“

 

- 중국조선족사회의 발전을 위해 큰일을 하였다. 본인소개 부탁한다.

 

“나는 1956년 화룡에서 태어나 1978년부터 1982년까지 북경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에서 공부하고 1982년부터1990년까지 중앙민족번역국에서 맑스, 엥겔스의 《자본론》 등 경전저작 번역에 참여하였다. 1991년부터 중한관계가 개선되고 인적교류가 시작되면서 통역업무를 하다가 여행사 업무를 접촉하고 관광분야 등에서 사업실체를 운영하면서 수백 만 명 관광객의 유치 및 접대를 실행하며 중한민간교류의 가교역할 담당하였다.

 

이는 나에게 찾아온 역사적인 우연으로 여기서 나는 점차 원시축적을 이룩하고 기타 비지니스를 섭렵하는데 이르렀다. 우리 회사의 한국관광객 유치 및 접대업무는 여러 해 동안 중국에서 굴지업체로 인정받았으며 이로써 “여행업계 대부”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2012년에는 중국조선족기업인들을 모아 한국 제주도에 3억 달라 규모의 리조트 투자와 건설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 2011년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그 중 몇 가지를 이야기한다면…

 

“2000년대에 진입하여 나라안팎 정세가 변화하면서 나는 중한경제발전협회 부회장 신분으로 4회에 걸쳐 중국조선족고위급정경포럼을 발기하고 개최했다. 2010년에는 분산된 수도권 조선족사회 경제인들을 결집하여 최초로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를 만들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그 가운데 보람이 있는 일은 우리 겨레의 어린이들과 어른들을 위해 정성을 바친 것이다. 여러 해 동안 북경 우리말학교를 위한 모금과 후원을 해왔고 4회에 걸쳐 중국중학생 우리말글짓기 “아리랑왕중왕백일장”을 전액 후원해왔으며 중앙민족대학 민족교육발전기금회를 발기하고 10여 년 동안 리사장을 맡았는데 200여 만 원의 기금을 조성하여 조선족대학생 위주로 기타 민족학생들에게 장학금과 조학금을 주고 우리 조선족전통문화의 보존과 전승을 후원하였다.

 

또한 <북경조선족애심장학금>의 발기자와 후원자로 10여 년 동안 일하면서 총명하지만 경제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들을 도왔다. 그리고 수도권 조선족 로인들의 문화생활 지원을 위한 북경조선족로인협회 후원회를 발기하고 많은 활동을 지원하였다.

 

2011년 최초로 북경조선족민속축제를 조직했고 연변조선족문화진흥회, 연변청소년진흥회, 중앙민족대학 조선어학부, 연변대학, 북경한국국제학교 등 단체, 기관과 룡정 한락연기념동상 건립, 내몽골 김학철기념동상 건립, 연변조선족자치주노래비 건립 등 공익사업을 후원하였고 수도권과 지방의 우리말 방송과 우리 글 신문, 잡지, 출판 등 조선어매체를 후원하면서 수십 년 동안 많은 돈을 냈다. 우리민족 문화의 전승과 발전, 우리민족 구성원들의 자긍심과 자질 향상은 모든 이들의 숙명적 책무이기 때문이다.“

 

- 훌륭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으며 이제 하고자 하는 일은?

 

“나는 8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4형제에 어머니, 할머니까지 여섯 식솔이 살아가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비빌 언덕, 도와줄 사람이 없었기에 ‘성공하자면, 세상의 인정을 받자면 반드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습관을 새겼다. 제일 방황하기 쉬운 사춘기에는 가족을 따라 화룡 토산자의 농촌에 내려가 3년 동안 생활했다. 어쩌면 그 3년의 시간이 나의 인생시작의 계기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순박한 시골생활 덕분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안전하고 무난하게 넘겼기 때문이다.

 

현재는 나름대로의 성취와 즐거움을 느끼며 이젠 일밖에 모르던 시기를 지나 가치를 우선하는 삶, 거칠 것 없이 자유롭고 건강한 삶, 기존의 기부와는 다른 좀 더 계획적인 나눔을 즐기는 삶을 살고 싶다. 다시 말해 비지니스는 이젠 접고 민족사회 단합과 발전을 위한 후견인, ‘경로애유(敬老爱幼, 노인 공경과 어린이 사랑)’、후학지원, 부부자신을 위한 투자로 여유를 가지고 여행하고 가족과 자손들과 천륜지락(天倫之樂, 가족이 누리는 단란함) 즐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