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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의 숨은 조력자 '조지 애쉬모어 피치' <2>

2018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운동은 전 세계를 무대로 진행되었다. 그 중 해외 독립운동은 지지기반이 약하고 언어 등 제약이 있었으므로 현지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대한민국정부는 독립운동을 지원한 현지인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17년까지 56명의 외국인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였다.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omore Fitch, 한자명 費吾生)20181월의 독립운동가로 뽑혔다. 이에 <4회>에 걸쳐 그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싣는다.



 1870115일 중국에 도착한 필드는 상하이와 쑤저우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고, 1888년 미국 장로교 선교회 중국지회장이 되었다. 또한 같은 해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서적을 인쇄했던 미화서관(美華書館, The American Presbyterian Mission Press)의 책임자가 되었다. 더불어 미화서관에서 매달 간행하는 종교지 차이니즈 레코더(The Chinese Recorder) 의 편집장을 맡았다. 차이니즈 레코더 자유주의 신학을 기반으로 한 종교지로서 중국에 퍼져가는 민족주의 사조를 반영한 잡지로 명성을 떨쳤다. 필드의 중국 활동은 장로교 선교사로서 그의 명망을 높이게 되었고, 한국인 기독교 신자들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필드는 189311월 상하이에서 한국인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필드가 처음 만난 한국인은 윤치호(尹致昊)였다. 이들은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개신교 선교와 영어 교육에 대해 대화를 나눴고, 필드는 윤치호에게 한국의 기독교 선교를 활성화하기 위해 감리교 선교사가 파견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이 시기 필드는 한국이 국제적으로 처한 위기에 대한 관심보다는 종교적인 측면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태도는 1910년 일본의 한국병탄을 전후로 다수의 한인 기독교인들이 상하이로 망명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1910년 이후 한국인들과 중국 내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의 접촉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상하이로 망명한 한국인 기독교도들은 19149월 중국 YMCA 총무 미국인 선교사 락우드(Lockwood)의 도움으로 중국 YMCA 사무실에서 모임을 가졌다. 당시 필드의 아들 애쉬모어가 중국 YMCA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부터 피치 일가와 한국인들의 본격적인 접촉이 시작되었다.


 19158월 대륙보(大陸報)에 미해군 YMCA회관이밀항한 한국인을 비호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리면서 일본영사관과 미국영사관 간에 교섭이 오갔다. 미 해군 YMCA 상하이지부는 1900년 의화단사건 때 황푸강에서 피해를 입은 모노카시호(USS Monocay)에 승선했던 기독교인 장병들을 위해 조직되었는데, 이때 미 해군 YMCA 상하이지부를 조직한 초대 총간사는 필드였고, 아들 애쉬모어가 이곳에서 근무했다.


필드와 한국인들의 본격적인 접촉은 YMCA계통의 협화서국(協和書局, The Shanghai Mission Bookstore)을 운영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필드가 협화서국을 운영하게 된 것은 미화서관을 운영했던 경험과 1888 차이니즈 레코더 의 편집장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협화서국을 통한 본격적인 한국인과의 접촉은1917년에 이루어졌다.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한 여운형은 난징(南京)에 위치한 진링대학(현 난징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917년부터 상하이에 위치한 협화서국에서 위탁판매부 주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협화서국에서 이루어진 필드와 여운형의 만남으로 필드는 일본의 강압적인 한국 식민지배의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필드는 아들 애쉬모어를 통해 여운형을 19181128일 상하이에서 열린 크레인(Charles Richard Crane) 주중 미국대사 예정자의 환영파티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때 여운형은 크레인을 직접 만나 한국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여운형이 초대장도 없이 환영파티에 참가하여 크레인을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북경정부 외무부장인 왕정팅(王正廷)이 애쉬모어가 주재하는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쉬모어는 상하이 YMCA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매주 수요일 저녁 성경공부 모임을 통해 쑨원(孫文), 탕사오이(唐紹儀), 왕충휘(王寵惠) 등 중국 국민당 정부인사 뿐 아니라 중국의 유명한 사업가 쑹자수(宋嘉樹), 니치지에(聶其杰), 모우추(穆藕初) 등과 교류하고 있었다. 이러한 피치 일가의 인적 네트워크는 한국인들이 중국 국민정부 인사들과 교류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피치 일가의 이러한 활동은 일제의 감시를 불러왔다.


  필드는 상하이에서 중국으로 망명한 한국인 기독교인과 접촉하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한국인들의 활동에 대한 지원으로 나타났다. 때문에 결국 일제의 감시를 받기 시작했다. 필드에 대한 일제의 본격적인 감시는 재건된 대한적십자사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다.



대한적십자사는 19097월 일본적십자사에 흡수되었으나 1919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 829일 대한적십자회 설립이 공포되며 재건되었다. 이와 함께 미국에서는 한인구제회가 조직되어 한국과 만주·중국 등지에서 일제의 탄압 하에 있는 한인 구호를 위한 모금에 나섰다. 그러나 모금과정은 부진했고 이 모습을 지켜본 필드는 대한적십자를 통해 적극적으로 모금 활동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필드는 구제회의 모금이 현실적인 어려움에 봉착하자 당시 중국에 있는 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구호품과 의연금을 모집하여 한인들을 돕기 시작했다.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은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를 국제적인 문제로 부각시켜 영국, 미국에게 일본에 대한 경각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또한 필드는 경제적 지원에서 더 나아가 중국 상하이에 망명해 온 한국인 청년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는 일에도 관여했다. 이러한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아들 애쉬모어가 주로 YMCA에서 중국인들과 교류하며 일제의 감시를 느슨하게 만들었고, 필드는 한국인들을 중국인으로 위장시켰기 때문이다.


한편, 1908년 초 대동보국회 상하이연회(大同保國會 上海聯會)에서 설립한 대동학교(大同學校)가 설립되었다. 이후 1913년 동제사는 상하이 한인학생들의 유학을 위한 예비교육기관으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했다. 이처럼 1910년 국권피탈 이후 망명자들이 늘어난 상하이에서 한인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이는 1916년 인성학교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19194월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하이로 몰려드는 한인은 더욱 증가했다. 1919 914명의 학생으로 개교한 인성학교는 19204개 학급, 학생 수는 30명까지 그 규모가 성장했다. 이처럼 학교규모가 성장하자 학교운영에 필요한 운영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인성학교 측은 학교의 성장과 함께 새로운 학교 부지를 확장하는데 있어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니 예산 확보를 위해 미주 한인들의 도움을 절실히 요청했다. 이에 따라 미국과 연계가 가능한 미국인 선교사들이 기금모집을 위한 고문위원으로 참가했는데 5명의 외국인 중에서 피치(필드)파커롤링슨탈레트 4명이 미국인이었다.


필드의 상하이 한인사회에 대한 지원은 19226월 상하이주재 일본총영사로 하여금 미국총영사 커닝햄에게 유감을 표명하는 사태를 불러왔다. 일본총영사의 유감 표명은 비공식적인 구두 전달로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일본의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는 미국인 선교사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제재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비록 비공식적인 요구였지만 커닝햄은 필드에게 대한적십자사가 4월에 발행한 문서의 직접 작성 여부와 지원금 조성 경위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이에 필드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렇습니다. 그 문서는 내 승인 하에 작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직접 작성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한국에 있는 미국인의 증언을 통해 한국인들이 본국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어떠한 탄압을 받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내가 지원한 돈은 정직한 방법으로 모금되었고, 이 돈은 고통 받는 한국인들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수년 동안 상하이에서 한국을 돕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정치적 포부를 격려하거나 이념적인 선전을 한 적은 없습니다.

 

필드는 미국총영사 커닝햄에게 보낸 답변에서 대한적십자사를 통한 자신의 모금과 구호 활동은 정치적인 활동이 아닌 순수한 구호활동으로 불법적인 면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일본인들이 자행하는 한국인 탄압을 문제시하며 자신의 활동이 타당하다 주장했다. 또한 독립신문 을 통해 나는 정치적으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방조한 일이 없다. 그러나 차가운 추위에 슬퍼하는 한국동포를 위해 구제사업을 경영한다. 이는 선교사인 나의 신성한 의무다라고 하며 선교사로서 자신의 활동이 정당함을 주장했다.


이에 커닝햄은 재차 필드에게 서한을 보내 미국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미국시민이 외국에서의 정치적인 활동을 자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대한적십자사 활동을 지속하는 것은 국무부의 요청을 준수하지 않는 것이라며 유감을 표명했다.


필드는 대한적십자사를 통한 모금활동과 인성학교의 기금모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필드의 활동은 31운동 이후 한국 내 선교사들이 일본의 만행을 비판하며 국제적 사건으로 만든 것에서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1910부터 망명한 한인기독교인들과의 접촉과 협화서국에서 여운형과의 만남은 선교사인 필드에게 인류애적 동정을 불러일으켜 한국문제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1910년대 초반부터 1920년대까지 상하이에서 적극적으로 한인들을 지원하던 필드는 1923217일 상하이 자택에서 78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상하이 화이하이공원(淮海公园)에 안장되었다. 필드 사후 1930년대에 들어서면 필드의 아들 애쉬모어와 그의 부인 제랄딘이 뒤를 이어 한국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3회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