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1 (화)

  • 맑음동두천 5.0℃
  • 맑음강릉 7.9℃
  • 맑음서울 6.7℃
  • 맑음대전 6.5℃
  • 맑음대구 9.3℃
  • 맑음울산 9.9℃
  • 맑음광주 10.2℃
  • 맑음부산 12.0℃
  • 구름많음고창 7.1℃
  • 맑음제주 9.3℃
  • 맑음강화 5.5℃
  • 맑음보은 7.3℃
  • 맑음금산 7.3℃
  • 구름조금강진군 10.0℃
  • 맑음경주시 10.4℃
  • 맑음거제 9.4℃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평양 계월향과 색향의 기녀문학

진용옥 교수의 통일생각 ④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명예교수]  묘향산 만폭동을 올랐을 때 남녘 최고의 사진작가 한 사람이 외설 춘향가를 불렀다. 각설이 타령에 리듬 맞혀 부른 가사는 신록의 묘향산을 온통 홍등으로 물들일 수준이었지만 돼지 멱따는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예로부터 춘향의 사랑이야기는 한국인에게 영원한 스테디셀러다. 왜냐하면 의열과 로맨스를 함께 갖추고 있으며 신분초월이라는 서민적 정서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조시대 평양은 색향이라는 또 다른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강계 미인으로 상징되는 남남북녀의 미색에다가 평양기녀의 자유 분망함을 은밀히 빗대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평양기녀들을 단순한 기녀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녀들은 당대의 여류 문학가요 여류 예술가들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속내가 있었으니 그것은 민중의 애환을 대변하는 해결사 들이었다. 왕조시대 벼슬아치들은 “평양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 이라는 속담처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백성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이에 맞설만한 수단이나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안이 바로 “베갯머리송사”였다. 이 말은 은밀히 밀실에서 해결한다는 것인데, 기녀들이 바로 백성의 대행자였다. 이른바 색주 해결법을 구사했던 백성의 대리자들이었다. 이 때문에 봉건왕조의 지식인들은 평양을 선망하면서도 자칫 잘못하면 수신을 그릇 쳐 패가망신에 이르는 경고의미로 색향이라 불렀음직하다. 각설하고 평양에 오면 기녀들의 설화나 미담은 얼마든지 있다. 그중 백미는 의기(義妓)계월향(桂月香 ? ~ 1592)과 명기 국색이다.

大同江上送情人 楊柳千絲不繫人(대동강상송정인 양류천사불계인)
含淚眼着含淚眼 斷腸人對斷腸人(함루안착함루안 단장인대단장인)

대동강 위에서 고운 님 이별할 제
천만 가지 실버들로도 우리 님 매어두지 못해
님과 내, 눈물 머금은 채 서로 마주 보고

애달피 울며불며 이별이로다.
 

   
▲ 월향동 위성 지도 1.1km 상공 –개선문, 김일성 경기장이 보인다.

 

   
▲ 연광전 앞에는 계월향비 가 세워져 있다. 체제와는 무관해 보였다.

임진왜란 '2대 의기(義妓)'로 꼽히는 기생 계월향(桂月香)의 시(詩)다. 임진왜란 때 계월향은 평양성이 함락하자마자 왜장 소서 행장의 별장 소서 비에게 거짓으로 몸을 허락한다. 그녀는 기녀라고 속였지만 사실 평양 탈환의 일등공신 김응서의 애첩이었다. 왜장의 환심을 산 다음 애인이었던 김응서 장군을 오빠라 사칭하여 성안으로 끌어 들인다. 베갯머리송사로 해결한 것이다. 이윽고 밤이 되자, 잠든 틈을 이용하여 소서 비의 목을 베게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위기에 몰리게 되자, 계월향이 베임을 자청하고 울면서 목을 맨다는 이야기다.

어느 모로 보나 진주의 논개와 쌍벽을 이루지만 구전 판본이 너무 많아 사실 여부에 갈피를 잡기가 어렵고 임진록에 전하는 이야기라 과장도 있겠지만 나라 사랑에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떠오른다. 하지만 애국 의열과 비련이 함께 담겨 있어 백성의 정서는 물론이고 시인 묵객들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계월향이여 그대 아리땁고,
마지막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의 침대에 잠들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다정을 슬퍼하고
그대의 무정을 사랑합니다.
대동강에 낚시질하는 사람은 그대의 노래를 듣고,
모란봉에 밤놀이하는 사람은 그대의 얼굴을 봅니다.
(중략)
그대의 붉은 한은 현란한 저녁놀이 되어서 하늘 길을 가로막고
황량한 떨어지는 날을 돌이키고자 합니다 .

                                             <계월향에게> -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전란이 끝난 뒤 평양 사람들은 모란봉 기슭에 <의열사(義烈祠)>라는 사당을 짓고 비를 세워 계월향의 애국충정을 기렸다. 또한 그가 배를 갈랐다는 고개를 '가루개', 그 일대를 '월향마을'이라 불렀다. 북에서는 1955년 ‘가루개’ 일대를 포괄하는 인흥1동 일부와 인흥3동 일부, 기림1동 일부 지역을 통합해 '월향동'으로 개칭했다. 지금 평양시 모란봉구역 월향동의 옛 기림리 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월향미용', '월향리발', '월향식료품' 등의 간판을 볼 수 있다. 이들 간판에 등장하는 '월향'은 모두 계월향(桂月香)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개선문과 김일성 운동장이 있는 평양의 중심지였다 

 

   
▲ 무궁화 홍담심계 계월향

 
특기할 것은 남녘에서 자생종 홍단심(紅丹心 붉은 꽃잎에 새빨간 꽃심)계 무궁화에다 계월향이란 이름을 붙였다. 무궁화는 남녘의 국화이고 계월향이 북녘 미인을 대표한다면 남녘 국화에다 붙이는 이름으로 어울 것 같지는 않지만 애국 단심은 이념과 신분이 문제이겠는가? 통일이 별것인가? 이런 공감대역을 넓혀 나가는 일부터 시작해야한다.

평양 명기중 하나인 국색의 일대기는 잘 알 수 없지만 여류시인으로 다음과 같은 명시를 남겼다.

대동강 가에서 임을 보내니
실실이 늘어진 버들로도 매어두지 못 하네
서로 바라보는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언덕에 서서 임가는 곳 바라보니
아스라한 난간 밑 강물만 흐르네
여기 가까이 신선 굴 있건만
하필이면 바다 건너 봉영(篷瀛) 찾을게 무어람

이별의 장면이 유경(柳京=버드나무 서울)을 연상시키면서 대동강 풍경과 잘 어울리지만 뒷맛이 더 개운하다. 아마도 신선 굴은 국색 자신을 의미하고 봉영은 세상에 실존하지 않는 봉래산과 영주봉을 뜻하는 것으로 마누라를 빗댄 표현 일 것이다. 마누라가 좋기는 하겠지만 재미를 보기가 어렵다는 우회적 표현이면서 자신은 신선굴이라는 아주 절묘한 외설적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기와 명기들이 있어 색향의 별명을 한층 격조 높은 맛내기로 작용케 한 것 같다. 근세 신파극 장한몽의 주인공 이수일과 심순애는 대동강을 주 무대로 사랑을 속삭이고 배신과 응징의 줄거리가 이 작품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일본판 번안이라고 하지만 색향이라는 무대가 한층 실감나게 만드는 작품이다. 의기 계월향이나 명기 국색, 그리고 장한몽의 사랑이야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대동강 물은 오늘도 다리 밑을 흘러만 가고 있었다. 혜은이의 노래처럼 평양 시민들의 사랑과 꿈을 싣고서.

서울에서 계월향 주제로 영화화 (정비석 원작 임권택 감독, 정윤희 주연, 제목 임진란과 계월향)되었으며. 북녘에서도 영화나 드라마로 자주 상영된다고 한다. 그래서 주연배우 리금순은 계월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1592)의 초상화가 발견됐다. “1815년 그린 것으로, 그를 기리는 사당(장향각·藏香閣)에 걸고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냈다.”고 그림에는 적혀 있다. 그림을 감정한 안휘준 문화재위원장(미술사)은 “전형적인 19세기 조선 미인도”라며 “기생을 기리는 초상화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훗날 우의정에 추증된 김경서(1564~1624) 장군의 애첩이던 계월향은,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장(副將)으로 평양성 함락(1592년) 때 ‘용장(勇將)’으로 꼽힌 고니시 히(小西飛)를 참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여인. 적장이 죽은 직후인 이듬해 1월 초, 평양성은 탈환됐다. 고미술품수집가 안병례(46)씨가 본지에 공개한 이 그림은 가로 70㎝, 세로 105㎝ 정도다. 일본 교토에서 최근 입수됐는데, 한지에 그린 채색화다.

옥비녀를 한 계월향은 “반달 같은 눈매에 이중으로 된 옅은 눈썹, 도톰하면서도 오뚝한 코 등 전형적인 조선 미인이다.”할 것이다. 더구나 머리를 크게 올려 꾸민 형식, 저고리와 치마, 저고리에 달린 향 노리개 등 당시의 복식까지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인과 미술사, 복식사를 연구하는 전공자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안 위원장은 “저고리 길이가 짧고 소매폭도 좁은 등 몸에 착 달라붙는 상의로 당대의 패션 감각을 반영한 ‘섹시한’ 느낌을 주면서도, 손을 곱게 교차한 뒤 가슴에 찬 노리개에는 ‘재계(齋戒,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라고 적어 그를 기린다는 의미를 더했다.”고 평했다. 얼굴과 옷주름에 음영을 잘 대비시키는 등 당시 조선 화단에서는 첨단 기법이던 서구의 명암법도 적극 수용해 그렸다. 계월향은 그 뒤 ‘남 논개, 북 계월향’으로 추앙받았다.

계월향을 모시는 제사는 영정 제작시기인 19세기 초만이 아니라 후대에까지 매년 이어졌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1921년 4월 26일자 기사에 “1921년 4월 22일(음력 3월 15일) 평양 의열사(義烈祠)에서 평양기성권번(平壤箕城券番) 주최로 제수를 갖추어 배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일제 강점기에 작성된 백석의 시 '계월향사당' -백석 연구가 송준씨 전기 및 시전집에서

남북 분단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남북에서 동시에 기림을 받는 이의 행적을 확대해 나가야한다. 계월향도 그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