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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임청각 안주인 김우락 지사 이제야 서훈받다

김우락 지사 사후 86년만인 올 3월에 받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슬프다 우리 한국
이 좋은 호강산을
헌신 같이 버리고서
그 어디로 가잔 말고
통곡이야 천운이여
강산아 잘 있거라
다시 와서 반기리라 
    -김우락 지음, 해도교거사(海島僑居辭) 가운데-

 

더없이 푸근하고 좋은 강산(好江山)을 헌신짝 같이 버리고 낯설고 물선 타향으로 떠나는 심정이 뚝뚝 묻어나는 노래를 부른 이는 김우락(金宇洛, 1854 -1933) 애국지사다. 김우락 지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대통령)을 지낸 이상룡(1858 – 1932) 선생의 부인으로 이들은  안동의 99칸 대저택인 임청각 등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등을 세워 조국 독립을 위해 최일선에 섰던 분이다.

 

‘독립운동가의 아내’로만 취급 받던 김우락 지사가 독립유공자로 애족장 추서를 받은 것은 3.1절 100돌을 맞은 올 3월이다. 이는 김우락 지사가 세상을 뜬 뒤 86년만의 일이요, 남편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서훈(1962.독립장)일로부터 따져도 57년만의 일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고 하니 국난의 시기에 남녀 구별 없이 뛰어들어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면서도 여성들은 김우락 지사처럼 항상 수십 년이 지난 뒤에 서훈을 받기에 하는 말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다음 도표를 보면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추적하여 책을 쓰고 있는 필자로서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여성들도 남성과 똑 같이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니 그 예우도 같아야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다르다. 달라도 많이 다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여성에게 수여하는 독립운동 공로 훈장이 마치 ‘덤으로’ 주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는 부분이다. 이는 1962년 국가보훈처가 생겨나면서부터 ‘독립유공자’ 선정에 대한 철학 부재가 빚은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위 도표에서 이상룡 선생의 부인이 김우락 지사이고 이병화 선생은 손자이며, 허은 지사는 김우락 지사의 손자며느리다. 따라서 손자며느리가 김우락 지사보다 1년 먼저 받은 것이다. 이건 김우락 지사 집안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오광선 장군의 경우에도 부인 정현숙 지사는 1995년에 서훈을 받지만 따님인 오희영, 오희옥 지사는 어머니보다 5년 앞선 1990년에 서훈을 받는다.  그 과정이야 우리 일반인들이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서훈 체계’가 뒤죽박죽인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김우락 지사는 1854년 2월, 경상북도 안동부 임하면 내앞마을에서 아버지 김진린과 어머니 박 씨 사이에 4남 3녀 중 넷째(맏딸)로 태어났다. 그의 친정 오라버니인 김대락(1845 – 1915)은 안동에서 사재를 털어 항일국권수호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11년 전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 뒤 이상룡 선생과 함께 경학사 등을 조직한 독립운동가다.

 

김우락 지사는 19살에 명망 있는 부잣집 가문 출신의 남편인 이상룡 선생과 혼인하여 99칸 저택인 임청각의 안주인이 되었다. 일제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이 훌륭한 저택의 마나님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이 살았을 터였다. 그러나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는데 살은 깎이어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그러나 이미 내 저택을 빼앗고 또 다시 나의 처자를 해치려하니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무릎 끓어 종이 되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을 남기고  만주 망명을 감행한 남편의 뒤를 따라 가시밭길로 뛰어들었다.

 

허물어진 초가삼간에 잡초가 무성한데 / 여러 해 사람이 들지 않아 먼지 투성이네
문풍지가 우웅 우는데 어디나라 말인고/ 침상에서 몸이 얼어 다른 사람 몸이 되었네
솥이 차갑나니 소랑은 눈 밖에 먹을 게 없고/ 부엌이 비었나니 구천은 누울 섶도 없네
상천의 마음이 어찌 예사로운 것이랴/ 남아로 하여금 고생을 실컷 겪게 하는구나

*소랑이란 한무제 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된 소무(蘇武)를 가리키며 소무는 흉노의 황제 호의를 끝내 거부했다는 고사의 인물

 

이는 김우락 지사의 남편인 석주 이상룡 선생이 남긴 《석주유고 (하)》에 나오는 이야기다. 석주 선생의 만주 망명 생활은 눈물 없이는 마주 할 수 없는 독립운동의 대 서사시다. 남편이 조선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그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여 국내에서 모여드는 애국청년들을 훈련하는 동안 황무지를 개척하며 조국에서 몰려드는 청년과 애국지사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준 것은 김우락 지사를 포함한 여성들이었다. 

 

 

낯설고 물선 만주 망명을 감행한 남편과 함께 김우락 지사는 독립운동의 최일선에 서서 뛰면서도 ‘해도교거사’, ‘정화가’, ‘정화답가’, ‘조선별서’, ‘간운사’ 등의 가사를 지은 가사(歌辭) 작가이기도 하다. 안동의 양반 가문 출신인 김우락 지사는 18세기 중엽부터 생겨나 갑오개혁(1894) 이후까지 양반가 출신 여성들이 중심이 된 영남규방가사의 한 부류에 속하는 만주 망명생활 등을 표현한 가사를 많이 남겼다. 

 

배고픔을 이겨내면서 남편의 독립운동이 가능하도록 도왔던 여성들의 헌신은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동반자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김우락 지사는 1932년 6월, 남편 이상룡 지사가 길림성에서 숨지자 남편을 만주 땅에 묻고 가족들과 고국으로 돌아왔다. 타향살이 20여년만의 귀향이었다. 그러나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서의 삶은 귀국 이듬해 4월, 81살을 일기로 숨을 거둠으로써 한 많은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의 삶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말이 있다. 특히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든 남편과 아내의 마음은 이심전심 그 이상의 것이었을 것이다. 99칸 대저택인 임청각을 등지고 망명길로 떠났던 이상룡, 김우락 부부의 삶을 되돌아보기 위해 지난 18일(금) 안동 임청각을 찾았다. 함께한 이들은 ‘독립포럼 (대표 최용규)’ 회원들이었다.

 

1박 2일 동안 증손 이항증 선생의 안내로 유서깊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독립포럼' 회원들의 임청각 순례는 근처에 있는 도산서원과 경상북도독립기념관, 이육사문학관 등 안동과 경상북도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민족의 정기가 살아있는 대한민국 구국운동의 성지로 알려진 임청각은 이상룡(1962. 독립장), 김우락(2019. 애족장) 부부를 포함하여 이상동(애족장), 이봉희(독립장), 이준형(애국장), 이형국(애족장), 이운형(애족장), 이광민(독립장), 이병화(독립장), 허은(애족장) 등 16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가히 넘볼 수 없는 명문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이상룡, 김우락 지사 가족이 떠나고 난 뒤 임청각은 세인들의 기억에서 오랫동안 사라졌었다. 낡고 쇠락해가는 임청각을 지키기 위해  증손인 이항증 선생(78)은 혼자 외롭게 수십 년을 뛰었다. 다행히도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대한민국 노를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임청각을 새롭게 인식시켰다.

 

 

임청각의 주인인 증손 이항증 선생은, “남들은 대단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하지만 정작 나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해방 후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했다면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고아원을 전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뒤늦게나마 임청각에 대한 대통령과 국민적 관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일제에 의해 철저히 망가지고 훼손된 독립운동가의 본거지인 임청각이 다시 제 모습을 찾게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1519년(중종 14)에 지은 임청각은 사당과 별당형인 군자정, 본채인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가 영남산과 낙동강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한옥이다. 그러나 임청각은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중앙선 철도를 집 앞으로 관통하도록 설계하는 과정에서 집의 부속 건물이 헐려나가 현재는 60여칸 만 남아있다.

 

 

 

임청각(보물 제182호)에서는 ‘명가의 삶속으로 1박 2일’이라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Mark Iriving 의 저서에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서계의 건축물 1001”에 실릴 정도로 임청각은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적인 건물이자 조선시대 민간 가옥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양반가 집으로 500년을 간직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독립포럼 회원들과 하룻밤을 이 집에서 묵으면서 밤이 깊어 가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일제가 부설한 철도 위를 달리는 열차가 한밤중에도 굉음을 내고 달려 새벽에도 몇 번이나 잠을 깼다. 대한민국 최고의 독립운동가 집안의 민족정기를 깨부수려고 부설한 철도지만 이 집의 일가(一家)들은 일제의 흉계를 비웃듯 한국의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독립운동을 했다. 그 역사의 현장인 임청각 안주인 김우락 지사(2019년 애족장)의 뒤늦은 서훈에 큰 손뼉을 쳐드리며 임청각 순례를 마쳤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맑고 드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