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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옛것을 기초로 새것을 만들려 했던 세종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22 (사맛의 길)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사맛’으로 먼저 옛 일을 조사한다

 

정치에서의 사맛은 주제를 가지고 사람들과 토의하는 일이 기본이다. 일반적으로 말이란 의미 있는 말과 의미 없는 말로 크게 나뉜다. 요즘 봄철이어서 철쭉이며 이팝나무며 예쁜 꽃들이 많다. 꽃을 보고 “저 꽃 참 예쁘다.”하면 이는 의미를 전달하는 게 아니고 감탄해 내는 소리고 표현이다. 감정이 말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연인끼리 있으면서 남자가 ‘저 꽃 예쁘다.“ 하면 여자가 옆에서 ’나보다 예뻐‘ 하면 그때 가벼운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런 감성을 담은 이야기 외에는 자기 마음이나 자기주장을 담는 경우가 많게 된다.

 

세종의 사맛[소통]의 규칙에서 먼저 사람을 만나는 일 다음으로는 주제에 맞추어 그에 대해 지난 시대의 사례를 찾아보는 일이 뒤따른다. 정치란 전에 없던 일을 하는 경우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옛일[古事]을 살피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게 된다. 이 조사를 곧 계고제(稽古制, 稽계 머물다, 쌓다)라 한다. 이런 자료의 수집은 다른 말로는 의고제(依古制), 고고제(考古制) 등이 있고 유사어로 고고제개지(考古制改之)가 있다.

 

계고제, 의고제 외

 

세종은 일을 해나감에 있어 명나라의 제도 이외에 중국 역대의 제도나 시책을 연구하고 우리나라의 전례를 적용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계고제(稽古制)’다.

 

▪계고제(稽古制) : 예조에서 계하기를, “옛날 법제를 상고하면, 국상 중에 형(刑)을 금하는 기한이 없으므로, 삼가 정부와 육조에 의논하였는데, 모두 말하기를, ‘무식한 백성들이 형벌을 쓰지 아니한다.’ 하고, 법을 범하는 자가 많으니, 도(徒, 정한 장소에서 중노동을 하는 형벌)ㆍ유형(流刑, 유배) 이외에는 법에 의하여 시행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4/6/18

 

계고제는 조선조 모두 93건 가운데 세종조에 64건이다. 다른 임금에 견주어 세종이 얼마나 많은 옛 문헌과 제도에 관심을 가진 것인지 알 수 있다. 기사가 많다고 많은 문헌을 이용했다고 단언할 일은 아니지만 조사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는 증거는 충분히 될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계고제와 같은 의미의 의고제(依古制)도 조선조 전체 209건 가운데 세종조 123으로 절반이 넘는 숫자다.

 

▪ 의고제(依古制) : “종친 훈신과 문무 1품 이상의 상장(喪葬, 상례)을 전담하는 도감을 상시 설치하다 원컨대 예전 제도에 의거하여, 상시로 도감을 설치하여, 이 일을 맡게 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즉위년/11/11)

 

연관어로 고고제(考古制, 《세종실록》15/9/17)도 조선 조 전체 155건 가운데 세종조에 62건이다.

 

위는 몇 예시지만 “글의 내용 속에서의 중국제도나 사적(事迹, 오랜 동안에 걸쳐 있었던 일이나 사건의 자취)의 고려는 참으로 절대적인 것이며 이 밖의 상소문에서도 ‘계고’가 사용됨을 보면 일종의 시대풍인가 한다.”(이숭녕, 세종대왕의 개성의 고찰, 《세종대왕의 학문과 사상》, 아세아문화사, 1980, 157~158쪽.)

 

세종 시대에는 여러 제도를 정착시키려고 수많은 문헌에 대한 탐구가 있었다. 세종은 조선조 계고제의 임금으로 지식의 다단계 축적적 사맛방식을 실행했다.

 

옛것을 기초로 새것을 만든다

 

이 가운데 특이한 것은 옛 것을 기초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가는 정신이다.

 

▪고고제개지(考古制改之) : 상정소(詳定所)에 전지하기를, 사헌부의 상소에, ‘4품 이상의 관원에게 고신(告身, 조정에서 벼슬을 임명하기 위해 내리는 사령서)을 서경(署經, 임금이 관원을 임명하거나 그 외 국가 중요 정책을 결정할 때, 사헌부와 사간원에게 서명으로써 동의를 구하는 일을 이르던 말)하는 법을 만약 ... 청컨대 유사(攸司)에 명하여 ‘옛날 제도를 상고하여 이를 고치소서’.[考古制改之].’ 하였으므로, 이에 집현전으로 하여금 상고하게 하니,... 그것을 옛날의 제도를 모방하고 지금의 적의한 것을 따라서 자세히 의논하여 아뢰라. (《세종실록》 14/9/18)

 

‘고고제개지’ 곧 ‘옛날 제도를 상고하여 이를 고치소서’하는 전지로 나타난 것은 실록 가운데 이것 하나다. 제도를 고치는 일은 많았겠으나 명시(明示)된 것은 이 한 건이다

 

위의 사례들은 문헌을 통해 제도를 고쳐가고 새로 만들어가는 곧 세종의 거듭 새로워지는 ‘생생의 길’이라 하겠다.

 

한 나라의 소통은 백성과 임금 사이에서 사대부[관리]들이 백성의 의견을 받아 잘 전달해 이를 정치에 반영해야 한다. 이 소통의 길이 원활한가의 여부가 좋은 정치와 연결됨은 당연하다. 세종의 사맛 정신은 인간을 대하는 도리이며 세종 정치의 기본 정신이 되었다.

 

▪고적(古籍) 상고 : 임금이 부제학 이선(李宣) 등에게 이르기를, ‘무릇 즉시 거행할 일을 사람들이 혹 잊어서 시기를 잃으므로, 저번에 집현전으로 하여금 날마다 행할 일을 초(抄)하게 하였으니, 그대들은 고적을 상고하여 빨리 초하여 아뢰라, 하였다.’ (《세종실록》 15/2/26)

 

▪고열증원考閱證援 : 증빙(證憑)과 원용(援用)을 살펴 조사하다. (《세종실록》 32/2/17) 등에서 조사의 사맛정신을 읽을 수 있다.

 

경험지식의 소중함

세종 시대의 조사와 연구는 집현전 중심으로 이루어져 갔다. 먼저 할 일은 옛 문헌과 자료의 수집과 함께 경험방이라 할 현장의 소리를 수집한다.

 

▪경험지방 : 각도에 공문을 내어 메밀을 경작하게 하되, 《농상집요(農桑輯要)》ㆍ《사시찬요(四時纂要)》 및 ‘본국의 경험방(本國經驗之方)’으로 시기에 따라 경작할 것을 권면시키라. (《세종실록》 5/6/1)

 

여기 ‘본국경험지방’이란 말은 실록 전체에서 세종시대에 단 1 건이다. ㉮ 주체[宜土, 의토]정신과 ㉯)경험이 지식이라는 믿음의 말씀이다. ‘경험지방’은 실록 전체에서 세종 이외에는 단 2건인데 선조 시에는 선조가 아프니 아침에 흰 죽을 들라는 경험방으로 곧 시중의 처방으로 하겠다는 내용이고(《선조실록》 6/1/21), 정조시에는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정조가 교정을 가하고 범례(凡例)를 붙여 《수민묘전(壽民竗詮)》 9권을 만들어 낸 다음 내의원이 여러 처방들을 채집한 경험방(經驗方)을 그 사이에 첨부해서 세상에 유행시킬 수 있는 책을 따로 편집하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정조실록》23/12/11)

 

세종이 강조하는 점은 인간에게 주어진 본능으로서의 ‘생지(生知)/생이지지(生而知之, 타고 나며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한 믿음이다. 논리적인 지식이 아니어도 근원적으로 인간은 슬기로움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다. 생지(生知)는 살며 경험을 통해 몸으로 아는 지식들이다,

 

세종은 이러한 경험 지식을 나이든 농부나 각 지역의 경험적 의료 처방 등을 수집하여 이를 종합하여 지식화 하려 했다. 이것은 경험지식으로 경험방이라고 부른다.

 

 

백성과의 사맛을 위한 제도 활성화

 

또한 조사 중에는 선현이나 선왕이 한 일을 참고로 살펴 이어가는 일도 중요하다. “성신(聖神)하신 전하께서 왕업을 계승하매, 선왕의 뜻을 이어 닦아 옛 국경을 회복하고 영토를 견고하게 하여서, 처음 나라의 터전을 삼았던 땅을 소중하게 여기시다.”(聖神繼作, 紹述先志, 復舊境固封域, 以重肇基之地)에서 보듯 소술선지(紹述先志)로 과거의 성과를 이어 받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세종실록》 15/12/21)

 

원활한 소통을 위해 개별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여러 방안들이 시도되었다. 개별적으로는 신문고, 격쟁 등이 있으나 활성화되지는 못했다. 백성이 자기 의견을 관에 올리는 일이 금지된 것은 아니나 역시 활발하지는 못했다. 이보다는 세종이 기회 있을 때마다 의견을 내라는 기록은 많다. 이런 의견 구하기는 높고 낮은 관리는 물론 노인이나 현장에서 일하는 경험이 많은 백성들에게서 구하려 했다. 이는 현장의 경험지식이다.

 

집현전은 스스로 조사하고, 연구하며, 모으고, 편찬을 한다. 이런 문헌과 연구들은 경연에서 의제가 된다. 그리고 경연장[홍문관]이나 사정전에서 수시로 대신들과 대화와 토론을 하게 된다. 이런 토론의 결과는 대전에서 다시 논의하고 의결을 거치게 된다. 모든 결정의 핵심은 의제를 만들어 내는 기관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와 임금의 열정이라 할 것이다.

 

각 기구에 곁가지가 있다. 집현전에는 수많은 문헌들과 집현전 주위의 음악, 천문 등의 전문가들 그리고 사정전 곁에는 홍문관의 경연, 근정전 앞에는 조정(朝廷) 마당이 있어 유기적 역할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