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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동포의 학살 참극을 알리려다 일제에 암살당한 장덕준 선생

보훈처 선정, 6월의 독립운동가

[신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장덕준(秋松 張德俊)은 한국 최초의 순직기자였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1964년 4월 30일 유공언론인 기념사업의 하나로 언론 발전에 공이 많은 언론인 다섯 분을 선정하여 신문회관에 초상화를 봉안하여 언론인들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편집인협회는 앞서 ‘유공언론인 기념사업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한국 언론사에서 뚜렷한 공적을 남긴 언론인을 선정한다는 원칙을 정했다. 선정위원은 강영수, 곽복산, 김종규, 최석채, 천관우였다.


위원들은 심의 끝에 서재필(1864~1950, 독립신문 창간), 장지연(1864~1921, 황성신문 사장, 시일야방성대곡 집필), 양기탁(1871~1938, 대한매일신보 총무), 장덕준(1892~1920, 훈춘에서 독립군 취재 도중 일본군에 피살), 최병우(1924~1958, 대만 해협에서 취재도중 순직) 다섯 분을 선정하였다. 선정된 유공 언론인은 화가들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초상화를 신문회관 강당에 봉안하였다.




장덕준의 초상화는 김인승(金仁承) 화백이 그렸다. 다섯 유공 언론인의 초상화는 한국신문회관 강당에 봉안되었다가 신문회관이 프레스센터로 개축된 뒤 현재는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클럽에 걸려 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초상화는 많이 변색되었지만 불굴의 의 기자정신은 결코 퇴색하지 않고 날이 길수록 빛을 발하고 있다.


장덕준이 동아일보 기자로 활약했던 기간은 8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는 한말부터 1964년까지 언론계에 종사한 수많은 기자 가운데 후세 언론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두 동생 장덕수(雪山 張德秀, 1894~1947), 장덕진(雲松 張德震, ?~1922)과 함께 세 형제는 모두 의롭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들이다.




장덕준(1892. 6. 25. ~ (1920 ?)선생은 항해도 재령(載寧) 사람으로 1920년 4월 김성수(金性洙)·이상협(李相協) 등과 함께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창간에 참여하여 발기위원 겸 논설위원으로 있다가 특파원으로 중국 북경(北京)에 건너가 미국의원단(議員團)의 중국방문을 취재하는 한편 그들에게 한국의 독립요구를 알리는데 힘썼다.


 1920년 10월 2일 일본군이 소위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한 다음 이것을 구실로 만주의 한국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5개 사단에서 차출한 대병력으로 만주에 침입해서 독립군을 공격할 뿐 아니라 한국 이주민들을 대량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하자, 동아일보의 조사부장과 통신부장을 겸하고 있던 그는 「신문은 정간 중에 있지만 기자의 활동은 중지할 수 없다」하고 주위에서 위험함을 들어 만류하는 것을 다수의 동포들이 학살당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뿌리치고 일본군의 한국인 학살의 진상을 취재하기 위하여 10월 15일 서울을 출발해서 11월 6일 간도에 도착하였다.



 

간도 용정(龍井)에 이르러 여관에 여장을 풀고 그곳 일본군사령부를 찾아가 한국인 학살의 진상을 추궁하고 힐책한 즉 일본군측에서는 그러한 일이 없다고 하며 후일에 함께 가보자고 약속하는 고로 여관으로 돌아왔는데 그날 밤중에 일본군측에서 군인을 보내어 그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서 행방불명이 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신문(獨立新聞)」1921년 10월 28일자에 「장덕준씨 조난논평(張德俊氏 遭難論評)」이라는 제하에 「적의 만행을 힐책한 일로 밤중에 유출(誘出)하여 암살(暗殺)함」이라는 부제를 부치고 최근 간도로부터 돌아온 동포 유지의 말을 인용하여 그가 일본군에게 암살당한 것이 확실하다고 확인하여 보도하였다.


 그 요지는 일본군이 장암동(獐岩洞)에서 30여호의 한국인 주민을 한곳에 모아 방화하고 몰살한 만행을 자행했는데 그가 이 사건에 대하여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본군사령부를 찾아가 만행을 힐책한 즉 후에 함께 조사해 보자고 응답하고는 그 날밤에 여관에서 억지로 불러내다가 암살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동포의 학살에 항의하여 진상을 밝히려다가 한국 최초로 순국한 기자가 된 것이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장덕준 선생은 2017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뽑혀 그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


<공적>

    1920년 동아일보 창립 발기위원 겸 논설위원

    미국 의원단 중국방문 시 중국 북경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취재 및 한국 독립 호소

    간도(경신) 참변 당시 일본군의 한국인 학살 진상 취재

    일본군사령부를 방문하여 학살 진상 추궁 후 행방불명


<자료: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