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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경연ㆍ윤대ㆍ인견을 부지런히 한 임금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21 (사맛의 길)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내가 인물을 잘 모르니 의논하려고 한다.’

 

세종은 사람을 고르는데 있어서 개인의 판단에 의지하지 않으려 했다. 즉위하자 스스로 사람을 알지 못함을 고백하고 의논할 것이라고 말한다.

 

의논 : 임금이 하연(河演)에게 이르기를,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좌의정ㆍ우의정과 이조ㆍ병조의 ‘당상관과 함께 의논하여(欲與左右議政)’ 벼슬을 제수하려고 한다.’ (《세종실록》 즉위년/8/12)

 

8월 11일 즉위하였으니 다음 날의 이야기다. 이 말에 하연은 “이제 전하께서 처음으로 정치를 행하심에 있어, 대신과 함께 의논하심은 매우 마땅하옵니다.” 하였다. 그 임금에 그 신하의 응답이다. 변계량이 이미 세종의 학문은 문형[文衡, 대학자]이라고 말하고, 부왕 태종도 세종은 정치의 대체(大體, 큰 줄거리)를 안다고 인정한 터에 세종은 처음 출발을 ‘잘 모르니 의논하자.’고 한다. 아직 부왕의 신하들과 어울려 나가야 한다는 점진적 계획과 겸양을 보이고 있다.

 

정치는 집단 구성원들의 미래의 삶이 풍부해지도록 모임을 꾸려가는 일이다. 그러므로 정치를 잘 한다는 것은 우선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의견을 모으고 이를 잘 실천해 가는 일이다. 이런 사람과의 만남의 대면 정사(政事)에서 윤대(輪對, 조선 때, 매월 세 번씩 각 사-司의 낭관-郞官이 차례로 임금에게 직무에 대하여 보고하던 일)와 인견(引見,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불러 만나 봄)이 있고, 정치적 예비 작용이나 학습으로서는 경연과 서연이 있다.

 

경연(經筵)

 

 

경연은 《조선왕조실록》 총 원문 12,470건 중 세종 2,011건으로 세종은 경연을 부지런히 그리고 꾸준히 진행한 인금이다.

 

세종보다 많은 경연 기사가 있는 임금은 성종이다. (성종은 13살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이런 연유로 경연이 많아지기도 했을 것이다. 이후 1469년부터 1476년까지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가 섭정으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성종의 경연은 곧 왕의 공부인 성학(聖學)이며 동시에 왕세자급의 학습인 예학(睿學)을 포함하는 셈이다. 경연은 재임 중 모두 1,898회로 월 5회 정도로 많았다.)

 

경연에서는 국정에 필요한 주제를 감안하여 고전을 읽는다. 《대학연의》가 대표적인데 이런 경연은 바로 정치학습이었다. 이에 경연이 갖는 의미는 첫째 현실의 정치를 옛날의 고전에 빗대어 견준다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하듯 하며 자유롭게 듣고 자기 의견을 편다. 유가의 첫 과제인 학습의 주제를 역사 속에서 찾아 그 역사 주제를 현실과 치환하게 된다.

 

둘째 이야기하는 사이 각 참가자들의 의견과 성향을 알 수 있게 된다. 변화를 원하는지, 변화를 추진할 의사가 있는지 등 개인의 성품을 읽고 성향을 서로 알게 된다. 셋째 다음 날 있게 될 현안 정치에 대한 의견을 조절하고 모으는 예비 토론 과정이 된다. 마침내 이러한 기회를 통해 신하와 임금이 한 방향으로 뜻을 모을 수 있는 화기 찬 ‘학습의 마당놀이’의 모습을 보였으리라 여겨진다.

 

이런 경연은 바로 소설 속의 소설인 격자소설처럼 현실 정치 속의 허구정치가 끼어드는 듯 격자정치의 기능을 하게 된다. 경연은 극으로 치면 당대의 광대놀이[극]처럼 말을 재료로 한 마당놀이의 형식을 빌린 예비정치 토론장이었다. 정치 주제 마당놀이의 특성은 무엇일까. 이는 정치의 또 다른 형태다. 학습의 모습을 한 예비정치인 셈이다. 경연에서 오고가는 자유로운 발표는 다음날 정치에 변통되어 반영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경연의 절차를 보자. 경연은 공부라는 마치 (마당)놀이 형식을 통해 가벼운 마음으로 거리를 두고 당면한 정치 주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또 다른 의견들을 사전 조율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한다. 갈등의 큰 요소를 사전에 제거하고 토의와 정책 결정을 본론 수준에서 다룰 수 있게 논의 하여 일의 진행에 속도를 붙게 해준다.

 

정보와 지식이 부족했던 시대에 이보다 더 효율적으로 정보와 정책을 조율하는 방법은 없었을 것 같다. 지금도 중국의 7인 위원회는 정기적으로 외부 전문가를 초청해 현안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 우리나라의 내각 구성원들도 그리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각 부서별로 연구소가 있어서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지금은 정보시대여서 정보가 주위에 널려 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최고급의 기술정보나 안보에 긴요한 비밀 정보는 막혀 있을 것이다. 모두가 다 아는 정보는 이미 정보의 가치를 상당 수준 상실하고 있는 셈이다.)

 

경연에서는 수많은 문헌이 대상이 되었다. 즉위년 11월의 《송조명산사적(宋朝名臣事蹟)》을 비롯하여 초기 경연의 몇 문헌을 보면 《대학연의》(즉위년 11월), 《춘추》(즉위년 7월), 외에《논어》, 《중용》, 《맹자》, 《주역》, 《성리대전》 등이 있다. 세종 15, 16년경부터는 경연의 강독 대상이 중국의 고전만이 아니라 시사 또는 조정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토론이 잦아져서 경연은 일종의 논리적 발표와 토론[세미나] 형식이 되어 갔다. 이 경연도 21년 윤 2월까지 지속되고 그 이후는 거의 중단된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세종의 몸 건강 변화와 새 정치 이슈의 제한에서 오는 이유가 아닌가 한다.

 

서연(書筵)

 

세자의 교육을 일컫는 학습의 형태로 일찍부터 대면학습의 습관을 길러가는 일일 것이다. 서연은 보다 본질적인 정치의 정신적 방향을 잡아주는 기능을 했을 것이다.

 

윤대(輪對)

 

임금이 관리를 만나는 일에 윤대가 있다. 윤대란 문무 관원이 윤번으로 궁중에 들어가서 임금의 질문에 응대하기도 하고, 또 정사의 득실을 아뢰기도 하는 일이다. 세종 7년(1425) 6월에 처음으로 동반(東班) 4품 이상, 서반(西班) 2품 이상으로 하여금 날마다 들어와서 대답하게 하였는데, 조계(朝啓)에 참여하지 아니하던 각사(各司)는 매일 1인이 마주보고 일을 아뢰게 하였다. 사관을 물리치고 하급관리들의 윤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윤대’ 또한 《조선왕조실록》 원문 모두 2,686건 가운데 세종 1,159건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세종은 윤대를 중히 여긴 임금이라는 증거다.

 

인견(引見)

 

임금이 임지로 떠나는 수령을 만나는 일이 인견 중 대표적이다. 인견은 《조선왕조실록》 원문 전체 8,847건 가운데 세종 677건이다. 영조(52년간) 2,163건, 숙종(46년간) 1,351건으로 세종보다 많은 임금인데 오랫동안 임금 직에 있었고 당쟁의 시대인 탓이 있었을 것이다. 두 임금 다음으로 세종은 677건으로 부지런히 신화와 대화를 나눈 임금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은 경연과 정무를 나누는 윤대 그리고 임지로 떠나는 수령들을 직접 만난 인견에서 ‘백성 사랑’을 당부했다. 모두가 사람을 중요시 하는 ‘몸의 사맛[소통]’방식이다.

 

세종 시대에 정치적 논의는 바로 의제가 설정되면 토론으로 이어지고 동시에 조사가 이루어진다. 조사는 개인이나 상정소(詳定所)가 하지만 상당 부분 집현전의 몫이 되었다. 정리된 내용은 마지막으로 다시 정승들이 검증을 하게 될 것이다. 이후 각 의제는 대전(大殿) 회의에서 결정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모이고 어떻게 의견을 조율해 가는가 하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고 세종은 이를 우선 부지런히 사람의 만남으로부터 실천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