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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논의 있었더라도 마지막 결정은 임금이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行道] 함께 걷기 40]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결정의 형태

 

세종은 임금으로서 의정부나 육조의 여러 제의에 대해 마지막 결정을 해야 한다.

 

조선은 고려 말의 유약한 왕권 정치를 보완하는 방안으로 정도전이 주관하여 재상 중심 정치 체제를 세우고자 했다. ‘치전(治典, 법률)은 총재(塚宰)가 관장하는 것이다. 총재란 위로는 군부를 받들고 밑으로는 백관을 통솔하며 만민을 다스리는 것으로 그 직책이 매우 큰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조선 태조 때는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가 유지되었다. 의정부란 행정부의 최고 기관으로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이 있어 합의에 따라 국가 정책을 결정하였으며, 아래에 육조(六曹)를 두어 국가 행정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이후 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6조직계제로 통치 체제가 바뀌었다. 6조직계제는 의정부서사제와 반대로 6조의 업무를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왕에게 보고한 후 집행하는 체제를 말한다.

 

“내(태종)가 일찍이 송도에 있을 때 정부를 파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겨를이 없었다. 지난겨울에 대간(臺諫)에서 작은 허물로 인하여 정부를 없앨 것을 청하였던 까닭에 윤허하지 않았었다. 내가 골똘히 생각해 보니, 모든 일이 내 한 몸에 모이면 진실로 재결(裁決)하기가 어렵겠으나, 그러나 이미 나라의 임금이 되어서 어찌 노고스러움을 피하겠느냐?" 하였다.(《태종실록》 14/4/17)

 

이후 세종은 태종 때 실시된 6조직계제를 이어받아 국정을 직접 관장했다. 그러나 왕권이 안정되자 18년(1436)에 6조직계제를 폐지하고, 의정부서사제로 의정부의 정무의결 기능을 부활시켰다. 이는 집현전에서 성장한 많은 학자가 의정부의 지나친 권력 행사를 견제할 수 있는 균형이 맞추어져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와 아울러 세종은 승정원[비서실 해당]의 기능을 강화해 실제적으로는 이를 통해 모든 정무를 통괄했다.

 

결정의 방식에는 법[規]. 경, 권도, 독단이 있다

 

의정부의 논의가 있었더라도 마지막 결정은 임금이 내려야 한다.

 

일반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기준에는 법[規]과 관행적 제도가 있다. 이는 경(經)의 범위에 속한다. 그리고 제도와 경(經)이 허락하는 범위에 따라 임금이 처리하는 결정이 있는데 이것이 권도이다. 그리고 권도(權道) 가운데 특이하게 임금이 강하게 밀어붙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독단이다. 임금은 마지막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져야 한다. 확신이 가는 일은 권도로서 독단으로 처리하게 된다.

 

권과 경이란 “법은 융통성[權]과 원칙[經] 중에서 그 어떤 한 가지만을 고집할 수 없다.(《세종실록》 25/10/12)” 권도란 “그대들은 법으로서 말했지만 나는 권도(權道)로서 행한 것이다.”로 나타난다. 《세종실록》14/12/17) 독단(獨斷)의 경우는 “ 무릇 일이 의심나는 것은 여러 사람에게 의논하지만, 의심이 없는 것은 독단으로 하는 것이다.” (《세종실록》30/7/18)에 잘 나타나 있다.

 

내가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여러 사람의 의논에 쫓지 않고, 대의(大義)를 가지고 강행하는 적이 자못 많다.”라고 고백한다. 독단으로 그 중에는 수령육기(守令六期, 수령은 한 지역에서 10개월씩 6년 근무)나 양계축성(兩界築城, 평안ㆍ함경도의 성쌓기)(《세종실록》26/윤7/23)을 비롯하여 공법(貢法), 불교, 양녕 형님에 관한 것들이 있다.

 

임금은 외로운 결정을 할 때가 있고 개인의 감정으로 통치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독단위지(獨斷爲之)

 

생각하는 사람의 마지막 실현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각하고 생각하여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일이다. 이는 신념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로도 나타날 것이다.

 

이로 보면 세종 개인으로서는 가족의 일과 국가의 일이 섞여 있고, 개인의 의지와 철학이 윤리의 기준이 될 개연성이 있게 된다. 세종은 개인의 일에 속하며 국가 안위에 관계되지 않는 범위라 판단하면 독단적 결정을 내린 몇 가지 사례가 있다.

 

‘독단위지’는 세종의 사유에서 마지막 단계이다. 세종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일이다. 그 근거를 댈 때는 ‘경과 권’ 그리고 ‘국가 안위’로 신하들에게 설명한다.

 

독단위지 :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권신(權臣)에게 제재를 받을 임금이 아니다. ‘무릇 일이 의심나는 것은 여러 사람에게 의논하지마는, 의심이 없는 것은 독단으로 하는 것이다.’(凡事之可疑者則謀於衆, 無可疑者則獨斷爲之). 너희들이 나를 권신에게 제재를 받아서 스스로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는 줄로 생각하는가.(《세종실록》 30/7/18)

 

 

신석조ㆍ이사철 등이 불당설치 불가를 아뢸 때 대응하는 방법이 흥미롭다.

 

불교 논쟁 : 그대들이 비록 번거롭게 굳이 청하지마는, 현명한 신하의 말이 반드시 무지한 인군에게는 합하지 않을 것이며, 무지한 인군의 말이 현명한 신하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세종실록》28/3/28)

 

불교를 둘러싼 일은 국가의 일인가, 개인의 일인가. 이도는 현명한 신하와 무지한 인군이라는 반어법으로 풀고 있다. 두 의미가 상충하여 원 의미를 떠나고 있다. 다분히 불교적 표현이다. 곧 국가의 공공 업무로서 백성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에서는 그 결정이 곧 국가법의 기준이 될 수 있으나 개인의 문제에 국한할 때는 나름대로 다른 해석을 보이게 된다.

 

다른 하나는 형님 양녕대군에 관한 일로 성내에 집 짓는 사안에 대해 사헌부, 사간원에서 연명으로 상소가 올라온다.

 

“신 등이 엎드려 보건대, 성상께옵서 만기(萬機, 임금이 보는 여러 가지 정무)를 재결하시는 데 있어 비록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대신에게 의논하시었으니, 매우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하물며 제(禔,양녕대군)의 일신은 태종께서 이미 군신에게 맡기신즉, 제(禔)로 하여금 집을 짓고 서울에 거처하게 하시어 완전히 그 죄를 벗게 하시는 것은 성상께서 독단(獨斷)하실 바가 아닌가 생각되옵니다. 만일 신 등의 말로써 족히 받아들일[採納] 것이 못 된다고 하시오면, 대신에게 의논하시어 모두 가(可)하다고 말한 연후에 결단하시오면 신 등이 어찌 감히 말이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세 번 굽어 생각하옵시고 대신에게 물으시어, 집을 지으라고 하신 명령을 도로 거두시어 신민들의 바람을 쾌(快)하게 하옵소서."

 

이에 대해 “이제 그 소(疏)를 돌려준 것이다.” 하고, 이어 대간에게 명하기를, “다시는 말하지 말라." 하였다. (《세종실록》22/2/6)

 

양녕의 문제는 왕권을 어지럽히는 일이나 세종은 이를 효의 연장선상에서 가정의 문제로 보고 있고, 불교의 문제는 건국이념과 상충하나 관습과 개인의 신앙(사유세계)의 문제로 보는 차이가 있다. 관점의 차이다. 그러나 개인의 문제를 떠난 정치적 결정에서 파저강 전투, 수령육기제, 공법, 훈민정음 실시 등 제도개혁과 창제에서는 경(經)과 권(權)에서 권도를 보이고 있다. 이보다 덜 충돌적인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 조선시대 하급 서리나 일반 백성이 상급 관리들에 대해 고소를 금지하던 법제) 등은 중용의 법으로 처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진 파저강 전투에서 많은 신하들이 처음에는 반대했다. 그러나 수십 차례 오랜 기간을 통한 세종의 설득으로 처음 반대하던 나이든 대신들도 마침내 찬성하며 파저강 1,2차 전투를 성공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다. 최고 통치자는 때로 외로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