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omore Fitch, 한자명 費吾生)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서 대한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던 외국인 중 한 명이다. 그의 아버지 조지 필드 피치(George Field Fitch, 한자명 費啓鴻)와 그의 부인 제랄딘(Geraldine Townsend Fitch)까지 2대에 걸쳐 부자와 부부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독립운동사에서 ‘피치 목사’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으나 그 일가가 함께 활동했다는 내용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었다. 따라서 외국인 독립운동가 ‘조지 애쉬모어 피치’를 알기 위해서는 그 일가를 살펴봐야 한다.
아버지 조지 필드 피치(이하, “필드”)는 1845년 1월 28일 미국 오하이오주 에이번(Avon)에서 프레몬트(Fremont) 장로교회의 목사였던 페리스 피치(Ferris Fitch, 1805~1846)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클리블랜드(Cleveland)에 위치한 아델버트 대학(Adelbert College, 지금의 Western Reserve University)을 졸업하고 신시내티(Cincinnati)에 있는 장로교 신학교인 레인 신학교(Lane Theological Seminary)에서 수학하고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필드는 아델버트 대학에 다니던 중인 1869년 11월 18일, 스코틀랜드 이민자 출신인 로버트 멕레란(Robert William Bolton McLellan)과 벨린다 멕레란(Bellinda McLellan)의 딸인 메리 맥레란 피치(Mary McLellan Fitch, 1848~1918)와 결혼했다. 메리 역시 페인스빌 여자 신학교(Painesville Female Seminary, 지금의 Lake Erie College)를 졸업한 선교사였다.
필드와 메리는 중국 선교에 대한 신념으로 1870년 11월 5일 상하이에 도착해 선교활동에 나섰다. 중국에 도착한 필드 부부는 상하이 외곽 지역의 장로교 선교구역에 집을 구했고, 상하이에서 첫째 아들 로버트(Robert Ferris Fitch, 한자명: 司徒華林, 1873~1954), 둘째 메리 엘리엇(Mary Elliot Fitch, 1875~?), 셋째 자넷(Jeannette Griswold Fitch, 1878~1945) 등 1남 2녀를 낳았다. 필드와 메리는 얼마 뒤 상하이 근처 쑤저우(蘇州)로 이동했고, 넷째 애쉬모어(George Ashmore Fitch, 1883~1979)와 다섯째 앨리스(Alice Rayond Fitch, 1884~1971)를 낳았다.
필드의 자녀들은 모두 미국에서 학교를 졸업한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특히 2남 3녀 중 애쉬모어 뿐만 아니라 장남 로버트도 미국 미시간주 홀랜드에 위치한 웨스턴 신학교(Western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고 돌아와 항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1916년부터 1922년까지 항주 기독교대학(지강대학, 현 절강대학)의 교장을 역임했다. 당시 로버트가 항주 기독교대학의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에는 엄항섭·심훈 등의 한국인들이 수학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아버지 필드와 동생 애쉬모어처럼 한국인들과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필드의 자녀 중 대한독립운동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었던 인물은 2남 3녀 중 넷째인 애쉬모어로, 1883년 1월 23일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태어났다. 애쉬모어는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1900년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았다.
애쉬모어는 상하이에 온지 1년 만인 1910년 미국에서 대학생활 중 만난 앨버타(Alberta Casterlin Kempton, 1886~1919)와 결혼하고 2남 2녀를 두었다. 그러나 1919년 2월 앨버타가 장티푸스로 사망하여 사별했다. 이후 감리교 선교사로 상하이에 온 제랄딘(Geraldine Townsend, 1892~1976)과 1924년 결혼했다.
피치 일가 중 여성으로서 대한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제랄딘은 1892년 미국 미시간주 포레스터(Forrester)에서 프레드 타운센드(Fred H. Townsend)와 제인 로건(Jane Logan)사이에서 태어났다. 1917년 미시간주에 위치한 앨비언대학을 졸업하고 감리교 선교사로 중국으로 파견되어 1924년까지 감리교 청년회 총간사로 활동했다. 이후 남편 애쉬모어와 함께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했으며, 1940년대 초반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적극적인 외교 및 언론 활동에 나섰다.
마지막으로 메리 엘리엇과 자넷, 앨리스 3명의 딸들 역시 중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돌아와 선교활동에 매진했다. 주목되는 점은 메리와 자넷 모두 애쉬모어가 다녔던 에이번의 우스터대학에서 공부했다는 것이다. 우스터대학은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 다녔던 곳이기도 했다. 메리 엘리엇은 우스터대학을 졸업하고 필라델피아에 있는 필라델피아 여자 의학대학(Philadelphia Women's Medical College)을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와 쑤저우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했다.
자넷도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와 닝포(寧波)에서 장로교 선교사인 남편과 함께 선교활동을 벌였다. 막내 앨리스는 어머니 메리가 다녔던 페인스빌 여자 신학교를 졸업하고 상하이와 미국 남부지역 YWCA 간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앨리스는 1925년 영국인 사업가 윌프레드 해리슨(Wilfred Harrison)과 결혼하고 영국으로 가서 생활하여 필드의 5명의 자녀 중 유일하게 중국에서 활동하지 않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조지 피치 일가는 모두 중국에서 활동하며 사회활동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과의 접점도 많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