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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백년편지] 존경하는 김구 선생님께 -임홍재-

[신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백년편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글 형식의 글입니다.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 접수를 받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문의 : 02 -733-5027】


는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주 베트남 대사로 근무하면서 베트남이 1986년 “도이머이(刷新)” 개방정책을 채택한 이래 신흥시장 국가로 급속히 발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연히 베트남인들의 역사,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근세에 들어 베트남이 80여 년 간 프랑스 식민지 통치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그 후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지도자로서 베트남 국민들을 이끌었던 호치민 주석에 대해 알면서 왜 베트남 국민들이 호치민을 “박 호(호치민 큰 아버지)”로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호치민을 공산주의자이기 전에 애국자, 민족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그는 한때 “애국(愛國)”이란 이름도 썼으며, 거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공산주의를 수단으로 수용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호치민은 1911년 21세 나이에 조국을 떠나 30년 간 4개 대륙 28개국에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급변하는 시대의 특징과 동향을 파악, 베트남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전략을 수립했습니다. 호치민은 1940년 초부터 1945년 2차 대전이 끝날 때가지 중국 광둥, 충칭, 쿤밍, 윈난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호치민이 중국에서 독립을 위해 활동하고 있을 때, 같은 고난의 위치에서 같은 목적으로 같은 지역에서 활동했던 선생님과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선생님과 호치민 주석은 민족 해방과 독립을 위해 생애를 바친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아가 두 지도자의 사상도 정확하게 일치 합니다. 선생님은 자신의 정치 소신은 한 마디로 말하면 자유라고 말하셨고, 호치민은 독립과 자유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과 호치민 간 교류 가능성에 대한 언급은 1979년 간행된 조경한 선생의 <백강회고록 (白岡回顧錄)>에서 보았습니다. 이 회고록에 따르면, 충칭에 머물던 선생님과 임정일행이 1945년 말 고국으로 귀국하기 위해 상하이로 와 있을 때 매일 저녁 방문과 초대로 눈코 뜰 새가 없었는데, 그중 가장 큰 초대연은 상해의 전 교포들이 베푼 것, 호치명(호지명, 뒷날 월남 베트콩의 영수)이 베푼 것, 중국의 여러 지도자들이 베푼 것 등등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이 글을 읽은 후 2010년 7월에 당시 백범김구기념관장(白凡金九記念館長) 김신 장군을 방문하여 말씀을 들었는데, 김 관장은 본인이 어렸을 때 호치민이 충칭의 우리 임시정부 청사를 가끔 방문한 적이 있으며, 선생님과 호치민 간  통역을 한 적이 있다고 회고 했습니다. 김 관장은 그 당시 호치민은 키가 왜소하고 마른 모습이었으며, 중국 광둥지방 의복을 입고 광둥지방어를 구사하여 영락없는 중국인이었다고 술회했습니다.



 호치민은 한국은 일본만 패망하면 독립하게 되지만, 베트남은 일본이 베트남에서 물러나게 되면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에 돌아올 것이 뻔하기 때문에 베트남 독립에 어려움이 많다고 걱정하곤 했다고 합니다.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도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에서, 김신 장군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호치민이 충칭에 있는 동안 임시정부 청사를 수차례 들러 백범과 교분을 쌓았으며, 1945년 11월 5일 임정일행이 상해에 왔을 때 호치민 주석이 일부러 상해로 와서 임정 일행을 위해 환송연을 열기도 했다고 술회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 두 나라는 벌써부터 교류가 있었습니다. 1127년 베트남 리왕조(李王朝)의 이양혼(李陽焜)이 고려에 와서 정선이씨(旌善李氏)의 시조가 되었고, 99년 뒤인 1226년 베트남 리왕조의 왕자 이용상(李龍祥)이 국난을 피해 고려로 와서 화산이씨(花山李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에는 이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베트남 왕자들이 이미 오래 전에 우리 두 민족 간 접촉의 다리를 놓았습니다.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집(芝峰集) 등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조선과 베트남의 사신들이 북경에서 접촉하였습니다.


한국과 베트남은 냉전시기를 보낸 후인 1992년에 수교했습니다. 2017년은 수교 25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전략적협력동반자로 그리고 사돈의 나라로  발전된 양국관계는 유사한 역사 및 문화적 배경과 함께 두 국민 간 끝임 없는 접촉과 교류에도 힘입고 있다고 생각 됩니다. 이제 우리 민족의 지도자 선생님과 베트남 민족의 지도자 호치민 간 고난의 독립운동 기간 교류와 친분이 확인이 되면, 1억 인구 베트남의 우리에 대한 호감은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저는 우리 임시정부 중국 내 이동 경로와 호치민의 중국 내 활동 경로를 추적하면서, 선생님께서 오래 전에 우리 양국 간 우호를 위해 심어놓으신 씨를 찾아 결실을 맺도록 계속 노력할 예정입니다.



  임 홍 재

 

현 국제회의연구소장

전 베트남 주재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