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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상해에서 청년동맹회 간부로 활약한 '김규면 선생'

독립장, 2002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김규면(1880~1969)선생은 함북 경흥 출신으로 서울 배재학당과 한성사범학교 등을 졸업하고, 1907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신교육운동에 참여하였다.


일제의 한국강점 후 기독교에 입교하여 목사가 되었으며, 1913년 조선총독부의 포교규칙(布敎規則)을 승인하는 영국과 미국 선교사들의 방침에 저항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북간도에서 독립교회(獨立敎會) 성리교(聖理敎)를 창립하였으며, 성리교의 조직과 자금을 기반으로 중국 왕청현(汪淸縣) 춘화사(春華社)에서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선임되어 5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흑정자(黑頂子) 일대 나자구(羅子溝)와 초모정자(草帽頂子)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으로 거점을 옮겨 이동휘(李東輝)의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과 대한신민단을 합동하여 한인사회당 부의장 겸 군사부위원장으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전쟁 시 고려빨치산군대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프리아무르주 군정의회 전권위원으로 전선 후방의 조직 및 지도를 총괄하였다.


또한 신민단 의사부장(議事部長) 김춘범(金春範)으로 하여금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나자구지방에 무관학교 설립계획을 추진하고 한인청년들의 군사훈련을 조련하였으며, 같은해 11월 중순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용(李鏞)·김좌두(金佐斗)·김하석(金夏錫)·김만겸(金萬謙) 등과 함께 독립단(獨立團)을 조직하고 신한촌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0년 4월 일본군이 볼세비키 조직 섬멸 및 '불령선인(不逞鮮人) 토벌(討伐)'이란 명목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비롯한 한인 밀집지대를 기습하여 한인조직을 파괴하고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는 이른바 4월 참변(慘變)을 자행하였다.


이 4월 참변으로 인해 독립단 단장 최재형이 일본군에 의해 피살되자, 그는 독립단을 해산하고 쌍성(雙城) 방면으로 거점을 옮겨 무장항쟁을 준비하였다.  1920년 10월 러시아 니콜스크-우스리스크지방으로 이동하여 한인무장부대 혈성단(血誠團) 명예단장으로 선임되어 무력투쟁을 위한 준비를 하였고, 같은 달 동만(東滿)에 있는 대한의민회(大韓義民會)·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을 병합하여 총판부(總辦府)를 조직하고 단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2월에는 노령(露領)의 한인대표를 모아 이만에 공산당 근거를 설치할 것을 협의하는 한편, 코민테른 제2차대회에 한인사회당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21년 노령 니콜스크-우스리스크지방에서 정재관(鄭在寬)과 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동하였고, 3월 러시아 마사노프에서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 전한군사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코민테른 자금 가운데 4만원을 수령하여 대한의용군 편제 및 보급에 투자하였다.



 

같은해 5월 한인 무장부대의 통일을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했을 때 대한의용군 군사위원회를 대표하여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와 맞서 싸웠으며, 7월에 이만에서 대한의용군 군사위원회를 재결성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1922년 9월 노령 한인무장부대가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으로 통합될 때 참모부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시베리아 내전을 종결지은 연해주 해방전투에 러시아 적군(赤軍)과 연계 속에 한인연합부대 군사위원으로 참전하여 백군을 구축(驅逐)하였다. 


  1923년 중국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 창조파에서 군무총장으로 내정되었으나 이에 참가하지 않고 중국 국민혁명에 참여하여 중국노동자 파공운동(罷工運動)에 가담하면서 북벌전쟁에 동지들을 동원하였으며, 1924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차장 및 교통총장 대리에 선임되었다.


1924년 상해에서 윤자영(尹滋瑛) 등이 결성한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1925년 5월 상해대학학생연합회(上海大學學生聯合會)가 배외운동(排外運動) 차원에서 동맹휴교(同盟休校) 등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계획하자, 윤자영과 함께 상해대학학생연합회를 방문하여 적극 후원할 뜻을 표하고 학생연합회에서 작성한 전단을 상해 프랑스조계에 살포하였다.


1927년 장개석 반공쿠데타로 국민혁명이 좌절된 뒤 연해주로 돌아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서점에서 동양서적 판매원으로 일하는 한편, 빨치산 농업조합의 생산활동을 지원하였다. 1931년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재조직사건에 관여하여 검거될 당시 탈주하였으며, 1934년부터 모스크바 그르임 등지에서 생활하다가 1969년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공적개요>
ㅇ1907년 신민회 가입
ㅇ1919년 대한신민단 단장 및 한인사회당 부의장 겸 군사부위원장
ㅇ1921년 노령 우스리스크 지방에서 창해청년단을 조직, 단장으로 활동
ㅇ1924년 임시정부 교통차장 및 교통총장대리에 선임, 상해에서 청년동맹회의 간부로 활동

<자료: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