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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돈키호테와 다람살라 방문기

옷을 입히고 염색한 강아지, 행복할까?

사람은 농사를 짓게 되면서 온갖 병이 생겼다
한국의 돈키호테와 다람살라 방문기 (21)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아주 오랫동안 인간은 인간만이 자아를 의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해왔다. 다른 생물체와는 달리 인간만이 자아를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부심을 느꼈다. 특히 유일신이 무에서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는 서양 사람들이 세계사를 주도하면서 그런 생각이 보편적인 것처럼 여겨졌다. 기독교를 믿는 서양 사람들은 인간은 자연 속에서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고, 다른 동물 또는 식물과 급이 다르다고 믿었다. 인간은 다른 동식물에게는 없는 영혼을 가진 특별한 존재로서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구의 다른 곳에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힌두교에서는 사람이나 원숭이나 소나, 개미나 그저 똑같은 우주의 한 그물코라고 생각했다. 불교에서는 인간은 물론 다른 중생(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들도 깨닫기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람이나 원숭이나 소나, 개미나 똑같이 불성을 가진 중생으로 간주하므로 인간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늑대나 들소, 곰도 모두 자체의 언어와 관습, 그리고 법칙을 가진 다른 부족으로 대접했다. 우리나라 전통 사상에서도 사람은 다른 동식물처럼 자연의 일부일 뿐, 우주 만물을 만든 조화옹(造化翁)이 사람을 특별한 존재로 만든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동물에게도 자아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이 1970년 미국의 심리학자 고든 갤럽이 침팬지 4마리를 대상으로 실시한 거울 실험이었다. 이 실험은 사회적 반응, 조사 행동, 자기 탐색, 표시 테스트 등 네 단계를 거친다.

 

지금까지의 실험에서 개, 침팬지, 오랑우탄, 코끼리, 까치, 돌고래, 그리고 일부 앵무새 부류가 테스트롤 통과해서 스스로를 다른 존재와 다르게 구별할 줄 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테스트에 대한 비판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수의 과학자는 일부 동물에게는 자아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편에 서게 되었다. 쉽게 말해서 자아 개념이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 살아온 개는 자아 개념은 물론 인간처럼 희노애락의 감정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개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일까? 개의 본성에 맞게 사는 것이 개의 행복이 아닐까? 개는 개처럼 사는 것이 행복일 것이다.

 

강아지를 별스럽게 귀여워하는 사람을 보면 강아지를 학대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간다. 강아지에게 사람처럼 옷을 입히고 머리를 염색하고 샴푸로 머리 감아주고 발톱 깎아주고 침대에 재우고 목욕까지 시켜주는 사람이 있다는데, 이러한 행동들이 과연 강아지의 본성에 맞을까? 주인은 강아지가 행복해 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강아지에게는 엄청난 고통이며 스트레스를 주는 행동이 아닐까?

 

장자의 변무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다고 하더라도 늘여주면 우환이 되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다고 하더라도 자르면 아픔이 된다. 그러므로 본래 긴 것은 잘라서는 안 되며 본래 짧은 것은 늘여서도 안 된다. 학은 다리가 길다고 그것을 여분으로 여기지 않고 오리는 다리가 짧다고 그것을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것이 자연이며 도의 세계이다.”

 

식물을 예로 들어보자. 소나무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소나무가 사람처럼 자아 개념이 있는 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소나무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에 나타나기 이전에 오랫동안 살아온 방식대로 소나무의 본성에 맞게 성장하는 것이 행복일 것이다.

 

우리 집 앞마당에 작은 소나무가 한 그루 자란다. 나는 이 소나무를 멋있게 보이게 하려고 가지를 몇 개 잘랐고, 크게 자라지 못하도록 제일 위에 있는 순을 잘랐다. 분재 소나무처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자. 우리 집 소나무는 행복할까? 뒷산에 있는 소나무는 사람이 손을 대지 않은 상태로 자란다. 어느 소나무가 행복할까?

 

<사피엔스> 제2부의 제목은 농업 혁명이다. 채집수렵인이 한 곳에 정착하여 벼나 밀같은 작물을 경작하여 수확량이 크게 늘어나게 된 것이 농업 혁명이다. 그런데 제2부를 읽어 보니 농경인은 채집수렵인에 비해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왜 그렇게 과격한 표현을 했을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식량 문제다. 농업 혁명이 일어나 식량은 늘어나고 인구는 증가했지만 방자한 엘리트(권력자)가 나타나 잉여 식량을 빼앗아 가게 되었다. 농부의 삶은 수렵채집인의 삶보다 불안정했다. 수렵채집인은 수십 종의 먹거리에 의지해 생존했기 때문에 설령 저장해 둔 식량이 없더라도 어려운 시절을 몇 해라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나 농부는 특정 작물(주로 쌀이나 밀)을 길러서 주식으로 삼았기 때문에 가뭄이 들거나 또는 해충이나 곰팡이가 창궐하여 한 해 농사를 망치면 수천수만 명이 굶어죽었다. 다양한 종류의 먹거리에 의존하는 채집수렵인들은 농부보다 기아의 위험이 훨씬 적었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채집수렵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지만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둘째는 질병 문제다. 고대인의 뼈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농사를 짓게 되면서 디스크 탈출증, 관절염, 탈장 등 수많은 병이 생겨났다. 호모 사피엔스는 아주 오랫동안, 거의 600만년 동안 채집 수렵하는 생활을 하며 살아왔다. 인간의 유전자에는 채집 수렵 시기의 행동 양식이 새겨져 있다. 인간의 본성은 채집 수렵하는 행동에 맞게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

 

인간이 숲에서 나와 농사를 지은 것은 불과 1만 년 전이다. 인간이 농경을 한 기간은 채집 수렵 기간의 1/600 에 불과하다. 아주 짧은 기간이다. 아직 인간의 유전자는 농경생활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농부는 많아진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하여 힘들게 일하다 보니 채집수렵 시기에는 없었던 병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본성에 맞게 사는 채집수렵인들은 농부보다 질병의 위험이 훨씬 적었다.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농업혁명으로 사람들은 더 열악한 환경에서 살게 되었다. 곧 농업 혁명이 일어나서 농부는 채집수렵인보다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산업 혁명 이후 현대인은 채집수렵인에 비해 더 행복할까? 본성에 맞게 사는 것이 행복인데, 인간의 유전자에는 아직도 채집수렵 시대의 행동 양식이 새겨져 있으며 현대인의 생활은 결코 본성에 맞는 행동이 아니다.

 

현대인은 출퇴근하면서 장시간 차에 앉아 운전을 하고 오염된 공기를 마시며 오염된 물을 먹는다. 과도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재산을 늘리기 위해, 또는 승진을 위해 과로를 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생활을 하는 현대 직장인의 만족도는 그렇게 높지 않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문명이 발달했지만 채집수렵 시기에는 없던 각종 현대병이 나타났다. 현대인의 행복 지수는 채집수렵인에 견주어 결코 높지 않을 것이다.

 

현대인의 행복에 관하여 독일의 작가 하인리히 뵐(1917~1985)은 “노동 윤리의 타락에 관한 일화”라는 제목으로 단편을 발표하였다. 글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 관광객이 유럽의 어느 항구에서 목가적인 장면을 찍기 위해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초라한 옷차림의 어부 한 사람이 바닷가 모래 위로 밀려오는 파도에 흔들거리는 배에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었다. 카메라 셔터를 찰칵 누르자 그 어부가 잠에서 깨어났다. 관광객은 그에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날씨도 좋고, 바다에는 고기도 많은데 왜 당신은 바다에 나가 고기를 더 잡아오지 않고 여기 이렇게 빈둥거리며 누워 있소?"

어부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오늘 아침에 필요한 만큼 충분히 고기를 잡았기 때문이죠."

그러자 관광객이 말했다.

"그러나 이걸 한번 상상해보시오. 만약 당신이 하루에 서너 차례 바다에 출항한다면 서너 배는 더 많은 고기를 잡아올 수 있소. 그러면 어떤 일이 생길지 알고 있소?"

어부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1년 쯤 지나면 당신은 통통배 한 척을 살 수 있게 될 겁니다. 2년만 고생하면 통통배를 하나 더 살 수 있게 되겠지요. 그리고 3년이 지나면 작은 선박 한 두 척을 살 수 있게 될 테고,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시오. 언젠가는 당신 소유의 냉동 공장이나 훈제 가공공장을 지을 수 있게 될 테고, 그리고 당신이 잡은 고기를 대도시까지 싣고 갈 트럭을 여러 대 살 수 있게 되겠지요. 그러고 나면 ...“

어부가 물었다.

"그러고 나면?"

 

관광객은 의기양양하게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조용히 멋진 바닷가에 앉아서 햇볕을 받으며 졸면서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게 될 겁니다!"

그러자 어부가 관광객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게 바로 당신이 여기 오기 전까지 내가 하고 있었던 거잖소! 나는 당신의 카메라 셔터 소리에 그만 잠을 깨었소."

 

이 말을 듣고 나름대로 똑똑한 여행자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까지 자신이 일하는 이유가 언젠가는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마음속에는 초라한 옷차림의 어부에 대한 동정심은 남아 있지 않다. 오직 약간의 질투만이 남았을 뿐이다.

 

작가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이 일화에 나오는 ‘초라한 옷차림의 어부’는 인도 사람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