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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사람 그리고 정보의 오고감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사맛의 길)’ 함께 걷기 30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세종의 사맛 정신에 대해 살펴보고 있는데 여기서 사맛 곧 소통의 기본에 대해 살펴보자. 유통을 포함한 소통의 근본은 바로 물자, 사람 그리고 정보의 오고감에 있다.

 

사맛의 원형은 ‘ᄉᆞᄆᆞᆺ’

 

사맛은 원형이 ‘ᄉᆞᄆᆞᆺ’이다. 훈민정음 서문에는 ‘서르 ᄉᆞᄆᆞᆺ디 아니ᄒᆞᆯ’로 되어 있다. 문법적으로는 ‘사무치다’, ‘사맟’이 옳다. 그러나 여기서는 옛 표현의 맛을 살리기 위해 ‘사맛’[소통, 커뮤니케이션]으로 쓰고자 한다.

 

인간이 개체에서 벗어나 사회화를 이루려면 사맛이 필요한데 사맛을 위한 수단이 있어야 한다. 먼저 물자의 사맛으로서 교통이나 유통 그리고 교류라는 이동 수단이 필요하다. 교통에는 육상, 강, 바다, 하늘에 길이 있다. 다음은 사람의 교류다. 사신 등이 오간다. 마지막에 정보의 사맛[교환]을 위해 언어, 문자, 그리고 사상이 오간다. 봉수도 군사정보 유통의 하나다.

 

두 대상 간 물자와 정보를 주고받는 교통의 수단[사맛]에는 물(物)ㆍ인(人) ㆍ신(信)이 있고 마지막은 문자의 교환이다. 문자가 있어야 ‘사상’을 교환 할 수 있다.

 

물(物)

통상

교통

인(人)

통행

교류

신(信)[정보]

통신

교류

 

물자의 유통

 

교통에서 먼저 물자가 오간다. 물자는 길, 수로, 시장, 화폐를 통해 교환된다. 사람은 이사나 결혼, 임지발령 또는 장사꾼을 통해 오간다. 정보는 서신이나 교육, 또는 종교나 오락 그리고 음악과 마을놀이 등을 통해 교류된다. 정보교류에서 문자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배나 말을 타고 파발이 오가더라도 서류나 물건이 오가는 것이라 하고 사람이 오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사맛의 범위를 넓히려면 문자의 중요성이 절실했을 것이다.

 

길 - 육지 : 도로, 역참, 봉수

- 바다 : 바다, 섬 정책

물류 - 유통 : 길과 운반도구인 수레와 배, 물품의 이동

- 화폐 : 저화, 동전, 재화의 이동

사상 - 경험 : 경험방 : 축적과 이전이 어렵다.

- 문자 : 이두, 훈민정음 : 축적과 이전이 가능하다.

 

조선 초에는 왜국의 침입이 잦아 태종 3년(1403)년에 무릉도(울릉도 옛 이름)의 주민을 육지에 나오도록 하명하는 것부터 시작한다.(《태종실록》3/8/11) 태종은 13년(1413)에 ‘사사로이 바다로 나가 이익을 도모하는 자를 금하라’는 명을 내렸다. (《태종실록》13/7/28) 세종 또한 ‘국경 근처에서 무역을 하거나 바다로 나가는 자에 대하여 장 1백대의 벌로 다스리도록 하였다.(《세종실록》 8/4/19)

 

다른 의견으로는 《대명률》의 ‘위금하해(違禁下海)’에 대하여 바닷가 백성들이 바다에 나가는 것 자체를 금지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앞뒤 문맥으로 보면 바다를 통한 사사로운 나라밖 통상을 엄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조선의 일종의 해금 정책은 1876년 부산항을 개항하는 ‘조일수호조규(약)’을 체결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세종은 무릉도에 사는 사람의 수, 바람과 파도의 시기별 흐름, 장비와 배의 수를 조사하게 하고(세종 19/2/8), 살 수 없는 섬에 사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 구제하고자 했다. (《세종실록》 27/8/17)

 

이 점에 대해 아직 논의가 있지만 백성들이 국역(나라에서 벌이는 토목ㆍ건축 따위의 공사)을 회피하여 섬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현실론으로, 백성들이 본업인 농업을 피하여 어염(魚鹽, 고기잡이나 소금 만드는 일) 또는 목축 등에 빠지는 것을 막아 나라의 대계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목적이 있기도 하다.

 

그밖에도 적변(賊變)이 일어날 경우 위험에 빠질 섬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서, 또한 거친 섬에 들어가 사는 백성을 구하기 위한 휼민 정신에 근거한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그러나 이는 국내 해상에서 밀거래 행위를 금지한 것이다. 한임선, 신명호 , 「조선후기 해양경계와 해금」, 《동북아 문화연구》 21, 2009, 15쪽.) 더불어 백성들과 거래하는 매매에서도 시중 가격을 고려하라고 말했다.

 

ㆍ시가(時價) 넉넉히 : 경차관은 그 어염에서 나오는 물건을 공정한 수령을 골라 맡겨서 백성에게 나누어 팔게 하되, 그 값은 곡식이나 옷감을 불구하고 시가에 비해 넉넉하게 주며, 뱃길이 통하는 곳은 운반하여 전매(轉賣)하되 거둔 곡식은 의창(고려 때, 곡식을 저장했다가 흉년이나 비상 때 가난한 백성에게 대여하던 기관)에 돌리고 옷감은 나라용으로 들이면, 흉년의 준비와 나라 비용을 거의 넉넉하게 할 것이고, 작은 이익을 따르는 자도 그칠 것입니다.(《세종실록》19/5/1)

 

섬의 활용: 사람과 물자 유통

 

또한 섬은 병선(전쟁에 쓰는 배)을 만드는 소나무의 재배지로 거론했다. 세종 30년에 의정부는 소나무가 잘 되는 가까운 바다의 여러 섬과 곶(바다 쪽으로 좁고 길게 뻗어 있는 육지의 끝 부분)의 목록을 보고하면서 소나무가 있는 섬과 곶에서 나무하는 것을 엄금하고 나무가 없는 곳에는 관원을 보내 심게 하고 인근의 만호로 하여금 감독 관리하도록 했다. 이때 보고된 섬의 수는 전국에 걸쳐 120개에 달한다. (《세종실록》30/8/27) 또한 섬은 목장의 적지로 거론되어 세종 ~성종 간 전국의 섬에 목장을 설치하였다.(김경옥, 《조선후기 도서연구》, 혜안, 2004, 67~73 쪽.)

 

세종은 섬을 어염과 소나무와 말을 생산하는 중요 공간으로 탈바꿈 시켰다. 조선은 섬을 국역의 기피공간으로 여겨 섬 주민들을 데려오는 정책을 썼으나 세종은 이를 나라에 쓰이는 문물의 생산처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섬에 살면서 생활을 영위하게까지는 하지 않았으나 이는 그 시대에서는 여러 섬에 사는 사람들의 관리가 행정과 배와 관리의 문제 등으로 힘이 미칠 수 없었을 것이고 대신 사람을 데려오고 대신 어염, 말목장, 소나무 재배 등 사람과 물자를 동시에 살리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어염을 국영화 하는 방안을 취하기도 했다.

 

 

ㆍ목장 : (사복시 제조가 평안도에 목장을 세워 사신이 내왕할 때 필요한 말을 기르자고 건의하다) "평안도는 지경이 중국에 잇닿아 있으므로 사신이 내왕할 때에 타고 싣는 말을 민가에서 내게 하니, 그 폐단이 한이 없습니다. 청컨대 본도(本道)의 신이도(身伊島)ㆍ직도(稷島)ㆍ화도(和島) 등지에 물과 풀을 자세히 살펴서 만약 목장을 할 만하다면 옷감과 쌀로써 그 도의 자원하는 사람에게 피마를 바꾸어서 본시(本寺)의 상마와 함께 섞어 방목하게 하여 번식시킨 뒤에, 3, 4세 되는 건장한 말은 나라용으로 쓰게 하고, 그 다음의 것은 각 참(站)에 나누어 주어 군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를 살 수 있게 한다면 쇄마(刷馬, 지방에 배치한 관용 말)하는 폐단을 거의 면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9/9/2)

 

또 하나 바다와 섬의 물자 관리에는 소금업이 있다. 단적으로 세종이 소금업을 국영으로 하여 백성들이 자유롭게 일할 기회를 줄였느냐에 대하여는 다음 기록이 있다.

 

ㆍ소금사업:(공조 참판 권맹손이 염법을 급히 시행할 것을 아뢰니 윤허하지 않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경 등의 계책이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금년만은 흉년이 너무 심하니, 만일 갑자기 소금쟁이집을 찾아 단속하면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대개 법을 만드는 것이 점차로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마땅히 먼저 한 곳에 시험하여야 하거늘, 하물며, 이 일은 그 편하고 편하지 않은 것을 시험하자는 것이지 갑자기 만세의 영구한 계책을 만들려는 것은 아니며, 만일 시험하여 백성에게 폐단이 있다면 내가 마땅히 행하지 않겠다. ‘나는 본래 백성과 이익을 다툴 마음은 없다.’ (《세종실록》27/9/8) 予本無與民爭利之心。

 

 

역사적으로 바다와 섬에 대한 정책은 고려 이후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다가 다시 해외의 진지로 논의되고 이루어지는 것은 임진왜란 이후 70여년이 지난 숙종 연간에 이르러서이다.

 

《세종실록》 속 사맛의 기본인 ‘유통’을 보면 유통은 유형과 무형의 상호교류를 말한다. 유형의 것으로는 ‘법보’(4/1/16), (대장경판본) ‘유통’(7/4/12), ‘재화’(29/9/23) 등이 있고, 무형의 것으로는 ‘기불법유통氣不得流通’[病](《세종실록》7/윤7/25), ‘문자(文字)’(《세종실록》28/9/29), ‘교법유통敎法流通’(《세종실록》 30/6/21, 32/2/16) 등이 있다.

 

세종의 사맛 중 교통에 대한 생생[새 길]의 정신은 섬의 활용과 뱃길 확보로 나타났다. 재미있는 사실은 교통에서 사람이 물자를 싣고 간다면 이를 물자가 오간다고 하지 사람이 오간다고 하지는 않는다. 현재 남북이 막혀 있는 상태에서도 유엔기구에서 인도적인 사업으로 물자를 전해주려고 방북을 해도 물자가 주인이지 사람이 주인이 아니다.

물자 다음으로는 사람의 교류가 이루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