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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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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호 마을, 광기의 일본인들 한인을 학살

《Colors of Arirang》이 고발한 일본인들의 잔학성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49]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일제시대 왜놈들의 우리 민족에 대한 집단적 학살이 많았지요? 3.1 운동 후 국내에서 학살로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이네요. 만주에서는 청산리 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화룡현 장암동, 연길현 와룡동 등 한인촌을 휩쓸며 독립군도 아닌 일반 백성들을 학살하였고, 연해주에서는 1920년에 블라디보스크의 신한촌과 우수리스크 한인촌 등을 돌며 한인 백성들을 학살하였지요. 그리고 지금까지는 일본군에 의한 조직적 학살이라고 하면, 관동대지진 직후에는 광기의 일반 일본인들이 한인들을 학살하였구요.​ 그런데 《Colors of Arirang(이정면ㆍ류승호ㆍ승률ㆍ서용순, 이지출판》을 보니 사할린에서도 일반 일본인들이 한인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그것도 1945. 8. 15.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직후인 8월 20일에서 25일까지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아리랑 답사대는 그 학살이 일어났던 미즈호 마을도 찾았습니다. 도대체 이들이 왜 한마을에 같이 살던 한인들을 살해하였을까요? 일본인들은 자기 조국이 패망하면서 자기네가 살던 마을이 하루아침에 적국 소련땅이 된 것에 어느 정도 패닉 상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럴 때 한인들이 소련군에

무궁화가 나라꽃이 될 수 없는 까닭

강효백 교수의 《두 얼굴의 무궁화》를 읽고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48]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우리 모두 대한민국의 꽃은 무궁화임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꽃~♪♬♪”을 불렀고, 무엇보다도 애국가 가사에 ‘무궁화 삼천리’가 나오니까요. 그런데 왜 무궁화가 나라꽃[國花]인지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사실 무궁화는 공식적으로 나라꽃으로 지정된 것도 아닙니다.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가 ‘무궁화가 왜 나라꽃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파고들어 《두 얼굴의 무궁화(국가상징 바로잡기)》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강 교수는 전세계의 나라꽃을 조사해보니, 세계 각국은 나라꽃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5가지 특성을 보유했거나, 보유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합니다. ⓵ 지리성 : 원산종이거나 자생지가 분포하고 있거나 국토 대부분 지역에서 재배가 가능한 꽃 ⓶ 민주성 : 위에서 아래로의 일방적 지정이 아닌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여 선정한 꽃 ⓷ 역사성 : 예로부터 그 나라의 신화, 역사, 문학과 예술에 중요한 지위와 역할을 차지한 꽃 ⓸ 접근성 : 국민 대다수가 좋아하고 국민 일상생활에 쉽게 접할 수 있는 꽃 ⓹ 상징성 : 국가와 민족의 특징과 전통을 대표할 수 있는 꽃이거나 세계적으로 희귀한 특산

동농 김가진이 상해로 떠나면서 쓴 시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47]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國破君亡社稷傾(국파군망사직경) 나라는 망하고 임금도 죽어 사직은 기울었는데 包羞忍死至今生(포수인사지금생) 부끄럼 가득 안고 죽지 못해 지금껏 살아있었네 老身尙有沖霄志(노신상유충소지) 몸은 늙었지만 아직 하늘을 찌를 뜻이 남아있으니 一擧雄飛萬里行(일거웅비만리행) 한 번 날아올라 만리 길을 떠나노라 한일합방이 되면서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던 동농 김가진(1846~1922) 선생이 1919년 10월 무렵 상해로 떠나면서 쓴 시 ‘上海發行日口號(상해로 떠나는 날에)’입니다.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고 하면 얼른 친일파가 떠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농은 조선의 마지막 대신이었기에 일제의 조선귀족령에 따라 일방적으로 작위를 받았던 것이지요. 그 대신 동농은 연금 받는 것은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위 시에서 보듯이 동농은 망해버린 나라의 대신으로서 일제 치하를 살아가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3.1만세운동 뒤 대동단이 찾아옵니다. 대동단은 3.1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말 무렵 3.1 운동에 자극을 받아 전협, 최익환 등이 주동이 되어 만든 독립단체로 이들은 동농에게 대동단 총재를 맡아달라고 요

조선후기 중인들의 문학단체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46]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野闊秋多月(야활추다월) 들은 넓어 가을 달빛 그득하고 江淸夜少煙(강청야소연) 강은 맑으니 밤의 연기는 있는 듯 마는 듯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던 왕태(王太, 1764~?)의 시입니다. 왕태는 집안이 가난하여 술집 심부름꾼으로 힘들게 일하면서도 문학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아 점차 시재(詩才)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대표적인 시사였던 송석원시사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송석원시사는 천수경(1758~1818)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중인들 문학단체입니다. 그동안 시사는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는데, 중인들이 시사를 결성하였다는 것은 이 당시 중인들이 시사를 결성할 만큼 문학적 소양이 있었고, 경제적 능력도 되었다는 얘기지요. 18세기 말에는 조선도 점차 상업이 발달하면서 경제적 부를 축적하는 중인들도 늘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의 신분 상승에 대한 열망, 문학 활동에 대한 욕구가 이런 시사까지 만들게 된 거지요. 이 당시 이러한 중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문학 활동을 위항문학(委巷文學) 또는 여항문학(閭巷文學)이라고 합니다. ‘송석원’이라고 하면 소나무와 돌이 어울리는 원림(園林)이라고 할 텐데, 송석원시사를

노비까지 사랑한 이순신 장군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보이는 이순신 장군의 마음 씀씀이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45]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소문에 종 갓동(同)과 철매(哲每)가 병으로 죽었다고 하니 참 불쌍하다. 중 해당(海堂)도 왔다.​ 밤 10시쯤 급창, 금산과 그 처자 34명이 모두 유행병으로 죽었다. 3년 동안이나 앞에 두고 미덥게 부리던 자라, 하루 아침에 죽어간 것이 참혹하다. 새벽에 종 한경(漢京), 돌쇠(乭世), 해돌(年石) 및 자모종(自慕終) 등이 돌아왔다. 저녁에 종 금이(金伊), 해돌, 돌쇠 등이 돌아갔다. 양정언(梁廷彦)도 같이 돌아갔다. 저녁부터 비바람이 크게 일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돌아갔는지 모르겠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 중에 나오는 대목들입니다. 한낱 종이 병으로 죽은 것에 대해서도 가슴 아파하고, 비바람이 밤새도록 몰아치는데, 종들이 무사히 돌아갔는지 걱정하고 있는 장군!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기록들을 보다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되는데, 한낱 종들에 대해서도 따뜻한 마음 씀씀이를 보여주는 이 일기의 대목에서 또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네요. 노비들까지 걱정하는데, 부하들에 대한 기록도 없을 수 없겠지요? “흐리고 가랑비가 오더니 저녁에는 큰 비로 변하여 밤새도록 내린다.

현대 부도 막고, 삼성 비업무용 대출 규제

《효사재 가는 길》 3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43]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효사재 가는 길》을 보다 보면 장 이사장이 우리나라의 대표적 그룹인 현대를 살린 이야기도 나옵니다. 장 이사장은 공직 생활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 바로 현대 부도를 막은 일이라고 하는군요. YS가 대통령이 되고 난 뒤 YS는 선거기간 중 자신을 괴롭힌 정주영을 손봐주려고 하였답니다. 정주영 회장이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아무래도 경쟁 후보인 YS를 많이 괴롭히지 않았겠습니까? YS는 은행장들을 전부 청와대로 불러 현대에 돈 주는 은행들은 전부 문 닫게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답니다. 그때만 하여도 제왕적 대통령 시절이니 은행장들이 감히 대통령의 엄명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전에 대우가 정치적인 이유로 문을 닫아 우리나라 경제에 큰 주름이 생겼었는데, 현대마저 그런 식으로 문을 닫게 하면 나라 경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현대 부도는 대우 부도보다 더 큰 파장을 몰고 올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은행장들이 머리를 썼답니다. 직접 현대에만 돈을 주지 않으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현대종금에 돈을 빌려주었답니다. 현대종금은 이 돈을 받아 현대그룹 내 각 회사에 돈을 풀었구요. 그때만 하여도 현대종금은

장 이사장 어머님과 빨치산 이현상

효사재 가는 길 2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42]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6.25 전쟁 때 경찰이나 빨치산이나 모두 나눔의 명가 효사재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배려를 하였다고 했지요? 이때의 이야기 가운데 그냥 덮고 가는 것이 아쉬워 몇 가지 더 이야기하렵니다. 처음 빨치산이 효사재에 내려오니까, 장 이사장 어머님은 귀중품을 뺏기지 않기 위해 숨기려고 하셨습니다. 집에 당시에 제일 좋은 재봉틀과 축음기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값비싼 부분인 재봉틀과 축음기 대가리 부분을 어머니가 보자기에 싸서 보릿대 쌓아놓은 곳에 파묻어 놓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에 이를 눈치챈 빨치산 한 명이 “그 물건을 거기 놔두었다가 비를 맞으면 못쓰게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 집 물건에 손을 안 대니까 그런 걱정은 마시고 갖다가 제대로 쓰십시오.”라고 하더랍니다. 지레 의심하고 숨겼던 어머님은 당황하셨겠지요. 그리하여 축음기를 제대로 해놓으니까, 이를 즐겨 들은 사람이 빨치산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었답니다. 이현상이 오면 늘 듣던 음악이 있었는데, 장 이사장은 그때는 무슨 음악인지도 모르다가 나중에 성장해서야 그 음악이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라는 것을 아셨다는군요. 당시 장 이사장이 뭉툭해진 축음기 바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