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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첫 여론조사, 그리고 공법 채택과 측우기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25 (사맛의 길)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세종의 사맛 정신은 사람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옛 문헌과 자료를 조사하고 다음으로 토론과 현장조사로 이어진다.

 

토론

토론은 먼저 경연관이 강론한 후에 경연청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있다.

 

▪종일 토론 : 경연에 나아가니 동지경연 탁신이 아뢰기를, 근래에 경연관(經筵官)이 번(番)을 나누어 나아와서 강(講)하는데, 모두 다른 사무를 맡은 관계로 많은 글의 깊은 뜻을 강론할 여가가 없어서, 나아와서 강할 즈음에 상세히 다하지 못하게 되오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합하여 한 번으로 하여, 나아와서 강한 후에는 경연청(經筵廳)에 물러가서 종일토록 토론하도록 하소서.”하니, 임금이 그 말을 좇고, 또 점심밥을 주도록 명하였다.(《세종실록》 즉위년/12/17)

 

시간에 쫓겨 토론이 부실하니 종일 토론하게 해 달라 하자 이를 들은 세종은 점심을 제공하라고 배려한다. 이런 토의 주제 중 중요한 것이 바로 먹고 사는 일에 관련한 조세에 관한 정책이다. 토론의 대상이 되는 문제는 찬반과 득실이 따르기 마련이다. 당연히 공법(貢法)에 관해 신하들도 의견이 분분했다.

 

조선의 토지 제도는 조선 건국 1년 전 과전법에서 출발하여 다시 공법의 개정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관인층에게 땅을 나누어주고 세금을 걷는 수조권(收租權)을 주었다. 수확기에 밭에 나가 작황조사를 하는 것을 답험법이라고 하고 풍흉 등급을 매기는 것을 답험손실법이라 했다. 이 과전법의 전세 수취방법의 문제점을 개혁하려는 것이 바로 세종 18년의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 설치였다.

 

공법(貢法)

공법도입에는 찬반이 따랐다. 황희는 “공론이 새 제도 도입을 반대한다.”고 주장하면 신개 등은 다수 백성의 찬성 여론을 들어 “공론이 지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공론의 이름으로 자기주장을 합리화 시키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세종은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변 합리적으로 세제를 개혁할까 고민해야할 과제를 안게 된다.

 

세종은 세제개혁을 앞두고 단계적인 방법을 썼다. 재위 9년 3월 16일에 세제 개혁방안을 과거시험으로 출제한다.

 

“일찍이 듣건대 다스림을 이루는 요체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그 시초란 오직 백성에게 취하는 전제(田制, 논밭에 관한 제도)와 공부(貢賦, 공물과 새금)만큼 중한 것이 없는데, 해마다 관리를 뽑아서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손실(損實)을 실지로 조사하여 정확하게 맞도록 했다. 간혹 파견된 사람이 나의 뜻에 부합되지 않고,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지 않아 사람들은 한갓 고을만 시끄럽게 할 뿐이므로 감사에게 위임하는 것만 같지 못하였다.’라고 하지마는, 또 감사는 사무가 번잡하여 손실을 실지로 조사하는 일도 구차스럽게 올리고 내림이 자기 손에 달리게 되면, 백성이 그 해를 입을 것이니, 이 폐단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공법(貢法, 조세제도)과 조법(助法, 절차법)에서 이를 구해야 될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여러 도의 토지 등급을 가리는데 경상ㆍ전라ㆍ충청 3도는 상등, 경기ㆍ강원ㆍ황해 3도는 중등, 함경ㆍ평안 2도는 하등으로 분류하게 된다. 그리고 그 동안 시행해 왔던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품등(상전ㆍ중전ㆍ하전)을 이상 각 도의 분류에 적용하게 해서 모두 9개의 분류 기준을 만드는 것이다.

 

현장 여론조사

이렇듯 조정의 논의는 분분하였고 17년간 긴 토론에서 의견 대립이 있었다. 1427년 세종 9년부터 시작하여 1444년 세종 26년에 전분연분법(田分年分法,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을 이라는 최종의 공법이 채택되기까지 논란과 여론 조사가 따르게 되었다.

 

이에 전 관청과 여염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공법 찬반의견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호조의 보고로는 공법 시행을 찬성하는 벼슬아치와 백성이 9만 8657명, 반대가 7만 4149명이었다. 이른 바 세계 첫 국민 여론조사가 되는 셈이었다. 이는 ㉮민본 정신에 따른 위민정치라는 것 ㉯백성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는 역사적으로 처음 실시된 일로 이런 방법은 18세기가 되서야 다시 시도되는 일이었다.

 

측우기

이런 일련의 토론 - 조사의 시책은 다른 한편 측우기 발명과도 연관이 있게 된다. 우리는 세종이 과학발명의 하나로 측우기를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먼저 세제의 합리적인 실시를 위한 전제 조건으로 지역별 강우량의 조사가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강수량이 풍년이나 흉년의 기본 조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 24년 호조에서 아뢰기를, “서울에서는 쇠를 주조하여 기구를 만들어 명칭을 측우기라 하니, 길이가 1척 5촌(1척=33.33cm, 1촌=3.3cm)이고 직경이 7촌입니다. 자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서운관(書雲觀, 천문ㆍ역일(曆日)ㆍ측후(測候) 등을 맡아보던 관청)에 대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 위에 두고 늘 비가 온 후에는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 오고 갠 일시와 물 깊이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즉시 기록해 둘 것이며, 외방(外方)에서는 쇠로써 주조한 측우기(測雨器)와 주척(周尺) 매 1건 각도에 보내어, 각 고을로 하여금 측우기의 체제에 따라 자기(磁器)든지 혹은 와기(瓦器)든지 적당한 데에 따라 구워 만들고, 객사의 뜰 가운데에 대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 위에 두도록 하며, 비가 내린 상황을 살펴보고는 비 오고 갠 일시와 물 깊이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물어 기록해 두어서, 후일의 참고에 전거로 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24/5/8)

 

공법이 채택되기 2년 전 이처럼 먼저 측우기가 만들어지는 게 먼저 처리해야할 요긴한 일이었다. 이런 측우기는 후대 조선에서도 이어지는데 영조 때 세종 측우기에 대한 기록이 있다. “세종조의 옛 제도를 모방하여 측우기를 만들어 창덕궁과 경희궁에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팔도와 양도(兩都)에도 모두 만들어 설치하여 빗물을 살피도록 하고, 측우기의 척촌(尺寸)이 얼마인가를 알리도록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이는 곧 옛날에 바람 불고 비 오는 것을 살피라고 명하신 성의를 본뜬 것이니,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듣건대, 《세종실록》에 측우기는 돌받침을 만들어 두라고 하였다. 금 번 두 궁궐과 두 서운관에 모두 돌받침을 만들되 그 위에 둥그런 구멍을 만들어 측우기를 앉히는데, 구멍의 깊이는 1촌이니, 경신년의 신제척(新製尺, 새로 만든 놋쇠자)을 사용하라 하였다. 대체로 경신년의 신제척은 경신년에 삼척부(三陟府)에 있는 세종조 때의 포백척(바느질자)을 취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참고해서 자[尺]의 규식을 새로이 만든 것이다.”(《영조실록》46/5/1, 1770)

 

세종의 공법 개혁과 측우기의 신제는 세종에게 어떤 의미일까. 합리적인 세제를 위해 제도를 새로 제정하고 이에 따라 사물을 새로 만드는 변혁과 창제의 거듭살이 변역(變易) 정신의 한 모습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