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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금성당과 금성대군의 관계

단종을 적극적으로 보위한 금성대군
[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56]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구파발 금성당에는 나주 옛 지명인 금성(錦城)에서 군호를 받은 세종대왕의 여섯째아들이자 세조의 아우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이 모셔져 있다. 구파발 시봉자였던 송은영도 금성당에는 세종대왕 아드님이 모셔져 있다고 하였다. 또한, 2000년도 필자의 구파발 금성당 조사에서 구파발 금성당에서 80년대까지 굿을 하였거나 굿 음악을 연주하였던 서울굿 만신 고 박종복(일명 숭인동 돼지엄마)를 비롯한 국가무형문화재 서울새남굿 무악 전수교육조교 고 김점석, 서울시무형문화재 남이장군사당제 무악 보유자 고 김순봉, 서울시무형문화재 밤섬도당굿 무악 보유자 고 김찬섭 등도 그렇게 증언하였다.

 

구파발 금성당과 가까이 있는 세종의 서장자 화의군(1425년-1489)의 진관동 묘를 참배하는 금성대군파종회 종친들도 오래전부터 화의군 묘를 참배하면서 금성대군이 모셔져 있다는 금성당을 방문하고 있다. 이로써 구파발 금성당에는 오래전부터 금성대군이 모셔져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노들의 금성당에도 세조의 아우 곧 금성대군이 모셔져 있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

 

한편, 구파발 금성당 뒤편에 있는 이말산(136m)에는 조선왕실에서 평생 봉직하다 숨진 수많은 궁녀와 내시 무덤이 있는데 이들 역시도 금성당과 무관치 않다. 이러한 경우는 각심절 금성당과 가까이 있는 초안산에 궁녀 내시가 묻혀 있는 것과 비슷한데, 이는 금성당이 조선왕실 궁인의 원당으로서 역할 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서울굿 악사 김점석의 친할머니였던 신당동 급살방 신씨 만신은 일제강점기 때 불사방 청송만신으로 활약하면서 각심절 금성당에서 베풀어진 초안산의 궁인 새남(지노귀새남, 죽은 사람의 혼이 극락으로 가도록 하는 굿)에 자주 불려 다녔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과거 금성당에 굿을 다녔던 서울굿 큰만신 이상순은 옛날 궁에서 상을 입으면 상궁 나인들이 금성당에서 밤새도록 굿을 하고 이튿날 새남을 했다고 증언하였다. 한양에 많은 굿당이 있었지만, 꼭 금성당을 찾아 궁인 진혼을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왕실과 금성당은 상생 관계 속에서 존속되어 진 것이다.

 

금성대군은 1426년 5월 5일[음력 3월 28일] 태어나 1457년 11월 7일[음력 10월 21일]에 죽었다. 금성대군은 타고 난 천성이 강직했으며 어릴 적부터 의리와 충성심이 강해 아버지의 총애를 받고 자랐다. 금성대군은 자신의 맏형, 문종의 장남 단종(1441-1457)이 즉위하자 곧바로 지지를 표명하였다. 단종은 어느 날 금성대군과 함께 수양대군을 사정전으로 불러 친히 물품을 하사하고 좌우에서 자신을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하지만 호시탐탐 왕권을 노리던 수양대군에 있어서는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이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안평대군은 문종이 즉위한 1450년대부터 조정 배후 실력자로 등장하여 수양대군과 권력다툼을 벌이면서 왕권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수양대군은 정권 탈취의 야심을 갖고 스스로 영의정에 오른 후, 한명회, 신숙주 등과 결탁하여 단종의 보필 대신 김종서 등을 제거하면서 안평대군도 제거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는 단종 1년인 1453년에 이르러 결국 수양대군에 의한 계유정난이 발발하였다. 이때 안평대군을 비롯한 단종을 보호하려는 왕실 세력도 모두 제거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금성대군은 수양대군의 이와 같은 행위에 절대적으로 반대하면서 단종을 더욱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나섰다. 그러자 수양대군은 모략을 세워 단종 3년인 1454년 금성대군이 반란을 꾀하였다는 이유로 왕자 신분을 박탈하고 삭령(지금의 경기도 연천)으로 귀양을 보냈다. 반대 세력을 축출한 수양대군은 드디어 1455년 조선 제7대 왕 세조대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세조 측근들은 금성대군을 향해 지은 죄에 비교해 형벌이 약하므로 변방으로 안치하여 정배할 것을 끊임없이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성대군은 경기도 광주로 옮겨졌는데,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려다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자, 다시 경상도 순흥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또다시 순흥에서 비밀리에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단종 복위를 위한 거병과 거사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세조 3년(1457) 가을 경상도 안동의 관노 이동이 몰래 엿들은 밀의 내용을 알고서 금성대군이 군소배와 결탁하여 불궤한 짓을 도모한다는 모반을 밀고하였다.

 

이로써 금성대군의 거사 계획은 수포가 되었고, 자손들은 종친록과 유부록에서 삭제당했다. 이 사건으로 관군 습격을 받은 순흥 고을은 온통 불더미에 피바다를 이루는 도륙을 당하면서 폐부(廢府) 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금성대군은 세조 3년 7월 17일 안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안동으로 옮겨진 금성대군은 줄곧 사사를 종용받곤 하였다. 그 후, 금성대군은 전라도 지역으로 옮겨졌고, 1457년(세조 3년) 10월 21일 그의 나이 32살에 사사되었다.

 

금성대군이 복권되어 그에게 제사를 지내게 된 때는 1765년(영조 41년) 2월 후부터이다. 1791년인 정조 15년 금성대군의 후손들이 등용하게 되고 국가적 추승 대상자로 여겨지게 되면서 금성대군 신격화가 본격화되었다. 금성대군이 복권되기 이전부터도 그를 신앙시 하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 의례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이때였을 것이다. 이는 금성대군이 죽은 지 334년이 지난 1791년(정조 15년)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正祖, 1777-1800)는 내각과 홍문관에 명하여 《세조실록(世祖實錄)》을 비롯한 공사 문적을 면밀히 고증하여 단종을 위해 충성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펴낸 때다.

 

이때, 세조와 맞서다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 이유를 비롯한 안평대군 이용, 화의군 이영, 한남군 이어, 영풍군 이전, 하령군 이양 등 여섯 명의 종친이 육종영에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영조 연간에는 금성대군을 비롯해 안평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의 공덕을 칭송하여 시호가 내려졌다.

 

금성대군의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그 후속 조치로 각종 추념 사업이 진행되었다. 사업의 백미는 장릉의 배식단에 배향되었고, 육종영은 국가적 추숭 대상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에 힘입어 금성대군은 민중 신앙 속에서도 본격적으로 추모 되고 그 신앙이 민간에도 널리 퍼져 오늘에 이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