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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왜곡한 ‘장승’과 ‘벅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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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맨 첫 돌‘벅수’

이빨을 드러낸 험상궂은 얼굴이지만 웃음 띤 표정 [일제가 왜곡한 ‘장승’과 ‘벅수’ 이야기 21]

[우리문화신문=황준구 민속문화지킴이] 우리 조상들이 맨 처음으로 '돌'을 사용하여 만든 수호신(守護神)의 모습은 선사시대(先史時代)의 것으로 추정되는, 강원도 양구군 남면 '가오자기'마을(佳伍作里) 어귀의 '광치고개'(廣峙嶺)에서 길목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선돌멩이'(立石, menhir)로 짐작이 된다. '가오자기'의 '선돌멩이'는 '38선'을 지키기 위한 탱크저지선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기원전 1,000여년 무렵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지배자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고인돌'(dolmen)들과 함께 1969년에 발견이 되어 처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선사시대 '원시신앙(原始信仰)‘의 수호신상으로 제작된 '선돌멩이'(立石)는 250cm의 높이와 155cm의 너비, 80cm의 두께로 육중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눈썹이 치켜 올려져 있는 모습이 마치 절집의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연상하게 한다. 눈, 코, 입은 오목새김으로 되어있고, 입술은 사악함을 쫓기 위하여 이빨을 드러낸 험상궂은 듯한 얼굴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웃음 띤 표정을 하고 있다.​ 본디 '선돌멩이'의 앞가슴에는 짐승과 물고기를 연상시키는 여러 가지 동물들의 모양이 흐릿하

두창신을 표현한 ‘곰보벅수’

전염병이 돌면 마을 들머리에 '벅수'(서낭)를 세워 [일제가 왜곡한 ‘장승’과 ‘벅수’ 이야기 20]

[우리문화신문=황준구 민속문화지킴이]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박석(薄色)거리', 옛 부터 우리 조상들은 돌림병의 하나인 '두창(痘瘡, 천연두)을 좋지 않은 귀신 때문에 생겨난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은 '두창신'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두창'이라는 '유행병'(돌림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어려운 금기사항을 꼭 지켜야만 하였다. 마을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면 금기사항으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피하며, 제사도 지내지 말고, 남의 집 잔치에도 참석하지 않으며, 남녀 간의 성적인 관계를 맺지 말고, 서로를 접촉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러한 금기를 어기면 살아남기 어려우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목욕을 자주 하고, 정성을 드려 두창신에게 기도를 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 우리 조상들은, 두창신을 ‘호귀마마(胡鬼媽媽)’ 또는 '손님'으로 떠받들었으며, 마을의 들머리에 정성을 들여 두창벅수를 만들어 세우고, 이들 '손님'(두창)들이 우리 마을에는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는 '벅수'를 세워서 두창을 차단하기 위한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왕실에서도 돌림병으로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을 달래주기 위하여 '여제(

'에밀 놀데‘의 그림에 '선교사'로 표현된 '벅수’

나약한 민족의 토속문화를 망령된 신앙으로 취급 [일제가 왜곡한 ‘장승’과 ‘벅수’ 이야기 19]

[우리문화신문=황준구 민속문화지킴이] 독일을 대표하는 표현주의 미술가- '에밀 놀데(Emil Nolde, 1867-1956)는 강렬한 색채와 거친 형상을 표현하는 미술가로 유명하였다. 그때의 사람들은 그의 종교적인 그림을 보고 “너무나 원시적이어서 사악한 악마가 그린 그림일 것이다.”라고 평가를 하였다. 그는 독일의 ‘베를린 민족학 박물관’에서 전시중인 조선시대 때(1890년) 인천 성현마을의 당산(堂山, 서낭당)에서 남몰래 뽑아서 가져간 것으로 알려진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의 벅수, '天下第一大將軍'에게서 강력하고 세찬 느낌을 받고, "선교사(The Missionary)"라는 그림을 발표하여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에밀 놀데'는 조선의 벅수에서 강렬한 형태의 무속적인 느낌과 에너지를 받아 아프리카의 탈과 조선 벅수의 표정을 서로 견주어 상징적으로 배치를 하고, 그림을 그렸다. ​ 어린아이를 등에 업은 아프리카의 여인은 벅수 같은 모습의 탈을 쓴 무섭고 오만한 태도의 선교사앞에 무릎을 꿇고 손에 들고 있는 무엇인가를 권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나약한 민족의 토속문화를 망령된 신앙으로 취급을 하여 말살시키고, 침략적

대전 민속자료 제1호 ‘돌벅수’는 조작되었다

70여 년 전 한 석수장이가 만든 것으로 짐작되는 대전 돌벅수들 [일제가 왜곡한 ‘장승’과 ‘벅수’ 이야기 18]

[우리문화신문=황준구 민속문화지킴이] 대전광역시 대덕구 법동 범천골의 수호신 '天下(이승)大將軍'과 '地下(저승)大將軍'은 1989년 ‘대전광역시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본디 나무벅수였으나 300여 년 전에 대전에서 큰 부자였던 송민노가 지금의 돌벅수를 세웠고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에 세워진 '석장승'이다,”라고 문화재청에 의하여 기록되었다. 꾸며서 만든 이야기며, 터무니없는 조작이다. 다시 검토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수호신으로 알려진 벅수의 역사를 살펴보면 지금으로 부터 300여 년 전에 만들어 진 것으로, 1,700년 무렵의 벅수에서는 '天下大將軍'과 '地下大將軍'이라는 글씨를 가진 벅수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이란 글씨는 1876년을 앞뒤로 하여 개화기 때부터 우리땅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천골의 벅수는 300 여년 된 벅수라고 인정할 수가 없다. 2003년 범천골 벅수를 조사하고 촬영하는 현장에서 만나 뵌 90대로 추정되는 한 할머니의 이야기로는 “이웃 마을의 국민학교(초등학교)에서 교감선생이었던 남편이 6.25전쟁 때 범천골벅수의 '天下大將軍'과 '地下大將軍'이라는 글씨를

왜 '지하'는 '여장군'이라고 할까?

'女將軍'이라는 표현, ‘남존여비’ 사상으로 개화기 때부터 나타나 [일제가 왜곡한 ‘장승’과 ‘벅수’ 이야기 17]

[우리문화신문=황준구 민속문화지킴이] 우리가 흔히 '장승'으로 알고 있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은 '장승'이 아니고 '벅수'라고 불러야 옳은 표현이다. ​ 《태백일사》의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記’에는 “하늘 아래의 다섯 방향 곧 동서남북과 가운데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사람을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금 살고 있는 세상 곧 이승의 대장군)이라 하고, 지하의 다섯 방향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사람을 '지하여장군(地下大將軍, 죽은 사람의 '혼-넋‘이 가서 사는 저승의 대장군)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520년 일십당 ‘이맥(李陌)이 목숨을 걸고 쓴 상고시대의 역사책 《태백일사(太白逸史)》 ‘개국신화’의 내용에는 “‘벅수(法首)’는 ‘선인(仙人)’을 뜻하며, 선인 ’왕검(단군왕검)‘이 곧 ‘선인법수(仙人法首)다.”라고 기록되었다. 곧 ‘벅수’란 ‘단군할아버지’를 표현한 것이다. 1500년 무렵의 조선왕실에서는 중국을 자극할 수 있는 상고시대의 모든 역사책을 압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때문에 《태백일사》는 빛을 보지 못하고, 350여 년 동안 깊숙하게 숨겨 왔었다. 그러다가 이맥의 후손 해학 이기(李沂)는 1876

'벅수'는 악마인가, 우상인가?

‘벅수’는 미신이 아니라 우리 겨레의 민속문화다 [일제가 왜곡한 ‘장승’과 ‘벅수’ 이야기 16]

[우리문화신문=황준구 민속문화지킴이] 1700년 무렵의 조선 땅에는, 중국에서 세차게 밀려들어오는 전염병들 가운데서도 특히 ‘두창’(痘瘡, 천연두)을 막아내기 위하여 온 나라가 비상사태였다. 우리 조상들은 마을 들머리에 ‘두창벅수’를 세우기 시작하였고, 무서운 ‘두창신’을 ‘호귀마마(胡鬼媽媽)’ 또는 귀중한 손님(客)으로 떠받들기 까지 하였으며, 마을의 경계선을 뜻하는 벅수가 세워져 있는 ‘당산(堂山, 서낭당)을 넘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내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왕실에서도 돌림병으로 죽은 백성들의 억울한 원혼들을 달래주기 위하여 해마다 ‘여제’(厲祭)라는 제사까지 지냈었다.​ 두창과 잡귀들을 막아내기 위하여 세운 벅수들의 모습과 글씨(銘文)는 주로 무섭게 생긴 중국의 왕이나 장수들의 표정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조각을 하였고, 조선 땅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특별히 임명하였으며, 벅수의 가슴에는 ‘周將軍,唐將軍(주장군,당장군)’ 또는 ‘南正重, 火正黎’ ‘鎭西大將軍, 防禦大將軍’등으로 표현된 ‘이름표’(銘文)를 새겼다. 중국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제왕(帝王)이나 장수들을 이용하여 “중국 땅에서 생산된 돌림병과 잡스러운 귀신들을 막아 내겠다.”

만주에 돌하르방 꼭 닮은 ‘석인상’이 있는 까닭은?

'벅수'와 '돌하르방'문화, 만주ㆍ몽골에도 전파돼 [일제가 왜곡한 ‘장승’과 ‘벅수’ 이야기 15]

[우리문화신문=황준구 민속문화지킴이] 제주도의 '돌하르방'과 완벽하게 닮은 요(遼)나라(907-1125)의 '석인상'이 중국 만주 땅에서 발견되어 “제주도 '옹중석(翁仲石)‘의 본바탕(根本)과 관련된 흥미로운 여러 가지의 서로 다른 주장들이 나타나고 있다.”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우리가 교과서로 배운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왜곡하여 만든 자료에는 “1754년(영조 30년) 제주목사 김몽규(金夢煃)가 '옹중석'을 처음으로 만들어 세웠다.”라고 기록을 하고 있다. ​ 하지만, 그 보다 100여년이나 앞서서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이 펴낸 《탐라지(眈羅志, 1653년, 효종 4년)》의 내용에는 “'옹중석'은 제주읍성의 동서남쪽 3문(門) 밖에 이미 세워져 있었다.”라고 기록되었다. 제주읍성은 본디 상고시대(耽羅國) 때부터 이미 ‘흙성[土城]’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숙종'10년(1105)에 보완하여 다시 쌓은 것이다. 우리의 '돌하르방'(옹중석)이 언제부터, 왜 제주도에 세워지기 시작 하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수수께끼지만 우리땅에서 만들어진 돌'벅수'(옹중석)가 북쪽으로 옮겨 갔을 가능성은 크다.​ 최근 우실하 교수가 중

정조대왕 효행길의 '장승’

노들나루와 지지대 장승배기에 장승을 복원하여 세워라 [일제가 왜곡한 ‘장승’과 ‘벅수’ 이야기 14]

[우리문화신문=황준구 민속문화지킴이] 서울시와 수원시는 해마다 창덕궁과 수원 화성(華城)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것을 축하하고, 220여 년 전 정조대왕의 <을묘년 능행차>(1795) 과정을 그때의 모습 그대로 나타내기 위하여 많은 예산과 정성을 들여 노력하고 있다.​ 정조는 10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28살의 젊은 나이로 한 여름 쌀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죽는 것을 목격한 비운의 임금이다. 왕위에 오른 이후에는 아버지의 무덤을 양주의 영우원(永祐園)에서 수원의 화산기슭 현륭원(顯隆園)으로 옮기고(1789, 정조13년), 다시 장례를 치른다.​ 정조는 13번의 현륭원 참배를 위하여 6번은 낮에도 호랑이와 도둑때들이 출몰한다는 위험한 남태령의 과천길을 지나 다녔으나, 1795년에는 새롭고 안전한 시흥길을 개발하여 길의 폭을 일괄적으로 24자(尺)(약750cm)로 넓힌 '신작로'를 새로 만들고, 서울과 수원을 연결하는 대동맥 '수원별로(水原别路‘(지금의 1번국도)를 탄생시켰다. (세종12년, 1尺= 31.22cm).​ 그때에는 역참(驛站)제도의 한 부분으로 큰길을 안내하기 위하여 푯말(길잡이)의 한 종류인 '장승'을 5리 또는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