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李東寧), 국무총리 이승만(李承晩),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 외무총장 김규식(金奎植), 법무총장 이시영(李始榮), 재무총장 최재형(崔在亨), 군무총장 이동휘(李東輝), 교통총장 문창범(文昌範) 등이 임명되었지요. 현재 한국 정부는 4월 13일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로 기념하고 있으나, 광복회에서는 4월 13일은 상하이임시정부 수립을 알리는 공문을 뿌린 날이고, 실제 결성일은 4월 11일이라며 임정 수립일을 4월 11일로 바로잡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후 1945년 8ㆍ15광복까지 상해[上海, 1919]ㆍ항저우[杭州, 1932]ㆍ전장[鎭江, 1935]ㆍ창사[長沙, 1937]ㆍ광저우[廣州, 1938]ㆍ류저우[柳州, 1938]ㆍ치장[1939]ㆍ충칭[重慶, 1940] 등지로 청사를 옮기며 피눈물 나는 광복운동을 펼쳤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항일독립전쟁은 국제외교와 의열투쟁 그리고 광복군창설 등의 군사활동으로 이루어졌지요. 특히 광복군을 창설하여 일본군과의 전쟁을 벌여나갔으며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이후엔 군대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ㆍ사이판ㆍ필리핀 등지에 파견하였고 1945년에는 국내진입작전의 하나로 미군의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8ㆍ15광복을 맞았습니다.
광복 이후 임정 측은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국하려 했지만, 미 군정청이 받아들이지 않아 지도부는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고, 임시정부의 내각은 물론 정책도 계승되지 못했지요. 귀국 이후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서울 중구 새문안로 경교장에 임시정부를 이어나가려 했지만 이승만이 배후라고 알려진 안두희의 총탄에 암살당해 임시정부는 그 운명을 다했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분명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대한민국의 지주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