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3ㆍ1만세운동 초기 ‘애국가를 불렀다’를 ‘national cry’로 표기한 세브란스의전 오웬스가 1919년 3월 24일 <브리스조사위원회(Bryce Viscoint Investing Commission)> 소속 오웬스가 보낸 보고서 일부 애국가 역사에서 고유 곡명 ‘애국가(愛國歌)’ 시대와 ‘국가 애국가(國歌 愛國歌)’는 구분 된다. 1902년 대한제국이 윤용선을 책임자로 하여 <대한제국애국가>(大韓帝國愛國歌)를 제정하게 했다. 당시 일본 <기미가요>를 작곡, 정착, 일반화 시키고 독일로 귀국한 후란츠 에케르트(FranzEckert/1852~1916)를 초청하여 작곡한 것이다. 이를 고종에게 천거한 이는 민영환으로 이미 유치호 등을 인솔하여 1896년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갔다 근대식 의전(儀典) 절차를 보고 군제를 러시아식으로 삼으며 국가의 필요성을 인식한 결과였다.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으소서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같이 쌓으소서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어천만세에 복록이 무궁케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으소서 작사자를 악보의 서문을 쓴 민영환으로 보기도 하
[우리문화신문=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1897년 7월 17일 낮 3시, 서대문 독립문 옆 <독립관>에서 조선 개국 505회 경절회(慶節會) 행사가 있었다. 이날은 조선이 개국한 날이라 기념식을 한 것으로, 사상최초의 민관합동 개국 기념식이었다. 강단에는 국기(태극기)를 게양하고 꽃 장식을 하고 하단에는 예복을 갖춰 입은 외국 공관원과 정부 고관들이 자리했고, 객석에는 관인들과 학생들, 그리고 일반인들도 자리했다.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사가 주최했고 정부 재산을 관리하는 탁지부가 재정지원을 했고, 진행은 배재학당 교사와 학생들이 담당했다. 강연은 서재필(독립신문 발행자/1864~1951), 아펜젤라(배재학당 설립자/1858~1902), 윤치호(전 외부 협판/1865~1945) 순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의 애국가 후렴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을 쓴 <National Flower>가 불렸다. 이 노래는 이후 ‘무궁화노래’ 또는 ‘무궁화가’로 표기되어 전승되었다. 이런 사실은 1897년 8월 17일자 영자신문 <independent>에 기록되었다. 기록자는 Jaishon, P, 곧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보전하세” 이 후렴이 탄생 된지 120년이 되었다. 곧 오늘의 애국가 후렴이란 점에서 곧 애국가의 출현 120년을 맞은 것이다. 그런데 120년 전부터 현 애국가가 탄생하는 1907년까지는 ‘무궁화가’, ‘무궁화노래’, ‘애국가’로 그 이름을 달리하며 불렀다. 이 번 회에사는 이 ‘무궁화가의 미디어상의 전승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무궁화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 지식인들은 계몽운동으로 국민들의 실력을 향상시켜 자주독립 국가로 가야함을 역설했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언론도 이에 앞장섰다. 그래서 애국계몽 노래들을 발표하여 널리 보급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가운데 1907년 10월 30일자 대한매일신보 잡보에 ‘무궁화가’라는 곡명의 4절 노래가 한글판과 국한문판에 동시에 게재되었다. 이 역시 이 신문의 자주독립을 각성시키기 위해 ‘무궁화’를 수록했다. 一 셩ᄌᆞ신손 오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슈려 동반도 우리 본국일셰 (후렴) 무궁화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 대한으로 기리 보젼셰 二. 츙군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