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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식

일왕타도 외치다 숨진 '가네코 후미코' 문경에 잠들다

박열의사기념관, <박열ㆍ가네코후미코기념관>으로 바꿨으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사과의 고장 문경은 지금 온통 사과꽃 향기로 뒤 덮여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하얀 사과꽃들은 탐스런 열매를 맺기 위해 저 마다 아름다운 향기를 자아내는 것이리라. 그 사과꽃 향기 속에 잠들어 있는 일본인 독립유공자 가네코 후미코 지사의 무덤을 찾아 나선 길은 그러나 조금 쓸쓸했다. 인생의 황금기를 천황제 반대와 조선독립을 위해 뛰다 스물세살의 나이로 숨져갔으니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일제만행의 굴욕에 맞서

 

자유를 갈망하던

조선인 남편 도와

저항의 횃불을 높이 든 임

 

그 횃불 타오르기 전

제국주의 비수 맞아

스물 셋 꽃다운 나래 접고

 

조선 땅에 뼈를 묻은

임의 무덤 위로

 

해마다 봄이면

푸른 잔디

곱게 피어난다네. 

                       - 이윤옥 시 《서간도에 들꽃 피다 (제10권, 수록) -

 

2년 전 영화 ‘박열’로 관심을 끌게 된 독립투사 박열(1902-1974)과 그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문경의 <박열의사기념관>(경북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 44)을 찾은 것은 28일(일) 오전 11시, 미리 약속한 시간에 맞춰 오지훈 학예연구사는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대식 건물에 정원 손질이 잘 되어 있는 기념관은 내부 전시실도 알차게 꾸며져 있었다.

 

 

 

우리는 곧바로 박열 의사와 가네코 후미코 지사의 독립운동 발자취가 전시되어 있는 전시실로 향했다. 1층 전시실의 절반은 박열 의사 관련 전시물이고 절반은 가네코 후미코 지사의 전시실로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2층은 천황타도의 선봉에 섰던 박열 의사와 가네코 지사에 관한 한일 양국의 연구 성과물과 박열 의사가 일본의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보낸 22년 동안의 옥중생활, 그리고 대법원 공판 모습 등이 모형으로 꾸며져 있었다.

 

서슬 퍼런 제국주의 심장에서 일본 천황 타도에 앞장섰던 박열, 가네코 후미코 부부! 그들의 용기와 신념은 대관절 어디서 나온 것일까? 박열의사기념관의 오지훈 학예연구사는 이들의 삶의 기록이 낱낱이 전시된 기념관을 공들여 안내해주었다. 사실 전시실을 따로 따로 구분해 놓았지만 이들이 도쿄에서 만나 재일조선인 아나키즘 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하고 기관지인 <흑도>, 사상잡지 <후토이센진>, <현사회>등을 만들면서 천황타도를 기획하여 대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을 때까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둘이 아닌 한 몸이었다.

 

그들은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 각오로 일본땅에서 대한의 독립을 꿈꾼 혈기 왕성한 젊은 부부였던 것이다.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이 참에 현재의 <박열의사기념관>은 <박열ㆍ가네코후미코기념관>으로 바꿔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가네코 후미코 나이 스물세 살! 가네코 후미코는 바로 그 스물세 살의 나이로 일본 우쓰노미야형무소(宇都宮刑務所) 도치기지소(栃木支所)에 수감 중 순국의 길을 걸었다. 그는 일본인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인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렬한 반일론자요, 항일투사였다.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재혼하는 바람에 9살 때 조선에 살고 있던 고모집에 보내진다. 말이 고모지 새아버지의 여동생 집이었기에 사실상 거의 남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이곳에 맡겨진 가네코 후미코는 하녀 취급을 받으며 16살이 될 때까지 7년을 보냈다. 이때의 ‘조선경험’은 훗날 그가 조선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1919년 3.1만세운동을 목격하면서 억압과 압제의 조선인들의 삶을 깊이 인식하는 계기로 자리 잡게 되었음은 형무소에서 기록한 그의 자서전 등에서도 감지된다.

 

 

 

 

1920년 봄, 도쿄로 돌아간 가네코 후미코는 신문팔이, 가루비누 행상, 식모살이, 식당 종업원 등을 전전하면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때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과 만나면서 사회주의사상에 눈뜨기 시작했는데 특히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과의 만남은 가네코 후미코의 인생을 바꿔 놓는 계기가 되었다.

 

어린 시절 하녀 취급 받으며 조선에서 지낼 때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물로서 고통 받는 식민지 조선인과 가족제도의 희생물로 노예처럼 살아온 자신을 동일하게 여기고 그 정점이 천황제라고 인식하기에 이른다. 가네코 후미코는 1922년 봄부터 박열과 함께 투쟁 노선에 뛰어 드는데 이 무렵 일본 사상계의 효시로 평가되는 흑도회 기관지 <흑도> 창간호를 펴냈다.

 

이어 박열과 함께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흑우회를 결성하고 11월에 <후토이센징>을 창간하여 1923년 6월까지 4호를 펴냈다. (이 가운데 3호와 4호는 <현사회>로 이름 바뀜) 또한 1923년 4월에는 동지이자 남편인 박열과 함께 대중 단체인 ‘불령사’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등 가네코 후미코의 열성적인 활동은 모두 이 무렵에 이뤄졌다.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의 노예적인 삶을 거부하고 모든 것을 걸어 국가와 사회의 모순, 기존의 제도와 대결하면서 치열한 투쟁을 지속해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투사적인 활동은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과 함께 서서히 막을 내린다. 유례없는 대지진이 휩쓴 도쿄에서 9월 3일, 가네코 후미코는 남편 박열과 함께 일본 경찰에 잡히는데 이들의 죄목은 천황살해를 기획한 이른바 '대역죄'다. 이 죄목으로 이들은 1926년 3월 25일 각각 사형선고를 받았다.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은 사형선고 1개월 전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하여 정식 부부가 되었으며 영원히 함께 하자고 맹세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각각 지바(千葉)형무소와 도치키(栃木) 형무소로 이감되었는데 열흘 뒤 ‘대사면 은사(恩賜)’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가네코 후미코는 ‘권력 앞에 무릎을 꿇기 보다는 자신의 의지로 삶을 마감한다’는 뜻을 내비친 뒤 7월 23일,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는 ‘자살’로 발표했으나 일설에는 ‘타살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주장은 후지와라 레이코(藤原麗子) 씨의 <문경에서, 2017>이라는 글에서 당시 가네코 후미코가 임신 중이었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보기에는 의문이 따른다는 지적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야마다 쇼지(山田昭次) 씨도 《가네코 후미코 : 자신ㆍ천황제국가ㆍ조선인(金子文子 : 自己ㆍ天皇制國家ㆍ朝鮮人)》이란 책에서 “후미코 유족이 자살을 믿을 수 없다고 조사를 요청했으나 간수측의 방해로 사망 경위가 불명인 채로 남아있다.”고 증언한 사실에서도 ‘자살 처리’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다.

 

가네코 후미코의 주검은 옥사한 그해, 1926년 11월 5일, 남편 박열의 선영(경북 문경)에 안장되었으며 2003년 11월 박열의사기념관 공원 안, 현재 터에 이장되어 영면에 들었다.

 

한편, 박열 의사는 대역죄명을 쓰고 22여 년 동안의 감옥살이를 해야했다. 특히 1945년 8월, 죄수들의 석방이 대거 이뤄졌지만 일제는 72일이나 지난 10월 27일까지 박열 의사를 대역사범(천황살해기도죄)이라고 풀어주지 않았다. 이에 원심창, 이강훈, 김천해 등 동료들이 맥아더 연합군 총사령부 앞으로 석방탄원서를 제출한 끝에 1945년 10월 홋카이도에서 44살이 되어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박열 의사는 석방 뒤 1946년 10월 3일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을 결성하여 초대회장을 맡아 활약했다. 이듬해 장의숙과 재혼하여 조국으로 귀환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1974년 북한에서 숨을 거두었다.

 

 

박열 의사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고, 가네코 후미코 지사는 2018년 11월 17일,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첫째는 2.8독립선언을 한 유학생을 변호한 후세다츠지가 받음 )로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국가보훈처에 문의한 결과, 현재 가네코 후미코 지사의 훈장증은 요코하마영사관에 보관 중이며 곧 후손에게 전해질 예정이라고 한다.

 

오지훈 학예연구사에게 기자가 가네코 후미코 지사의 훈장증을 복사라도 해놓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후손인 가네코 다카시 씨가 7월 23일, 박열의사기념관에 ‘훈장증’을 기증할 예정이라고 했다. 오지훈 학예연구사는 홀수 해에는 문경에서, 짝수 해에는 가네코 후미코 지사의 연구회가 있는 야마나시에서 각각 가네코 후미코 지사 추모회를 연다고 하면서 올해는 7월 23일 문경의 박열의사기념관에서 제93주기 추도식을 열 예정이라고 했다.

 

 

영화 ‘박열’로 독립투사 박열 의사의 삶이 재조명되어서인지 기념관을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고 했다. 오 학예연구사는 말했다. 한 달에 800명에서 1000여명 정도 방문하고 있으며 연간 16,000명 정도가 기념관을 찾는다고 했다. 기자가 찾아간 날도 가족단위의 방문자들이 기념관과 가네코 후미코 지사 무덤을 찾고 있었다. 일본인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스물세 살의 여성독립운동가 가네코 후미코의 무덤가에는 붉은 영산홍만이 말없이 피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