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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의 개척자 "채상덕 선생"

국가보훈처가 뽑은 10월의 독립운동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채상덕(蔡相悳,1862~1925) 선생은 황해도 출신으로 1895년 을미의병에 참여하였으며 1910년 일제 침략으로 조선이 강점되자 남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22월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비롯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광한단(光韓團보합단(輔合團) 등 각 군단의 대표들이 관전현(寬甸縣)에 모여 남만통일회의(南滿統一會議)를 개최하고 회의를 거듭하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채상덕 선생은 최고 책임자인 총장에 취임하였다.

 

당시 선생과 함께 통군부에서 활동한 인물들로는 비서장 고활신, 민사부장 이웅해, 군사부장 이천민, 교육부장 김동삼, 실업부장 변창근, 사령관 김창환, 경무감 전덕원 등을 들 수 있다.

대한통군부가 성립된 지 얼마 안 되어 여기에 참여하지 못했던 독립운동단체들과 통합운동이 다시 전개되어, 19228월에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가 개최된 결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자 선생은 부총장으로 활동하였다. 총장은 김동삼 선생이었다.

 

19232월 대한통의부와 의군부(義軍府)로 분열되자 선생은 의군부에 가담하였으며 의군부에서 총장으로 활동하였다. 의군부는 조직된 이후 융희(隆熙) 연호를 사용하고, 통의부를 적대시하며 통의부에서 관할하던 각 지방을 점령하고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1925년 참의부(參議府)의 고마령(古馬嶺) 참변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자결 순국하였다. 이 사건은 1925316일에 만주 집안현(輯安縣) 고마령에서 독립군 간부 다수가 희생당한 참변이었다. 당시 참의부에서는 이 지역 산림 계곡에서 국내의 적을 섬멸하기 위한 군사회의를 개최하고 있었는데, 이 때 평안북도 초산군(楚山郡) 적 경찰대에게 불의의 습격을 받아 군간부 등 29명이 전사하는 막대한 희생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으며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여 그 공훈을 기리고 있다.   

    

<공적>

○ 1895년 을미의병 참여

1922년 대한통군부 총장, 대한통의부 부총장

1923년 의군부 총장

1925년 독립군의 고마령 참변 소식 듣고 자결 순국


<자료: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