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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세종, 경연을 통해 효율적 정치를 하다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8]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세종은 생각하며 정치를 한 임금이었다. 세종의 정치는 제도를 고치고 새로운 사업을 펼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자연스레 신하들의 희생도 따르게 된다. 이는 바로 업정신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세종은 때로 업정신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하들은 일이 힘들어 좀 쉬고자 청하나 세종의 대답은 ‘불윤(不允)’이다. 한 예로 황희는 75살 되는 때인 세종 13년에 전에 이어 사직서를 내지만 역시 허락받지 못한다.(세종 13/5/17) 여기에서 관리에게는 국가적으로 ㉮효보다 의(義)가 중요하고 ㉯재상의 임무는 서민보다 크고 ㉰ 대부는 효보다 충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효이지만 정승의 효는 국가에 대한 충과 그 비중이 같다. 효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이다. 이것이 군신으로 확대되면 나라 일이 바로 효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백성과 사대부의 업

 

백성과 사대부의 다른 점을 생활 속에서 살펴보면 백성은 고통스러운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사대부는 이곳을 벗어나 더 편한 조건의 임지를 찾아보고 싶어 한다. 두 신분이 추구하는 바는 같다. 그러나 백성은 자의적으로 이동할 수 없다. 관리 사대부도 조건은 마찬가지이지만 관리는 나중에 사직할 선택권이 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일정기간 나라에서 받은 토지를 경작하며 먹고 살 수 있고 또 다시 나라의 부름을 받기도 한다. 백성은 ‘이곳’에서 견디지 못하면 류민(流民, 떠돌이 백성), 유민(遊民), 난민(亂民, 곤경에 빠진 백성), 학민(虐民, 학대받는 백성)이 된다.

 

백성이 가난 혹은 과도한 노동이나 세금에 시달릴 때 사대부나 나라에 대해 절망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를 헤쳐 나가지 못하는 자신과 처지[환경]에 대한 절망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최소한 의식(衣食)이 풍족하여야 예의를 알게 되고 형벌에서 멀어질 수 있다.

 

의식衣食과 업 : (지함양군사 최덕지 등을 만나보며) 옛날에는 백성에게 예의염치(禮義廉恥)를 가르쳤으나, 지금은 의식(衣食)이 부족하니 어느 겨를에 예의(禮義)를 다스리겠느냐. 의식이 넉넉하면 백성들이 예의를 알게 되어, 형벌에서 멀어질 것이다. 그대들은 나의 지극한 마음을 본받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기르는 일에 힘쓰라.(《세종실록》7/12/10)

 

일을 함에 사대부는 자기를 닦아 사회봉사를 하는 것이 주어진 임무다. 백성은 자신의 존재를 모른다. 정신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기회를 갖는 것은 쉽지 않다. 세종은 백성의 업정신이 바로 ‘생업(生業)’ 의식을 통해 길러지도록 여러 휼민, 의료, 여성과 어린이 구제 등으로 생활 속에서 자기 생활의 건강함을 발견할 계기를 마련해주도록 애썼다. 일을 통한 업(業)정신으로 자기 삶의 확인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도록 했다. ‘자기’를 깨닫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되면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생업과 경연

 

생업이란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생업에 관한 실록의 기사는 세종조에 제일 많다. 생업에 대한 관심과 시정(時政 매일매일의 정치)의 결과다. 세종은 생업의 임금이라 할만하다. 조선실록에 나타난 ‘생업’이라는 용어 출현 횟수를 보자.

 

생업(生業) 《조선왕조실록》 원문 모두 252 건 가운데 10건 이상.

초기 : 태종 12, 세종 59, 세조 20, 성종 29

중기 : 연산군 10, 중종 26, 선조 9/1

후기 : 숙종 10, 정조 11

 

‘생업’은 《조선왕조실록》 전체 가운데 세종 대가 1/4이 된다. 사람은 일을 해야 산다. 업으로 활성화되어야 한다. 이처럼 업에 생생의 작용이 일어나면 생업(生業)이 된다. 생업은 업기술을 얻는 경험지(經驗知, 경험으로 얻는 지식) 외에 업을 통하여 삶에 대한 각성과 스스로 새로워지는 자신(自新)을 얻는 상태를 말한다.

 

사대부의 업 가운데 하나는 학업으로 관리들이 궁중 내 경연(經筵) 참가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세종은 재임 중 1,898회의 경연을 가졌다. 월 5회인 셈으로 경연은 단순히 고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현실정치를 고전에 대비해 현실을 직시하고 현재의 상황을 명확히 바로세우는 일이다.

 

 

세종은 즉위한 뒤 약 20년 동안 꾸준히 경연에 참석했다. 초기에는 집현전을 두어 경연을 전담하는 학자 무리를 양성하고 경연관을 강화하여 경연 강의의 질을 높이고 다양화하였다. 이를 통해 강의는 아악(雅樂)의 정리, 법전의 편찬 등에 활용되기도 하여 고려말 이래로 확대되어온 민족문화를 정리하여 합리적인 기준을 마련하는 마당의 기능도 하였다.

 

그런데 세종은 경연에서 정치현안이 논의되는 것을 가능한 한 통제하였고, 경연관이 다른 관서로 전출하는 것도 억제하였다. 경연의 정치적인 기능은 문종연간에 그 선례가 마련되고 세조 초에 사육신사건과 관계되어 집현전을 없애면서 주춤하였으나 성종ㆍ중종연간에 크게 발휘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경연(慶筵)’은 세종 2,011건, 세조 38건으로 이 비교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세종은 사대부 ‘업’의 하나로 경연을 통해 실제 정치를 효율적으로 운용해 간 임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