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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근로자 추모 공간 “당신의 노고 기억합니다.”

파독 62돌 기념식 및 루르 기억광장 준공식 성황리 끝나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대한민국 산업화의 숨은 주역인 파독 광부ㆍ간호사ㆍ간호조무사의 헌신과 희생을 기리는 ‘파독 62돌 기념식 및 루르 기억광장 조성사업 준공식’이 지난 12월 19일 낮 2시, 서울 마포구 상암동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광장에서 엄숙하게 거행됐다. 이번 행사는 (사)한국파독광부ㆍ간호사ㆍ간호조무사(회장 김춘동)가 주최했으며, 파독 역사가 시작된 지 62년 만에 서울 도심 한복판에 처음으로 조성된 파독인 추모ㆍ기억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남겼다. 이날 준공된 ‘루르 기억광장’은 독일 루르 지역에서 광부와 간호사, 간호조무사로 살아가며 조국 근대화의 밑거름이 되었던 파독인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이름 없이 헌신했던 삶을 상징적으로 담아낸 후손들을 위한 기억의 공간이다. 이 광장은 단순한 조형물을 넘어, 국민과 미래 세대에게 파독인의 삶과 정신을 전승하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조성됐다. 기념식은 이정호 전 KBS 국장 (현, KBS사회봉사단 명예단장) 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국민의례를 시작으로 내빈 소개에 이어, 먼저 미국 미네소타주에 한국어마을 '숲속의 호수'를 건축한 집단건축 MA 유병안 대표가 뜻깊은 루르 기억광장 조성사업의 의미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려청자 장물아비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174]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905년 오늘(12월 21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초대 통감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 하얼빈역에서 독립투사 안중근이 쏜 총에 사살되었지요. 이는 대한제국 침탈의 원흉에 대한 응징이었습니다. 이토는 일본의 조선 침략 정책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었는데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고려청자 장물아비였다고 합니다. 1906년에 서울에 왔던 미야케라는 일본인이 쓴 회고기 <그때의 기억-고려고분 발굴(도굴)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당시 예술적인 감동으로 고려청자를 모으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대개는 일본으로 보내는 선물감으로 개성 인삼과 함께 사들이는 일이 많았다. 이토 히로부미 통감도 누군가에게 선물할 목적으로 매우 많은 수집을 한 사람이었는데, 한때는 그 수가 수천 점이 넘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런데 고종임금도 이토 히로부미가 고려청자를 보여주자, 이 나라엔 없는 물건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조선사람들은 고려청자를 몰랐습니다. 조선사람들은 조상의 묘에 손을 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기에 일본

신진 음악인들이 들려주는 <우리들의 클래식마스>

춘천문화재단, 클래식, 미디어, 무용, 댄스, DJ가 어우러져 2025 전문예술인 양성사업 「넥스트 뮤지션」 결과공유회를 공연으로 선보여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춘천문화재단(이사장 박종훈)은 오는 12월 22일(월) 저녁 7시, 춘천 카페코빈즈에서 2025 전문예술인 양성사업 「넥스트 뮤지션」 결과공유회 공연 〈우리들의 클래식마스〉를 연다. 「넥스트 뮤지션」은 신진 음악인을 대상으로 전문가 강연과 그룹별 지도를 운영해 기획ㆍ창작ㆍ실연ㆍ발표 전 과정을 아우르는 역량 강화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우리들의 클래식마스〉는 지난 9월부터 약 3달 동안 사업에 참여한 10명의 클래식 전공자들이 직접 기획한 연말 공연으로, 클래식을 바탕으로 미디어ㆍ무용ㆍ댄스ㆍDJ 요소를 더한 넘나들기 무대를 선보인다. 공연은 서로 다른 세 개의 프로젝트가 차례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관객은 하나의 무대에서 클래식 음악이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되는 장면을 만날 수 있다. 첫 번째 무대 〈별은 너에게로〉는 편지와 목소리, 음악을 통해 한 해 동안의 마음과 시간을 돌아본다. 두 번째 무대 〈셋, 서로 다른 울림〉에서는 세 명의 예술인이 게임 음악, 자작곡, 영화 음악, 크리스마스 노래 등 각기 다른 음악을 선보인다. 마지막 무대 〈프레임 너머의 우리〉는 음악과 무용, 댄스, 영상이 어우러져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내는

송년공연 ‘나례(儺禮)’, 역신을 물리치다

국립국악원, 을사년을 보내는 정악ㆍ궁중무용ㆍ민속악의 화려한 향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국악원(원장 직무대리 황성운)의 송년공연 ‘나례(儺禮)’가 20일 낮 3시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렸다. ‘나례’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그믐날 밤 궁중과 관아, 민간에서 묵은해의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태평한 새해를 맞이하고자 고려부터 조선까지 행해졌던 의식이다. 궁중에서 펼쳐진 ‘나례’는 궁중 예인을 비롯해 민간의 으뜸 광대들이 함께한 잔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난장(亂場)의 날에는 사관도 들어와 있었지만, 기록하지는 않았다.”라고 할 만큼 자유로운 날이었으며, ‘연화대무’, ‘학연화대처용무합설’ 말고도 민간에서 유행했던 각종 공연을 펼쳤고, 궁중 나례는 계급 간, 계층 간 벽을 허문 왕실의 새해맞이 큰잔치였다. 공연의 시작은 창덕궁 높은 언덕에 올라 나례의 시작을 알리는 국립국악원 정악단의 고취타로 시작했다. 고취타는 군영의 행군, 임금의 행차 등에 쓰였던 대취타를 재구성한 작품으로 땅의 울림을 표현한 진고(통이 긴 북으로, 나무틀 위에 놓고 치는 아악기)를 세 번 치고 연주를 시작한다. 나발, 나각 등의 관악기 연주를 시작으로 타악기가 합류하여 웅장함을 주고 힘찬 울림을 극대화했다. 이어서 창덕궁

불한시사 합작시 52. 압록ㆍ두만ㆍ송화강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압록ㆍ두만ㆍ송화강 동이족의 해맑은 혈맥처럼 (달) 백두로부터 동서로 북으로 (돌) 은하수처럼 반짝이며 흘러 (빛) 상서로운 기운 날개를 펴네 (초) ... 24.11.16. 불한시사 합작시 백두산(白頭山)은 동북아시아의 거대한 수계(水系)를 이루는 발원지로서, 이 산에서 비롯된 물길은 곧 민족의 이동과 국가의 흥망, 문명의 경계를 함께 형성해 왔다. 백두에서 갈라져 흐른 세 강은 방향을 달리하며 각기 다른 역사적 공간을 열었는데, 동쪽으로는 두만강(豆滿江/圖們江), 서쪽으로는 압록강(鴨綠江), 북쪽으로는 송화강(松花江)이 되어 광대한 만주를 적시고 아무르강(黑龍江)과 합해져 오호츠크해로 들어간다. 압록강과 송화강은 천지(天池)에서 발원하여 장대한 물줄기를 이루고, 두만강은 백두산 북쪽 기슭에서 시작해 동해로 향한다. 이 세 강은 단순한 자연 지형을 넘어 고조선ㆍ부여ㆍ고구려ㆍ발해로 이어지는 북방 고대국가들의 생활권과 방어선, 교역로의 축을 형성했다. 특히 황해로 흐르는 압록강은 대륙과 한반도를 잇는 고구려의 관문이었고, 두만강은 발해와 여진 세계가 만나는 동북 변경의 숨결을 간직한 강이다. 송화강은 북방 초원과 삼림의 문명을 연결하

일부일처 제도는 결함이 있는 제도?

이뭐꼬의 장편소설 <꿈속에서 미녀와> 45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종교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아도 일부일처 제도가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기독교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회교국가에서는 남자가 재력이 있으면 4명의 아내를 거느릴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기독교의 모태가 된 유대교 경전에는 부인을 버리지 말라는 계율이 나온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영화로웠던 시절의 왕인 솔로몬은 후궁이 700명, 첩이 300명이었다고 한다. 유태교에서 임금에게 적용되는 계율과 일반 백성에게 적용되는 계율은 사뭇 달랐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성경인 마태복음 5장 28절에 보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는 무시무시한 구절이 나온다.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는 남녀관계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예수가 미혼이어서 부부 생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불교가 지배했던 고려시대에 남녀관계는 매우 평등하고 개방적이었다. 이혼과 재혼도 비교적 자유로웠다고 알려져 있다. 유교가 지배했던 조선시대에 남자에게는 첩을 인정하였으나 여자에게는 정절을 요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과부의 재혼을 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