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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공부를 통한 지식 쌓기와 자기 각성의 깨달음

[‘세종의 길’ 함께 걷기 65]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의 사맛 곧 커뮤니케이션에 대하여 살피고 있는데 지난 다섯 번의 연재 동안 세종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바꾸며 참사람에 이르려 하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았다. 사람이 사람다워지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상호 교류하며 참마음을 얻으려 한다.

 

세종이 마음을 강론하는 철학자냐고 묻는다면 성급히 그러하다고 대답할 수는 없으나 세종이 임금이고 수많은 신료의 뜻을 조율하고 다스려야 하는 자리에서는 바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곧 사람의 마음을 얻지 않고는 아무런 정치나 행정에 관한 일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종은 당시 주류 학문인 유학(儒學)에 근거하여 사람의 마음에 대한 여러 생각을 여러 경우에서 피력하게 된 것이다. 세종의 ‘마음’을 정리해 보자.

 

세종의 생생 오심[五心, 다섯 마음]

 

▪개심改心 마음을 고치다. 夙夜感悟(숙야감오) 改心易慮也(개심역려야) 밤과 낮으로 느끼고 깨달아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는 것이 마땅하옵거늘.(《세종실록》9/10/26)

▪용심用心 마음을 쓰다. 若用心力(약용심력) 마음과 힘을 다한다면. (《세종실록》22/7/21)

▪항심恒心 늘 한결같은 마음. 使民有恒産 有恒心之道(사민유항산 유항심지도) 항산을 갖게 하고 항심을 갖게 하는 길.(《세종실록》8/8/27)

▪진심盡心 마음을 다하다. 盡心爲之(진심위정) 마음을 다해서 하라. (《세종실록》13/5/2)

▪천심天心 하늘의 마음. 聖人之德 允合於天心(성인지덕 윤합어천심) 성인의 덕이 천심에 합의.(《세종실록》 8/8/27)

 

세종의 생생을 위한 마음 쓰기에는 전제로서 먼저 ‘개심(改心)’이 있고 이후 마지막 지향으로서 ‘천심(天心)’으로 나아가는데 그 과정에 ‘용심(用心)’으로 의지를 다지고 그 상태를 ‘항심(恒心)’으로 유지해 가며 다음 ‘진심(盡心)’으로 몸과 마음을 함께 실천에 옮겨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천심(天心)’에 근거하고 있다.

 

사유의 세계 · 마음 정리

 

세종은 유자인가 불자인가. 이 말의 전제로 임금은 개인인가 국가인가 하는 문제부터 규정되어야 한다. 유교 시대에 임금은 국가다. 그러나 세종의 경우 개인의 성향이 여러 곳에서 드러남을 보게 된다. 다만 임금의 경우 사생활이라 할지라도 임금의 직 곧 법도에 맞느냐 하는 문제가 늘 따라다닌다. 그렇다면 임금의 겉으로의 생활 이외에 사유와 사상의 범주에 속하는 사생활의 경우는 어찌해야 하는가?

 

세종에게서는 유자(儒者)와 불자의 흔적이 같이 보인다. 다만 기록으로 남는 개념은 말할 것도 없이 유가의 명제들이다. 세종은 유자이면서 동시에 불자였고 도교적으로 산천과 소격전에서 초제(醮祭, 고려 시대에 여러 신에게 지내던 제사)를 수행했고, 무교(巫敎)를 일부 묵인했다. 풍수는 학문으로 연구해 보고자 했다. 사유의 세계 속에는 불교, 도교, 무교 등이 있겠다. 그러나 철저히 현실에 바탕을 둔 사유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세종은 공부[학업]를 통해 지식을 쌓고 각성을 통해 자신(自新)을 이루어 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순순한 마음에 이르는 길로 그 종국에는 생이지지(生而之知, 태어나면서부터 지닌) 지혜의 세계에 이르는 길이다.

 

일반적으로 지식은 하나둘씩 쌓아가고 쌓인 지식은 논리를 구성하여 이론이 되어간다. 이에 반해 지혜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인간 본연의 성(性)이 이런저런 세파에 가려 있어 이를 밝고 맑게 닦아내게 된다. 이로 보면 유교는 학업을 통해 생의 길을 열며[쌓으며] 자기 변화[자신自新, 학습ㆍ체현ㆍ각성]를 가져오는 지혜 얻기이며, 불교는 수행을 통해 생의 근원을 찾아[거듭하며] 자기 발견[명상, 불성]을 찾는 과정이다.

 

다 같이 마지막에는 본성으로서의 지혜를 얻게 된다. 유교는 가려져 있던 마음속의 선한 본성을 자신(自新)을 통해 닦아내는 일이요, 불교는 수행과 명상을 통해 마음속에 숨어 있던 불성을 이루어내는 일이다. 둘 다 심학(心學)에서 저 무의식의 정신[마음]에 이르는 깨달음이라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깨달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의식이 되지 않는 제7식인 말나식의 영역과 근본식인 제8식 아뢰야식에 일부 닿아 있다고 보인다.

 

 

세종이 마음의 공부에 방점을 찍는다. 임금 앞에 나아가 글을 강론하는 이지강도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임금의 학문을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人君學問, 正心爲本]’에 귀결시킨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나 경서를 글귀로만 풀이하는 것은 학문에 도움이 없으니, 반드시 마음의 공부[心上功夫]가 있어야만 이에 유익할 것이다, 하였다.”(세종 즉위년 10/12) 마음이 공부와 수양을 통해 이루어야 할 목적지인 것이다. 결국은 마음으로 수렴되는 세종의 사상을 보면 세종은 당시의 사유(思惟)의 자유로움 속에서 자신을 한 사상의 틀에 몰아넣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대통령은 국가 행사에서 기독교ㆍ불교ㆍ천주교ㆍ원불교를 가리지 않고 참여하는 일이 있다. 그 종교 행사는 국민의 일이고 대통령은 국민의 대표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유학이나 불교나 공부의 초점은 마음으로 모인다. 생성 소멸하고 부단히 변화하는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하면 마음의 고요한 본체를 회복하는가 하는 점이 공통적인 관심사다. 이를 한 연구가는 성리학을 ‘회복의 모델’, 불교를 ‘발견의 모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말한다.

 

(참고: 정순우, 겨레의 큰 스승 세종대왕, 여주대학교 산학협력단 세종리더십연구소 세미나, 2015년 10월 9일, 37쪽 ; 홍콩 씨티대학의 아이반호(Philip J Ivanhoe)는 성리학의 마음공부란 본래적으로 있는 인간의 자연성을 정화 혹은 ‘회복’해 간다는 의미에서 이를 ‘회복의 모델(recovery model)’이라고 칭한다. 반면 불교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불성을 발견하는 것이 공부의 최종처라고 할 수 있는바 이는 일종의 '발견의 모델 discovery model'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반호의 ‘Confucian moral self’)

 

여기서 ‘마음’으로 모이는 과정을 보면 그 목적지는 같은 곳이다. 마음의 차원에서 공부를 통한 지식 쌓기와 자기 각성의 깨달음인 자신(自新)이든, 공부와 수도를 통한 명상 속의 깨달음이든 다 같이 발견하고 깨닫는 것이다. 이를 자기 ‘회복’과 ‘발견’이라는 용어로 달리 부를 수는 있으나 이는 순차적이며 동시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성리학의 경우는 생이지지(生而知之,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아 앎)를 찾는[회복하는] 본성을 찾아가는 지혜 얻기이고, 불교에서도 불성을 찾는[발견하는] 지혜 얻기이다.

 

세종은 개인이며 국가의 중심이다. 마음은 개인의 것이지만 나아가 백성의 민심으로 확장된다. 임금은 ‘백성의 소리’를 듣고 바른 정치를 펴야 한다.

 

결국 사람의 길은 마음의 길로 이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