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전남 나주시 다도면 불회사 입구에는 투박하고 길쭉한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사람 모습으로 새겨진 벅수가 서있다. 불회사는 백제시대 동진으로부터 온 마라난타(서기 384년 백제입국) 스님이 세운 절이라고 전하는 유서깊은 절인데, 산길을 돌아서 오르는 절 입구에 귀한 벅수가 세워져 있었다. 이 벅수는 경사져 오르는 길 양 옆에 서로 마주보며 서있는데,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제멋대로 흙으로 빗은 듯 투박하면서도 정다운 모습으로, 조선시대 천진불을 조각하듯 욕심없는 불모조각가가 한국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이 그대로 구현된 것이다. 불회사의 벅수는 높이 1.5m정도로 장승처럼 높고 크지도 험상굿지도 않고 정답고 아담하다. 벅수를 2기로 양 옆에 새긴 것은 벅수도 남녀로 쌍을 이루게 한 것이며, 남자는 긴 수염과 상투를 튼 모습으로 표현하였고, 여자는 부드러운 느낌의 미소가 보이도록 표현하였다. 남자 벅수의 몸에는 '하원당장군' 여자 벅수의 몸에는 주장군이라고 새겨져 있다. 절 입구의 벅수는 불교의 수호신인 사천왕이나 금강역사와는 또 다른 의미의 한국인의 토속신으로 또 다른 의미의 신성구역으로 들어가는 경계를 표현한 것으로 본다. 요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소쇄원은 조선시대 중기 이땅에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하였던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자신이 살았던 시대 전체를 성리학적 이상세계로 만드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하여 자신이 태어나 살던 한적한 시골 고향땅에 조그마한 이상세계를 실현하며 살아왔던 조선시대 한 성리학자 삶의 이상향 이었다. 소쇄원을 세웠던 양산보는 조선 중기 신진 사대부로 이름을 날렸던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신흥사림파를 대표하여 기존 세력인 훈구파와 다툼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모함으로 정읍으로 유배되고 결국 임금의 노여움을 풀지 못하고 사약을 받고 죽게됨에 따라, 조광조의 제자였던 양산보는 중상모략이 판치는 세상을 버리고 낙향하여 무등산 골짜기에 숨어살면서 맑은 계곡이 있는 이곳에 유유자적 자연인으로 살며 멋스럽게 살아온 자취를 후세에 그대로 남겨준 것이다. 소쇄원의 뜻은 '깨끗하고 시원한 정원'이란 뜻으로, 중국의 송나라시절 주자가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꿈꾸며 무이산 계곡에 무이구곡을중심으로 무이정사를 짓고 은둔생활을 하였던 것을 본받아 자신도 주자와 같은 은둔한 삶을 살면서 성리학적 이상향을 실현하며 살고자 하였다. 소쇄원은 계곡을 중심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화도 전등사는 고구려시대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남한지역 유일한 절이다. 한편 전등사가 있는 마니산은 해발고도 469m에 이르는 꽤 높은 산으로, 한민족이 세운 최초의 제국 고조선(근세 조선과 비교하기 위하여 부르는 옛 조선)을 세웠던 단군시절 단군의 3왕자가 세웠다고 전하는 삼랑산성이 있는데, 전등사는 그 삼랑산성이 품고 있다. 이런 마니산의 꼭대기에는 단군께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는 천제단인 참성단이 있다. 이처럼 역사와 유래가 깊은 전등사에서는 해마다 다양한 문화행사를 주관하고 있는데, 가을철이면 삼랑성 역사문화축제를 거행한다. 이때 다양한 예술적 행사와 먹거리 볼거리 즐길거리들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이러한 행사 가운데 전등사의 요청으로 전등사의 사계를 중심으로 1년동안 전등사와 삼랑성의 풍광을 사진으로 담아온 (사)한국불교사진협회의 사진전을 소개한다. 이번 전시는 (사)한국불교사진협회의 회원들이 사계절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전등사를 담아왔는데, 많은 사진들 가운데 엄선한 44점만을 뽑아 인화한 사진들이다. 따라서 작가들의 보는 안목과 미적 감각에 따라 다양한 모습들로 표현된 것 들이기에 한사람이 보는 것과는 다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나풀리라고 알려진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중심에 있는 여수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처음 수군 전라좌수영 겸, 삼도수군통제영에 있을 때의 최초 본영이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이 처음 만들어진 조선소다. 이순신장군은 남해안늬 부산, 거제, 통영, 남해, 여수, 완도, 진도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전투를 하였다. 그런데 정읍현감으로 봉직하다가 장군으로 승진하며 부임한 곳이 바로 여수에 있는 전라 좌수영이었고,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을 할 때에도 여수는 이순신장군이 수군통제영으로 본영을 두고 연합군(조선군+명군)으로 왜군과 마지막 전투 중 여수와 남해 사이에 있는 관음포 바다 한가운데에서 전사하였다. 이렇게 숭고한 삶을 살아온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숨결이 온전히 남아있는 여수에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영의정 이항복의 요청으로 선조35년(1601)에 당시 통제사 이시언이 사당을 세웠으며, 우부승지 김상용이 간청하여 선조가 직접 쓴 충민사(忠愍祠) 사액편액을 달았다. 그렇게 세워진 충민사는 오랜세월 후손들이 추모하며 잘 유지되어왔으나, 조선말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고 말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국왕의 으뜸 예복은 면복이다. 면복(冕服)은 머리에는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몸에는 곤룡포를 입고 손에는 규(圭)를 들고 았는 모습이다. 한국 임금들의 면복은 고려전기부터 조선말까지 임금이 제례 때 착용했던 관복으로, 면류관은 임금, 세자, 세손 등 신분에 따라 연판의 너비와 늘어뜨리는 장식의 숫자가 각각 달랐다. 곤복(곤룡포)는 상의, 하의, 중단, 폐슬, 혁대, 대대. 패옥 등으로 구성되는데, 곤복의 특징으로는 일월성신 이나, 산과 용, 꽃 등의 무늬가 있다. 또 이 때 손에 드는 규(圭)는 임금은 9촌(약 27cm) 청옥규를 들었다. 면복은 평상시에는 입지 않고 특별한 날 혼례 때와 선왕의 제사때 입었던 임금의 제복이었다. 위 사진은 경복궁 서쪽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현재 전시중인 조선시대 임금의 복식을 촬영한 사진이다. 면류관은 중국 고대 관모인 작변(爵弁)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에서도 시대별 다양하게 변화해 왔다. 한국 임금들이 썼던 면류관은 너비 8치(25cm) 길이 1.6척(약 50cm) 앞은 둥글고 뒤는 네모졌으며 곁은 현색(뚜렷이 드러나 보이는 색깔) 비단을 덮고 안은 훈색(纁色, 무지개처럼 선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백중(百衆, 百鍾, 中元日, 亡魂日)은 불교의 5대 명절 가운데 하나다. 불가의 4대명절은 석가모니부처님의 탄생(태어난 날, 음4월 8일), 출가(깨달음을 구하기 위하여 왕궁을 떠난 날, 음 2월 8일), 성도(부처님 된 날, 음 12월 8일), 열반인(이 세상을 떠나 열반에 든날, 음 2월 15일)을 말하며, 여기에 부처님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백중(우란분절)을 더하여 불교의 5대명절이 된 것이다. 백중은 억불의 시대였던 조선시대에도 온 백성이 집집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절을 찾아가 부처님께 바치기도 하고, 온 나라 마을마다 다양한 잔치를 벌였는데, 한해 내내 일만하던 노비들에게도 백중날만은 하루를 푹 쉬게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놀면서, 각자 자기 조상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온 나라가 축제를 즐기던 날이었다. 백중을 불교적으로 '우란분절(盂蘭盆節)'이라고 부르는데, 우란분은 옛 인도의 말을 음역하여 부르는 말로 불경에 따르면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분인 목련존자가 아귀도 지옥에 떨어져 온갖 고통속에 시달리는 자신의 어머니를 구하기 위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의 신통력으로 아귀지옥까지 찾아가 자신의 어머니를 구하고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복궁 서쪽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 중인 조선시대 왕비의 혼례식 때 왕비관처럼 썼던 왕비의 가채머리장식이다. 신라와 백제시대 왕릉에서 발굴된 임금과 왕비의 금관장식과 견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데, 오늘은 혼례식 때 머리에 왕비의 관처럼 썼던 왕비의 가채머리를 올려본다. 요즈음 한류가 여러 방면에서 세계에 떨치고 있는데, 한국인의 빼어난 디자인 감각으로 발전시켜 만들어낸 조선시대 왕실의 혼례식 때 쓴 왕비의 가채머리장식은 매우 독특하고 아름답다. 요즈음에도 여인들은 집안의 행사가 있으면 미장원에서 한참 머리손질을 하여 자신의 얼굴을 아름답게 보이고자 하지만, 조선시대 왕실에서도 왕비가 되는 여인을 돋보이게 하고자 오랜세월 발전시켜왔던 다양한 장신구들을 귀한 보석으로 장식하여 머리에 꽂았다. 자세히 보면 매우 복잡스럽지만 전체적으로 보아도 아름답고, 하나 하나 떼어서 살펴보아도 아름답다. 각각의 장식품에는 그 나름대로 좋은 의미(부, 귀, 수명장수)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 것 들을 모두 모아 가장 아름다운 왕비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왕비의 머리에는 다양한 모양의 비녀들이 상하좌우로 꽂혀있고, 영롱한 구슬들이 매달려 있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여수 연등동 벅수는 옛 전라좌수영성의 서문으로 통하는 지점에 서 있는 것으로, 동쪽에 있는 벅수에는 남정중(南正重), 서쪽에 있는 벅수에는 화정려(火正黎)라고 새겨져 있다. 이는 마을의 잡귀와 유행병을 막고 하늘과 땅을 평정하여 화마와 수마를 막고자 하는 뜻으로 보인다. -여수시 해설 인용 연등동벅수는 벅수 뒷편에 새겨진 글씨로 보아 정조12년(1788)에 세워진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현재는 이순신장군의 사당인 충민사 입구에 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여수 진남관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당시에는 전라좌수영의 본영인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이순신 장군의 후임으로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가 된 이시언이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진해루터에 정면15칸 측면5칸의 대규모 객사를 세우고 남쪽의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자 진남관으로 이름짓고 세운 건축물로, 한국에서는 목조로 지은 단일건물로는 가장 큰 규모다. 임진왜란 이후 진남관은 수군의 중심기지로 숙종44년(1718)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중창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어 건물의 부재들이 일반적인 한옥건물의 부재와 견주었을 때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남관의 기둥에 쓰인 목재의 굵기는 지름이 75cm이상 으로 매우 우람하며 기둥 위에 보와 도리 등의 굵기 또한 국내 다른 건물들에서 보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현재 진남관은 내부에 칸막이가 없이 기둥들만 서있어 그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한데, 진남관을 세운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루 터에 75칸의 대규모 객사를 세웠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진남관은 본래 여수에 세운 객사로 보인다. 그런데 현재처럼 내부가 완전히 개방된 건물로는 객사로 쓰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전남 보성군 문덕면에 있는 대원사는 백제 무녕왕 3년(503)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한다. 대원사 스님에 따르면 당시 아도화상은 신라의 선산군 모례네 집에 숨어 살면서 불법을 전파하고자 하였는데, 하루는 아도화상의 꿈에 봉황이 나타나 말하기를, 아도! 아도! 사람들이 오늘 밤 너를 죽이고자 올 것인데, 어찌 누워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에 눈을 떠보니 문밖에 봉황이 날개짓을 하여 아도는 봉황을 따라 광주 무등산 봉황대까지 왔는데 봉황은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봉황의 인도로 목숨을 구한 아도화상은 이후 3달 동안 봉황이 머문 곳을 찾아 호남의 산들을 헤매다가 마침내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봉황포란형 형상의 명당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도는 그 산이름을 천봉산이라 부르고 그곳에 절을 지은 뒤 대원사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미 불교가 융성하던 백제시대에 신라에서 온 스님이 지었다는 보성 대원사는 지장보살의 큰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절이다. 불교에서 지장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가장 큰 뜻을 세운 보살로, 그 원이 크고도 크다고 하여 대원본존지장보살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서원이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