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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세종의 사민정책(斯民政策)과 공험진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行道] 함께 걷기 31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세종의 사맛[소통] 길에는 앞의 교통에 이어 사람의 교류가 이어진다. 사람의 길에는 가) 중국 유학으로 오가는 사람들 나) 사신들의 오고 감 다) 주민들의 국경집단 이동 등이 대표적 사례다.

 

유학, 사람 교류

 

즉위 뒤 3년인 1421년 세종은 천문과 역법에 관해 토론회를 열고 상의원에 근무하던 장영실을 천문관 관리였던 윤사웅, 부평부사 최천구와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한다. 윤사웅과 최천구는 양반이었고 장영실은 노비였다.

 

‘중국의 물시계와 황실 천문기구의 모두 눈에 익혀와 모방하여 만들라’고 주문하자 그들은 중국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첫 물시계인 ‘경점기’(경점기는 밤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을 관리하기 위해 밤 시간을 5개의 경 그리고 다시 경을 5개의 점을 나누었고, 청동 항아리를 쌓아 만든 물시계의 일종이다.)를 만들고 더 발전시켜 자동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게 된다.

 

이듬해 세종은 '양각혼의성상도감(兩閣渾儀成象都監)'이라는 천문연구소를 설치하고 이들에게 업무를 맡겼다. 명나라와 아랍 이론을 바탕으로 이들이 제작한 기계가 바로 물시계요 해시계를 위시한 천문 관측 기구들이다.(연려실기술 별집 15권 첨성-瞻星 참고)

 

사신

 

사신은 조선과 중국에서 사안에 따라 또한 계절에 따라 서로 빈번하게 오갔다.

 

재생지은 : 사신의 왕래가 빈번하여 어루만져 편안히 하여 주는 뜻을 보이매, 야인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포로로 잡아간 백성을 돌려보냈습니다. 이 재생(再生)의 지극한 은혜는 참으로 전대(前代)에 드문 일입니다. (《세종실록》 16/10/27)

 

 

사신 만나는 일을 중시한 세종은 경서와 사서 등 학문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한어 배우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어 학습 : 심지어는 본국 역대의 사대문적(事大文籍)에서, 한어의 역서를 배우기도 했다. 그 까닭은 “명나라의 사신과 서로 접할 때에, 미리 그 말을 알면 그 대답할 말을 혹 빨리 생각하여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세종실록》5/12/23)

세종이 학구열이 높았고 임금 업에 충실하였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세종 25년에 대마도에 사신을 보내어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는 일이 논의되자 예조 참판 허후(許詡)가 아뢰기를,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예가 자원하며 “다만 성상께서 신을 늙었다 하여 보내시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신이 성상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었으므로 죽고 삶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제 소신을 보내도록 명하시면 포로가 된 사람들을 찾아서 돌아오겠습니다. ”라고 전한다.

 

세종 25년(1443년) 이예(李藝, 1373 ~ 1445)는 나이가 일흔살로 배를 타고 대마도를 오가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예는 태종1년(1401)부터 10년까지 3차례 통시사로 오가며 유구국에서 포로 40여 명(1416), 세종 4년과 6년에 일본에서 포로 70명 등을 데리고 왔다.

 

사민(斯民) 정책

 

정치학에서 국가란 영토, 주민, 주권으로 성립한다. 국토는 국가 구성의 중요한 요소지만 조선에서는 국토 개념도 사람에게 종속될 수 있었다. 북방 지역에 여진들이 많이 들어와 살면 여진의 땅이 될 수가 있다. 국경이 바다를 두고 경계를 가지지 않는 한 주민이 영토보다 우선할 수 있었다. 세종은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국토의 개념이 경제력, 언어, 종교, 문화, 사이버 영토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세종 시대에는 영토의 확보와 이에 따른 주민의 이주 등이 초점이었고 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소극적이 아닌 적극적 방어를 하였다. 파저강 전투 1, 2차는 전쟁이 아닌 적극적 방어책이었다. 이전에 태종으로부터 군사에 대한 학습을 받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북방의 4군 6진 개척은 국방이 우선이지만 동시에 임금의 직무로서 조종으로부터 물려받은 업인 셈이다. 이는 전에 우리영토였던 지역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영토회복 : 황희ㆍ맹사성ㆍ권진ㆍ하경복(河敬復) 등을 불러 의논하기를, (가운데 줄임) 내가 드디어 정벌을 명령하여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특히 행운일 뿐이고 숭상할 만한 것은 못된다. (가운데 줄임) 나는 그곳[알목하]의 허술[虛]한 기회를 타서 영북진(寧北鎭)을 알목하에 옮기고, 경원부(慶源府)를 소다로(蘇多老)에 옮겨서 옛 영토를 회복하여서 조종(祖宗)의 뜻을 잇고자 하는데 어떤가. 《세종실록》 15/11/19)

 

한치의 땅 : (경원성을 옮겨 쌓는 일을 살피게 하고자 황희를 파견하다) 영의정 황희를 불러서 말하기를 ‘토지의 정한 영토는 조종에게서 받은 것이니 비록 한 자 한 치라도 줄일 수 없는 것이다. 마땅히 굳게 지키고 옮기지 말아야 한다.’고 하다. (《세종실록》 14/3/6)

 

먼저 국경에 대한 윤곽을 잡으려 했다. 윤관의 북방영토 개척의 의의와 명태조가 공험진 이남은 조선 땅이라고 하였음을 상기시키고 있다.[참고 : 공험진(公嶮鎭). 예종 3년(1108)에 성을 쌓아 진을 설치하고 방어사를 두었다. 6년(1111)에 산성을 쌓았다.[공주(孔州, 혹은 광주-匡州)라고도 한다. 선춘령의 동남쪽, 백두산의 동북쪽 있는 지역이라고 하며 소하강(蘇下江) 가에 있는 지역이라 한다.], 《국역 고려사: 지》 2011, 경인문화사)

 

* 공험진 : 공험진은 고려 예종 때 윤관(尹瓘) 등이 동북여진을 축출하고 개척한 지역에 쌓은 9성 가운데 하나이다. 이후 방어사(防禦使)를 설치하고 병민(兵民) 523 명을 남쪽으로부터 옮겨살게 하였다. 그러나 여진과의 강화에 따라 9성 지역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는데, 공험진은 그 뒤에도 축성 사실이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공험진에는 내방어소가 있어 내방어소는 경원도호부(慶源都護府) 자리에, 외방어소는 두만강 북쪽 700리의 공험진에 두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의 관청에서 펴낸 문서와 지도ㆍ지리지 등은 공험진의 소재를 두만강 북쪽 700리에 항상 선춘령(先春嶺)과 함께 있는 것으로 기록하였다. (《세종실록》 155권 /지리지 /함길도)

 

영토 회복 후 개간이 이루어진다. 농사를 짓지 않으면 식량 공급이 안 되기 때문이다. 4군 6진으로 나타나는 영토 지지키기는 이어 사람을 옮기는 사민정책, 여진족 받아들이는 화민정책, 여진세력 회유하기, 땅 개간하기, 성 쌓기, 훈련, 장수의 임명 등으로 확충된다. 안정된 속에서 농사의 업을 통한 생생지락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한 조치들이다.

 

친민 정책과 적극적 방어를 통한 일련의 적극적 주권 지키기가 세종 병조(兵曹)의 모습이다.

 

㉮ 영토 확정 : 국토ㆍ주민ㆍ주권의 확립을 통한 나라 살리기

㉯ 개간 : 땅과 경제 되살리기

㉰ 주민 이동 : 주민 신분의 상승 이동

㉱ 주권 : 이민자를 받아들여 생생지락를 얻게 한다.

 

지역이 확보되면 사람이 살아야 한다. 사람을 이주시키는 것이 바로 사민정착이다. 세종은 “옛날부터 제왕(帝王)들은 국토를 개척하여 나라의 근본으로 삼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음은, 역사책을 상고하여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했다.(《세종실록》15/11/21)

 

이주(移住) : 내가 선인들의 뜻을 이어 이루어서, 다시 경원부(慶源府)를 소다로(蘇多老)로 되돌려 옮기고, 영북진(寧北鎭)을 알목하(斡木河)로 옮긴 뒤에, 이주할 백성들을 모아서 잘 살도록 하게 한다.(《세종실록》 15/11/21)

 

“삼가 조종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의 형세가 험한 국토를 지키고, 변방 백성들의 교대로 수비하는 노고를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자 할 뿐이니, 큰 일을 좋아하고 공 세우기를 즐겨하여 국경을 열어 넓히려는 것과는 다르다.”(세종 15/11/21)고 말한다. 이러한 노력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이제 백성을 옮겨 살게 해야 한다. 바로 사민(斯民) 정책이다.

 

사민(斯民) : 임금이 “들어가 살게 할 백성은 하삼도(下三道)의 향리ㆍ역졸ㆍ공노비ㆍ사노비를 물론하고 만약 자진하여 살려는 자가 있으면, 노역을 면제하여 주어서 들어가 살게 하며, 혹은 토관직(土官職, 토착인에게 주었던 관직)을 주어 군대의 수에 충당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세종실록》 15/11/19)

 

사민(斯民) : 축년 겨울에 경원부(慶源府)를 소다로(蘇多老)로 옮기고, 영북진(寧北鎭)을 아목하(阿木河)로 옮겨서 남도의 백성 2천 2백 호나 이사시켜 채웠고, 또 강원ㆍ충청ㆍ경상ㆍ전라도의 사람을 모집해 보태어 장차 부역과 과세를 가볍게 하고, 그 생활을 후하게 하여 군사를 훈련해 길러서 변경을 굳게 하려고 하였더니, (《세종실록》 19/5/20)

 

황희 등이 “함길도의 함흥 이북의 인민들을 먼저 뽑아 들어가 살게 하고, 부족하면 부근의 다른 도의 인민을 뽑아서 들어가 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맹사성은 아뢰기를, “만약 장수로서의 지략이 있는 자가 있어서 거기를 지킨다면 어찌 패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지금 시기가 이처럼 더할 수 없는 좋은 기회니 바로 국토를 넓힐 때입니다’.” (《세종실록》15/11/19)고 했다. 나라의 가을 바로 열매를 맺을 때인 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어 이틀 뒤 다시 사민정책을 확인한다.

 

더욱이 큰 눈으로 가축이 많이 죽었으며, 또 이듬해에는 역질(疫疾)이 크게 일어나서 죽은 자가 심히 많았으니, 새로 이사한 백성들이 그 곳에 살기가 불안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한다든가, 혹은 망명하는 데 이르렀고, 인하여 말을 지어내는 자가 말하기를 국경 : 새 읍은 영구히 세울 수 없으니 곧 파해야 마땅하다고 하고, 한 두 대신들까지도 말하기를, 고려 때에도 오히려 두만강을 경계로 삼지 못하였으니, 이제 마천령(磨天嶺)으로써 경계를 삼으면 또한 지킬 수 있다고 했다. (《세종실록》 19/5/20)

 

이에 세종은 “안팎이 시끄럽게 떠들어대서 서로 뜬 말에 움직이나, 나는 큰 계책을 굳게 지켜서 잡된 말에 의혹하지 아니하고, 북문의 일을 오로지 경(김종서)에게 위임하여 맡기노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세종실록》19/5/20)

 

세종의 굳센 의지가 오늘날의 국경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