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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765년 바그다드, 세계 처음 인구 100만 넘어

연고로 쓰이던 석유, 조지 비셀이 처음 시추
[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16]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아침을 간단히 먹고 오늘은 바쿠시의 외곽으로 나가 유전을 찾아 보기로 했다. 병산과 나는 순례자의 복장으로 깃발과 유인물을 들고 또 바퀴달린 여행 가방을 끌면서 호텔을 나섰다. 밤 기차표를 예약해 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호텔로 돌아오지 않고 오후에 직접 역으로 갈 계획이다. 카스피해 쪽으로 걸어가서 시내 관광버스를 탔다. 관광버스는 2층 버스였는데, 마침 견학을 가는 중학생들이 함께 탔다.

 

 

시내를 둘러본 뒤에 지하철을 타고 교외의 종점에서 내렸다. 현 위치를 구글 지도로 찾아보니 ‘카타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우리는 길 건너편에 있는 햄버거 가게를 발견하고 여행 가방을 끌면서 걸어가는데, 어떤 남자가 다가오더니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영어를 할 줄 알면 도와주겠다고 말한다. 아제리(아제르바이잔을 줄인 말) 사람은 정말로 외국인에게 매우 친절하다.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낯선 거리이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버스 노선과 버스 번호, 도착 예정 시간 등은 모두 병산이 휴대폰으로 확인한다. 나는 그저 병아리가 어미닭을 따르듯 병산을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면 된다. 참으로 편한 여행이다. 버스를 타고 한참 가다보니 창밖으로 유전이 보인다.

 

원래 석유(石油)라는 이름은 바위틈에서 흘러나온 기름이라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옛날부터 석유는 바위틈에서 흘러나오거나 지표면에 자연 분출되어 소량으로 채취되었다. 처음에는 연료로 사용되지 않았다. 간혹 약국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데 바르는 연고로 쓰였다. 심지어는 두통, 치통 및 류머티즘 등 만병통치약으로 팔렸다.

 

미국 뉴욕시 월가의 주식 전문 변호사인 조지 비셀은 휴식 차 방문한 고향의 약국에서 석유 샘플을 본 순간 직감적으로 연료로서의 가능성을 알아차렸다. 그는 ‘약국에서 의약품으로 팔리는 석유를 조명용 기름으로 쓰면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는 석유를 예일대 교수에게 보내어 성분 분석을 의뢰한 결과 ‘석유는 다양한 물질로 분류될 수 있으며, 값싼 공정으로 램프에 사용할 수 있는 양질의 기름도 얻어낼 수 있다’는 보고서를 받았다. 비셀은 투자자들을 모집하고 펜실베이니아 석유회사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그는 석유 시추 책임자로 엔지니어인 드레이크를 고용하여 소금 광산 주변부터 조사하도록 했다. 보통 석유가 솟아나는 곳은 염정 부근이었기 때문이다.

 

1년 간의 노력 끝에 1859년 펜실베이니아 주 타이터스빌에서 처음으로 시추 석유가 나왔다. 드레이크가 기계 굴착 방법으로 암반 밑 21 미터까지 뚫어 유전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드레이크는 펌프를 설치해 매일 30 배럴씩 원유를 퍼 올렸다. 비록 소량이었지만 당시 시장의 수요로 보아서는 충분한 양이었다. 석유는 배럴당 20달러로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이것이 근대 석유 산업의 시작이다.

 

 

1879년에는 러시아가 카스피해의 바쿠 유전을 개발했다. 1888년에는 러시아가 미국의 석유 생산량을 앞질렀다. 1940년대까지 바쿠 유전은 세계에서 제일 큰 유전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유전이 아직도 원유를 생산하는 바쿠 유전이다. 현재는 바쿠에서는 원유 생산량이 줄었고 러시아는 북극해 유전에서 더 많은 원유를 생산하고 있다.

 

우리는 버스 종점에서 내려 시골 마을을 둘러보았다. 아직 시골까지는 경제 개발의 혜택이 미치지 않는 것 같았다. 아파트는 낡았고, 거리는 정비되지 않았다. 통계를 찾아보니 아제르바이잔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2017년 기준 $6,813로서 세계 제85위이다. 이슬람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은 기독교 국가인 이웃나라 아르메니아와 특히 사이가 좋지 않은데, 국경 분쟁이 끊이지 않으며 1992~1994년 동안에는 전면전까지 일어나 경제에 타격이 컸다고 한다. 그래도 내가 본 아제리 사람들은 모습이 밝았고 또 기본적으로 친절함이 느껴졌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기차역으로 갔다. 기차는 밤 8시 40분에 출발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남았다. 기차역에서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한 후에 나는 안사리의 책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을 읽었다. 내용이 흥미 있어서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우마이야 왕조는 661년부터 750년까지 아랍 제국을 다스린 첫 번째 이슬람 칼리프 세습 왕조인데 모두 14명의 칼리프가 대를 이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장악했다. 그러다가 부족 간의 분쟁이 반란으로 이어져 멸망했다. 뒤를 이은 아바스 왕조는 750년에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를 폐위시키고 시작되어, 1258년 몽골족의 침략으로 멸망할 때까지 이슬람 제국을 다스렸다.

 

747년 메카의 유력 가문인 하심 가문 사람들은 아부 무슬림의 지도로 반란을 일으켜, 메소포타미아의 자브 강 전투(750)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를 무찌르고, 아부 알 아바스를 왕조의 첫 번 째 칼리프로 선언했다. 아바스 왕조에서는 508년 동안 모두 37명의 칼리프가 대를 이었다. 아바스 왕조는 수도를 다마스커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겼는데, 처음 200년 동안 이슬람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765년에 완성된 새 수도 바그다드는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인구 100만이 넘는 도시가 되었다. 아랍인 지리학자 아쿠비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바그다드에는 거리와 골목을 합쳐 6,000개의 길이 있었으며 모스크는 3만개, 목욕탕은 1만개가 있었다고 한다. (인구 100만인데 모스크 3만개는 너무 많지 않을까? 아마도 3천개의 오타가 아닐까 생각된다.) 아바스 왕조 후기에 민담을 모아 문학 작품으로 엮어낸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아름답게 묘사된, 작은 탑들과 타일로 장식한 도시가 바로 바그다드이다.

 

이슬람 세력의 중심지가 바그다드로 옮겨지면서 중앙 아시아로 영토 확장이 이루어지고 중국의 당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당시 당나라의 안서절도사로서 서역(중국의 서쪽을 가리키는 말)에 있는 둔황에 주둔한 고구려 출신 장수 고선지는 서쪽의 소그디아나 지방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슬람 군대와 당나라 군대는 텐산 산맥 서북쪽 기슭의 탈라스 강에서 충돌하였는데 이슬람 군대가 크게 이겨 중앙아시아가 이슬람에게로 넘어갔다.

 

이때에 당나라 포로로부터 종이 만드는 기술을 배워 이슬람 세계에 제지술이 전파되었다. 당나라에서는 우마이야 왕조를 ‘백의(白衣) 대식국(大食國)’으로, 아바스 왕조를 ‘흑의(黑衣) 대식국’으로 표기하였다. 참고로 백색과 흑색은 각 왕조의 상징이 된 깃발과 옷의 색깔을 의미한다. 대식은 페르시아어로 무역상을 뜻하는 Taijr의 음차라는 설과 이슬람 세력의 급속한 영토 확장을 탐욕으로 빗대어 표현한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기차는 밤 8시 40분에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역을 출발하였다. 최종 목적지는 인접 나라인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역이고, 거리는 573 km이다. 기차는 4인 1실 이층 구조였다. 트빌리시까지 12시간이 걸리는데, 국경을 넘으면서 입국심사를 한다고 한다. 마침 우리가 탄 칸에 에스토니아에서 국제법을 전공하는 아제리 대학원생이 그의 어머니와 함께 탔다.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에 다니러 왔나 보다. 영어를 잘하는 대학원생과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게 대화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틈틈이 안사리의 책을 읽고, 졸리면 이층에서 자기도 하면서 기차 안에서 1박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