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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의 헌신과 소록도의 마리안느와 마가렛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5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직의 안정은 생생지락으로 가는 길

 

직을 갖고 업정신을 통하여 얻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생생지락(生生之樂)이다.

 

세종 중기 이래 북방에는 여진족이 때를 가리지 않고 쳐들어와 도둑질을 일삼았다. 이러한 여진은 후에 정묘(인조 5년, 1627), 병자호란(1636)으로 큰 침공을 하게 된다. 그나마 세종이 이 때 변경을 정비해 둔 것이 오늘날의 국경이 되어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국경지대에는 주민들의 동요가 컸는데 그 원인은 국경 안쪽에 사는 사람들은 국경지대 가까이 가서 살게 하는데 있었다. 세종 25년 10월 24일의 기사를 참고해 보자.

 

함길도 도관찰사 정갑손에게 도의 인민을 5진에 입거(入居, 들어가서 머물러 삶) 시키지 않겠다고 했음에도 백성들이 동요하게 두는 것을 세종이 책망한 일이 있었다.

 

“지금 들으니, 도내의 인민들이 저희들끼리 서로 떠들어대기를, 입거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집에 남은 장정들이 떨어져 나가 살기 때문에, 사람은 적고 힘이 미약하여 농사짓기가 어렵고, 사는 집의 정원과 울타리도 가꾸고 고치지도 않아서 살기가 날로 어려워진다고 하여 참으로 놀랬다. 어느 사람에게서 이런 말이 나왔는가? 비록 타도의 백성이라도 오히려 머물러 살게 하여 함께 생생(生生)의 락을 누리게 하고자 하였다. 더욱이 함길도는 선대 임금께서 일을 시작한 땅이므로, 그 백성들의 삶을 편안히 하고 업을 즐기도록 더욱 마음을 쓰는데, 어째서 그것 백성들이 함부로 의심하고 소문을 내어 놀랍게 하는가?"

 

이러자 정갑손이 대답하기를, “원컨대 신은, 특별히 조관을 보내시어, 본도 사람들을 다시 입거시키지 않는다는 교서를 내려 이를 읽어 주면, 사람들이 이를 깨달아서 평안히 살면서 즐겁게 일할 것이며, 떨어져 옮겨 다니는 사람도 모두 마을에 돌아오게 될 것이니, 이것이 어리석은 신의 계책입니다." (《세종실록》 25/10/24)

 

곧 백성은 떠돌아다니지 않고 한 곳에 정착하여 농사짓고 안정할 생업(生業)이 있다면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고 계를 올리고 있다.

 

직은 천직으로 희생정신을 내포한다

 

백성의 직은 자기 일에 충실한 것이지만 관리나 선비의 직은 업정신으로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업정신의 한 예로 이예(李藝, 1373 ~ 1445)의 희생정신이 있다. 이예는 태종 1년(1401)부터 10년까지 3차례 일본에 통신사로 오가며 포로 500인, 이후 유구국에서 40여인(1416)을 데려오고, 세종 1년(1419)에 대마도 정벌에 참여하고, 세종 4년과 6년에 일본에서 포로 70인 등을 데리고 왔다.

 

 

세종 25년에 대마도에 사신을 보내어 포로를 데려오려 한 일이 논의되자 예조 참판 허후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예가 자원한다.”고 세종께 아뢴다.

 

이예의 헌신 : “‘신이 듣건대, 이제 대마도에 사신을 보내어 잡혀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오려고 하시는데, 신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이 섬에 출입하여 이 섬의 사람과 사정을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신이 가면 저 섬의 사람들이 기꺼이 만나볼 것이며, 누가 감히 사실을 숨기겠습니까. 다만 성상께서 신을 늙었다 하여 보내시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신이 성상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었으므로 죽고 삶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제 종사할 사람을 가려서 소신을 보내도록 명하시면 잡혀있는 사람들을 죄다 찾아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예는 전일의 공로도 작지 않는데, 이제 이 말을 들으니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드디어 예에게 의복 일곱 벌과 사모(紗帽)를 하사하였다.”《(세종실록》 25년 6월 22일)

 

이예는 세종 25년(1443년) 나이가 일흔살이어서 배를 타고 대마도를 오가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세종도 이예에 대한 공을 알고 이를 잊지 않고 있었다.

 

현대에는 이런 업정신이 없어진 걸까. 한 세미나에서 고교 교사가 학생들 교육을 위해 헌신까지는 할 수 있는데 희생까지 강요하고 있다고 교육 정책에 쓴 소리를 했다. 그런데 문제는 교사의 희생이 진정 학생을 위한 것이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학생을 위한다고 학생의 개성까지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근래에 업정신의 한 예를 보인 일이 있었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간호학교를 졸업한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소록도라는 섬에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20대 꽃다운 나이에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 한국의 소록도를 찾았다. 이들은 다미안 재단을 통해 1962년과 1966년 한국에 온 후 단 한 푼의 급여도 받지 않고, 오히려 고국 오스트리아에서 기부금과 약재를 받아 우리나라 한센인을 치료하며 43년 간 자원봉사를 했다. 2005년 11월 23일 편지를 보낸다.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할 수 없고 헤어지는 아픔을 남길까봐…….”

 

소록도에서 43년 동안 한센병 환자를 돌보던 이들은 이렇게 떠났다. 문둥병으로 더 잘 알려진 한센병은 가족이 걸리면 감염을 우려해 소록도에 격리하고, 멀리서 얼굴만 보면서 안부를 물을 정도로 누구나 기피하는 질병이다. 하지만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장갑도 끼지 않은 채 맨손으로 한센병 환자의 상처부위를 확인하고, 피고름을 짜내고, 연고를 발라주는 정성으로 그들의 곁을 지켰다. 한센인들에게 그들은 진정한 어머니였다. 그럼에도 70대 할머니가 되어서는 소록도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조용히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간다.

 

그녀들의 뒷모습에서 가슴이 멍해진다. 봉사와 희생이란 이런 것인가! 업정신의 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