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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세종의 마음, 친민(親民)ㆍ련민(憐憫)ㆍ성가련민(誠可憐憫)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9]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희생과 불윤

 

세종은 신하들에게 백성을 위해 헌신하라고 요구했다. 신하들이 사직하겠다는 데 대해 그 대답은 ‘허락하지 아니하다’의 ‘불윤(不允)’으로 나타난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직이 아닌 업의 정신을 가지도록 요구했다. 직은 역할로 직무나 직책이다. 그러나 관직이 높은 사람들은 사직을 청해도 허락하지 않았다. 아프면 이따금 나와도 된다 하고, 또 약을 주었다. 자신은 온 몸이 종합 병동이 되어 있어도 일을 한다. 누가 자신과 견줄 수 있겠는가. 정승은 헌신이 아니라 희생을 요구하는 정도였다. 세종 13년에 이조 판서 권진이 글을 올려 사직하기를 청한다.

 

불윤(不允) : “신은 나이 75살로 늙어 행동이 둔하고 정신도 맑지 못하여, 하는 일마다 실수하고 움직일 때마다 허물만 얻으므로 청의(淸議)에 부끄럽사온데, 더구나 농사철을 당하여 한재가 심하오니 실로 불초한 신이 오랫동안 관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어진 이의 등용을 막습니다. 청컨대 신의 벼슬을 거두소서.”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세종실록》 13/5/17)

 

세종 18년 북방의 군무를 맡고 있던 김종서가 상제를 마치게 해 달라는 상소를 올린다.

 

“신이 어머니가 살아 있을 적에 이미 그 효성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후에도 능히 그 상례(喪禮)를 다하지 못했으니, 그것이 자식의 직책으로서의 효도에 영구히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만약 삼년상(三年喪)의 기한을 짧게 줄이고 관직에 나아간다면, 국가에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효도로써 다스리는 정치에 누(累)가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어리석은 진심을 굽어 살피시어 유능한 사람을 뽑아 대신 보내어 주시시오.” 하니, 임금이 편지로 허락하지 않는다. “경이 친상(親喪)에 마음을 다하고자 한 것은 그 뜻이 진실로 좋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건대, 함길도는 지경이 저 오랑캐 땅에 연해 있으므로, 수비와 방어의 긴요한 것은 본디 다른 도에 견줄 바가 아니다. 이미 장사를 지낸 후에는 옛 상례에 따라서 그전 임무에 돌아가게 하는 것이 내 뜻으로 이미 결정되었으므로, 빨리 그 직책에 나아가라.” (《세종실록》 18/1/21)

 

 

직분인가 직위인가?

 

세종은 어떤 자리[직]에서 사명감이냐, 출세 위주의 편의를 선택하느냐, 하는 직(職)의 개념을 제기한다. 직이란 하늘[天]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 하늘의 뜻을 알게 되면 직은 천직으로 되살아나게[생생(生生)] 된다. 천직이란 직의 기능을 개념화한 것이다. ‘맡은 바 해야 할’ 본연의 일이다. 그 맨 앞에 임금이 있고 재상은 임금을 보좌해 그 으뜸[하늘]을 돕는다. 임금과 재상 모두 천직을 잘 맡아 나가야 한다.

 

이예(李藝, 고려 공민왕 22, 1373~ 세종 27, 1445)는 왜를 상대한 전문 외교관으로 일했다. 세종 25년에 일본에 잡혀 있는 조선 동포를 데려와야 하는데 스스로 자원한 때 나이가 71살이다. 조선시대에는 뒷방으로 물러 앉아 있어야 할 나인 것이다. 세종에게 아뢴다. “다만 성상께서 신을 늙었다 하여 보내시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신이 성상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었으므로 죽고 삶은 염려하지 않습니다.”(《세종실록》25/6/22) 하였다.

 

백성에 대한 정신

 

근대 정치에서 백성과 연관하여 ‘위민(爲民)’에서 ‘여민(與民)’ 등 여러 표어들이 등장한다. ‘위민’은 국민을 위하여 약간 시혜를 베푸는 느낌이 있다. ‘여민’은 국민과 함께 몸자세를 맞추는 느낌이 든다.

 

세종은 민연(憫然, 딱하여 안타까움)을 통한 훈민정음 28자의 창제로 ‘편어일용(便於日用)’ 곧 실용과 편한 살림을 할 수 있게 하는 ‘친민(親民)’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또 훈민정음을 통한 민연(憫然)(세종 28/9/29)의 친민정치를 폈다. 눈높이가 백성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련민(憐憫)’은 조선실록 전체 112건 가운데 세종이 52건이다. 물질적으로 백성을 돕는 ‘무휼(撫恤)’은 《조선왕조실록》 원문 모두 647건 가운데 세종이 81건이다. 무휼은 수직적으로 물질과 죄 사함으로 은혜를 베푸는 일 그대로이지만 련민은 보다 백성의 마음에 다가가는 일이다. 한 예를 보자.

 

(김종서가 경상도의 진군이 관직을 받고자 신문고를 치니, 이를 죄줄 것을 아뢰다) 좌대언 김종서(金宗瑞)가 아뢰기를, "경상도의 진군(鎭軍)이 기선군(騎船軍)의 예에 의거하여 관직을 받고자 하여 두세 번 신문고(申聞鼓)를 치니, 이것은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아닌데도 천청(天聽, 임금이 들음)을 번거롭게 하니, 이를 죄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소원을 잃었는데 또 그 죄를 입게 된다면 진실로 불쌍하다. 비록 번거로움이 되나 죄로 다스리지 말게 할 것이다. (上曰: "旣失所願, 又被其罪, 誠可憐憫, 雖爲煩瀆, 勿令治罪) (《세종실록》 14년 7월 18일)

 

‘성가련민(誠可憐憫)’(진실로 불상하다)은 《조선왕조실록》 모두 37건 가운데 세종시대에 21건이다. 세종은 백성에게 마음으로 다가가는 임금이다. 일일이 사례로 설명하지 못하고 숫자로만 이야기하기도 급급한데 백성에 대한 세종의 마음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업은 락업으로

 

업이 마지막으로 다다르는 곳은 락업이다. 함길도 도관찰사 정갑손에게 도의 인민을 5진에 입거(들어가서 삶)시키지 않겠다고 했음에도 백성들이 동요하게 두는 것을 책망하는 유서(諭書, 관찰사ㆍ절도사ㆍ방어사 등이 부임할 때 임금이 내리던 명령서)에 나온다.

 

안거락업 : 신은 원컨대, 특별히 조관을 보내시어, 본도 인민을 다시 입거시키지 않는다는 교서를 받들고 이곳에 내려와 펴서 읽어 주면, 사람마다 모르던 것을 갑자기 깨달아서 안거낙업(安居樂業)할 것이며, 흩어져 옮겨 다니는 사람도 모두 시골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니, 이것이 어리석은 신의 망령된 계책입니다. (《세종실록》 25년 10월 24일)

 

죽은 지돈녕부사 이징에게 제사를 내릴 때 그 제문에 칭송으로 락업을 하였다고 기술하였다. 모든 사람이 살아생전 락업을 이룬다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락업은 지향점이다.

 

락업 : 여러 군대를 관장(管掌)하매 군사와 마음을 같이하였고, 병부를 나누어 군사를 다스리매 인민이 락업(樂業)을 하였도다.(세종 17년 10월 18일)

 

업은 먹고 살 것이 없어 떠도는 백성이 자기 땅에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지어 단순히 먹고 사는 일이 아니라 일을 통해 업정신을 갖고 그 업이 즐거움을 가져오는 곧 락업이 되는 정신의 문제로 여기고 있다. 여기에 세종의 삶의 철학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