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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금성신앙과 나주의 금성산 제당

[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51]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조선 초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금성 산신제를 치렀던 사당이 다섯 개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첫째, 산마루에 상실사(上室祠), 둘째, 산허리에 중실사(中室祠), 셋째, 산기슭에 하실사(下室祠), 넷째, 산기슭의 하실사 남쪽으로 국제사(國祭祠), 그리고 다섯째, 고을 읍성 안에 녜조당(禰朝堂)이다. 이 가운데 상중하실사는 산신제 사당이지만 국제사와 녜조당은 팔관회를 치렀던 사당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팔관회를 열기 위해 축조되었던 국제사와 예조당에서는 고려 왕실의 평안을 기원하고 태조 왕건을 기리는 의례를 베풀었다.

 

금성산은 4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쪽의 노적봉(露積峰), 서쪽의 오도봉(悟道峰), 남쪽의 다복봉(多福峰), 북쪽의 정녕봉(定寧峰)이 그것들이다. 상실사(上室祠)는 동쪽의 노적봉에 있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그 주위는 군사시설인 공군 방공포대가 들어서 있어서 일반인 접근이 불가능하다. 상실사로부터 아래쪽으로 있었던 중실사(中室祠)는 금성산의 또 다른 서쪽 방면의 봉우리인 낙타봉(255.1cm) 근처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군부대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데 오늘날에는 차로도 갈 수도 있게 되어있다. 이곳 주변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2~30여 년까지도 많은 굿당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실사(下室祠)는 금성산 산기슭에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자리가 현재의 금성사(錦城寺) 터로 추측되는 곳이다. 하실사를 ‘하신사’라고 말하고 있는 현재의 금성사 주지 청호 스님(1938년생)과 최선녀(1931년생) 공양주 보살은 원래 하실사 터가 현재의 금성사보다 위쪽에 있었다고 한다. 하실사 터에 제단이 있었는데 1980년대에 큰비에 내려 떠내려갔다고 한다. 현재의 금성사(錦城寺) 이름은 금성산(錦城山)에서 따 온 것이며, 두 개의 건축물 가운데 법당은 1964년 현대식으로 지었고, 그 오른쪽으로 요사채가 있다.

 

성호 스님에 따르면, 금성사는 애초 금성산 정상에 있었다가, 산허리에 옮겨졌었고, 다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뒤인 1964년에 광덕사라고 하여 새로 지었는데, 1985년 청호 스님이 주지로 오면서 금성사로 개찰하였다고 한다. 청호 스님과 금성사 공양주로 있는 최선례 보살은 이곳 금성사에는 영험한 금성산신이 계신다고 믿고 있다.

 

 

 

국제사(國際祠)는 금성산 기슭에 있었다. 국제사 터로 추정되는 자리는 금성산 자락으로서 현재 동신대학교 캠퍼스 안쪽이다. 녜조당(禰朝堂)은 한편에서는 예조당이라고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명당거리라고도 한다. 나주성(羅州城) 안쪽 서내동 60번지에 있는데, 금성관을 중심으로 하면 왼쪽이며 금성산 자락이다.

 

약 7-80여 평의 공터인데 소유자 나주시청에 용도변경을 신청하여 2019년 가을에 한옥으로 된 새 건축물이 들어섰다. 한편, 이곳 이조당을 기억하는 옛 노인들 증언에 따르면, 이곳 이조당은 한 평 남짓한 건물로 하얗고 반질반질한 돌이 신체(神體, 신령을 상징하는 신성한 물체)로 놓여 있었다 하며 사당은 무서운 곳으로 여겨 어른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의 금성대왕 신앙은 조선으로 이어졌다. 조선 왕조 건국 이듬해인 1393년(태조 2년)에 이르러 금성산을 위시한 전국의 중요 산신과 함흥과 진주 성황신을 호국백(護國伯, 나라를 지키는 으뜸가는 산신)으로 정하였다. 이는 전국 명산과 대천(大川), 성황(城隍), 해도(海島) 등에 존재하는 여러 신에게 작위를 수여한 것으로서 조선 왕조의 건국을 경축하면서 동시에 신들에게 나라의 부강이 지속하기를 바라기 위한 목적이었다.

 

작위 등급은 신들의 비중에 따라 최고 등급에 공(公)을 다음 등급에 백(伯)을 수여했다. 그리하여 지리산, 무등산, 금성산, 계룡산, 감악산, 삼각산, 백악 산신 그리고 진주와 함흥 성황신에게 호국백(護國伯)이란 작위가 수여되었다. 이로써, 조선 임금은 금성 산신제에 향과 축 그리고 폐백을 내리어 나라 제사를 거행토록 하면서 고려 의례의 전통을 이어갔다.

 

 

특히, 금성산신이 영험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재앙이 내린다 하여 해마다 봄가을 나주 지역민들은 물론 전국의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거대한 제사를 지내곤 하였다. 이러한 국행의례는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커졌다. 그러면서 해가 가고 날이 거듭해 가면서 질서 또한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나라에서 지내는 국행의례에서 좋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금성산 의례에 참여한 많은 사람이 노숙으로 염문을 일으키고 풍속을 파괴하는 일이 빈번해진 것이다.

 

좋지 못한 소문들이 잦고 사설로 사당을 지어 제사가 행해진다는 상소문이 조정까지 다다랐다.

 

성종 9년 10월 13일에 ‘전라도의 백성들이 요사한 말에 미혹되었는데, 만약 나주 금성산에 친히 제사하지 아니하면 그 해에 반드시 질병이 있다고 하여, 추수한 뒤에 도내의 백성들이 멀고 가까움이 없이 모두 가서 제사하였는데, 늙은이를 이끌고 어린이를 붙들며 가면서 길을 메웠습니다. 그 산에 이르러서는 남녀가 섞여서 거처하여 이로 인해서 음란하여져, 혹은 그 부녀를 잃는 자도 있었습니다. 성종 18년 6월 20일에는, ‘금성산에 나라에서 제사하는 사우 외에 사설한 신사가 대여섯이나 되며 가까운 고을의 남자와 여자가 구름처럼 모여서 유숙하는데, 혹은 그 배우자를 잃는 자도 있으니, 이는 풍속에 관계되는 바이므로 금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성종 22년 9월 13일에는, ‘문벌이 높은 집안의 부녀도 또한 처녀를 데리고 밤을 지내고 돌아갑니다. 이 때문에 혹 부부가 서로 잘못되어 추한 소리가 비등하여 풍속의 훼손됨이 이보다 심함이 없었습니다.’라는 등의 보고가 잇달았다. 이처럼, 추한 소문이 나면서 풍속을 손상한다는 상소가 끊이질 않은 것이다.

 

결국, 금성신당은 음란한 음사(淫祠)로 지적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에 따른 나쁜 폐단이 조정까지 보고되면서 산신제는 심각한 위기에 다다른 것이다. 그로 인해 금성당산신제 규모는 점차 축소될 수밖에 없었으며 내용 또한 간략해지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에 가서는 그조차도 유명무실해지게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접어 들어서는 신앙적으로 폄하되다가 해방되면서는 서양문물 유입과 새마을운동 전개로 천시 받으며 미신화되었다. 그리고 전락의 종착지는 단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