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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보재 이상설 선생이 더욱 그리워지는 지금, 김낙진

[백년편지] 삼백세번째 편지 -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제 한 달 후면 2019년이 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또한 선생께서 그렇게 염원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지 102년이 되는 해입니다. 제가 선생님께 편지로라도 존경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은 선생께서 보여주신 고결하고 헌신적인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다시금 조망해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생께서 출생하신 충북 진천군 덕산면은 제 고향이기도 합니다. 우리 민족이 우러러 보는 선생의 고향이 저와 같다는 점에서 선생님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각별합니다.^^ 시골집을 찾을 때 마다 제 자식들에게 여기가 이상설 선생의 출생지라고 말해주면서 선생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금은 이제 성인이 되었지만 그 때 찾았던 선생의 유허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진천을 이야기할 때 저는 선생의 이름을 대표적으로 내세웁니다. 그것은 그만큼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한 처절한 선생의 노력과 국권피탈 이후 연해주 등지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생의 행적을 널리 알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선생께서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 날 만큼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고 들었습니다.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셨을 때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려는 시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던 때였습니다. 일제는 황무지 개간권이라는 미명하에 우리나라 토지를 침탈하여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로 하고 일본인들의 대대적인 이민을 실시하여 보호국화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생께서는 연명상소를 올려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을 결사반대하였습니다.

 

 

일제가 러일전쟁의 승리이후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보호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조약체결 당시 선생께서는 의정부 참찬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회의에 참석하여 조약 체결을 저지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이 가로막아 이 회의에는 참석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광경입니다. 회의가 끝나자 선생께서는 한규설 참정대신과 손을 맞잡고 목 놓아 울면서 국망을 슬퍼하셨습니다. 심지어 자결까지 시도하셨던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습니까.

 

몇 해 전에 독립운동관련 학회를 따라 만주일대와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핫산, 지신허 등을 다녀왔습니다.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 퍼져있는 독립운동유적지의 현장 답사였습니다. 책이나 방송에서만 접했던 역사의 현장에 서서 당시의 모습을 제 나름대로 상상해 보았습니다. 지금 그 흔적을 찾기 쉽지 않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시는 선생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선생께서는 1906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연추에서 간도관리사를 지냈던 이범윤 선생과 국권회복을 위한 방략을 논의하신 뒤 북만주의 용정으로 가셨더군요. 그곳에서 항일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을 세워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셨습니다. 지난 번 답사 때 가보니 그곳은 용정실험 소학교가 그 자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선생께서는 모르시겠지만 그곳에 기념석비가 있어 반일의식과 민족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선생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기억할 수 있습니다.

 

선생은 이준, 이위종과 함께 일본의 부당한 국권피탈을 열강에 호소하기 위해 고종황제의 명을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가셨던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회의 자체가 열강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과를 올리지 못하셨지요.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등지를 다니면 직접 을사조약이 부당성과 무효임을 호소하셨지요.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먹먹한 일이었습니다. 일제의 파렴치하고 침략적인 행위에 치가 떨리기도 하지만 우리 국력이 그렇게 형편없이 사그라져 버린 것에 대해 분노가 치밀기도 합니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의 일을 빌미삼아 자기들 마음대로 궐석재판을 열어 선생께 사형을 선고하기도 하였습니다. 참으로 안하무인이고 후안무치한 짓입니다. 선생께서는 이에 개의치 않고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하기도 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고초를 겪으면서도 권업회를 조직하고 신문을 발행하는 등 독립운동과 독립사상 고취에 헌신하셨습니다. 한일합병이 되자 1914년에는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이러한 활동이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쳤던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동안 러시아와 일본이 연합국으로 동맹을 맺자 러시아령에서의 독립운동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선생께서는 참으로 난감하고 막막하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가 그러했을 것이라고 추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께서는 이에 개의치 않고 상해로 가서 신한혁명단을 조직하는 등 절대 굴하지 않은 독립의 의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불행이 불행을 불러 온다고 했던가요. 하늘도 무심하시지 선생께서 병에 걸리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지요. 결국 선생께서는 1917년 4월 1일 안타깝게도 러시아 연해주의 우스리스크에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선생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한데 대한 자신의 노력을 책망하셨습니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죽어서까지도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한 책임추궁을 당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연해주 답사 때 선생의 유해가 뿌려진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가를 거닐었습니다. 선생의 혼이라도 만날까 했습니다. 수이푼 강가에 세워진 유허비는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생의 우국충정의 마음을 시대를 넘어 말해주고 있습니다. 최근 일제의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피해자문제 등 전쟁범죄에 대한 반성 않는 태도들에 관한 언론보도를 볼 때마다 선생께서 살아계셨다면 지금 무어라고 말씀하실까. 많은 생각을 들게 합니다.

 

선열들의 희생덕분에 광복을 찾고 번영을 이룬 나라에서 편히 살고 있는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이 편지를 올립니다. 김낙진.

 

  김 낙 진

 현직 : 전쟁기념관 교육팀장

 최종학력 :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문학박사)

 주요경력 : 충북대학교 사학과 강사 역임

 주요실적 : <고려 금군 연구>, <한국역사상 전쟁을 통해 본 호국안보공동체  >(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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