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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교수의 환경이야기

‘색즉시공(色卽是空)’의 환경학적 해석

色은 변하여 空이 되나니 色에 너무 집착하지 말지어다
[이상훈 교수의 환경이야기 39]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불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경전은 무엇일까? 아마도 《반야심경(般若心經)》일 것이다. 한문으로 된 반야심경은 260글자에 불과하지만 모든 예불은 《반야심경》을 낭송하는 것으로 끝나니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반야심경》의 사상을 압축하고 압축하면 ‘색즉시공(色卽是空)’ 4글자가 남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색즉시공’을 이해하면 불교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색(色)은 오관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과 생각으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곧 형태가 있는 것, 눈에 보이는 사물, 추상적인 개념을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有)이 ‘색(色)’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空)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공(空)을 ‘상관성’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는 ‘비어 있는 것(虛)’, 또는 ‘없는 것(無)’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어 있는 것은 없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고서, 나는 공(空)을 무(無)로써 해석하고 싶다.

 

‘색즉시공’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色=空’이라는 것이다. 조금 달리 해석하여 色을 有로 보고 空을 無로 보면 有=無가 되며 이것은 얼핏 보아 명백한 모순이다. 어떻게 정반대 개념인 有와 無가 똑같다고 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색즉시공이란 형식논리를 따르는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모순이지만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진리의 표현은 가끔 역설적이며 모순되어 보이는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얻으려면 버려라’ 또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또는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 등은 형식상으로는 모순되어 보이지만 역설적인 진리라고 볼 수 있다.

 

과학적으로 ‘有=無’라는 명제를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다. 色을 질량(質量)이 있는 것, 空을 질량이 없는 에너지로 본다면 저 유명한 아이슈타인의 방정식 E=mC² 은 空=色과 형태가 똑같다. 空=에너지이고 色=질량이며, C²이라는 계수만 붙이면 공즉시색이 된다. 질량을 가진 입자가 형체가 없는 에너지로 바뀌고 또 에너지 덩어리가 질량을 가진 입자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상대성이론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이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데, 훌륭한 과학자는 딱딱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이 아니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다. 영국의 과학자인 디락(Dirac)이라는 사람은 有와 無의 관계에서 재미있는 이론을 발표했다. 디락에 따르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지구라든가, 달이라든가 하는 물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이 우주에는 ‘디락의 바다’라고 부르는 無가 충만해 있고, 그 바다에 구멍이 뚫리면 그곳에 有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보다 근원적이며 본질적인 것은 有가 아니고 無라는 주장이다.

 

물리학이 발달하면서 반야심경의 색즉시공이 과학적으로도 맞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 부처님이 색즉시공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E=mC²을 미리 알고서 이렇게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0세기의 과학적 발견이 이천오백 년 전에 말한 색즉시공과 일치한다는 주장은 불자들이 들으면 기분 좋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이 아닐까? 종교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는 그 영역과 표현방식 그리고 증명방식이 엄연히 다른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의 영역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때 여러 가지 혼란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기독교 성경에 보면 “겨자씨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작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표현이 식물학적으로도 옳고, 그러므로 성경은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조금의 오류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태로운 논법이다.

 

예수님을 훌륭한 식물학자로 여기기보다는 죄 많은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삶의 진리를 가르쳐 주신 분으로 여기는 것이 종교와 과학의 영역을 구분할 줄 아는 현명한 자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은 20세기에 와서야 밝혀진 이 우주의 구조를 이천오백 년 전에 벌써 갈파하신 훌륭한 천문학자로 간주하기보다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상에서 해탈할 수 있는 삶의 진리를 가르쳐 주신 분으로 간주하는 것이 바른 관점일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색즉시공에서 중요한 것은, 불경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변화의 개념이다. 변화의 개념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며 부처님의 유언에도 나온다.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은 “모든 것은 변한다. 쉬지 말고 정진하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변한다고 보는 불교의 관점은 서양철학의 관점과 대조가 된다. 서양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플라톤은 변하지 않는 이데아를 추구했다. 칸트의 경우 절대 변하지 않는 절대공간, 절대시간을 인정했다. 기독교의 하느님도 그 본체는 변하지 않는 절대자이다.

 

그렇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色의 속성은 변화다. 색즉시공이란 色이 변하여 空이 된다고 해석하면 쉽게 이해된다. 변화의 조건은 시간이다. 시간이 지나면 변화가 일어난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고희를 넘게 살아온 나도 시간이 더 지나면 한 줌 흙으로 변할 것이다. 내가 사는 작은 집도, 123층이나 되는 멋진 롯데월드타워도 시간이 지나면 변하여 흩어질 것이다.

 

환경학적으로 보면 우리가 비싸게 돈 주고 산 모든 상품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쓰레기로 변한다. 현재 많은 물건을 가진 사람은 결국 많은 쓰레기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상품 + 시간 = 쓰레기

 

인간 사회를 자세히 관찰하면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제도도 변하고 풍습도 변하고 사상도 변한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제안된 공산주의가 한동안 유행했지만, 이제는 쇠퇴하고 말았다. 공산주의의 상징이던 붉은 색이 이제는 새누리당(지금의 국민의힘 당)을 상징하는 색깔로 변하였다. 남녀 사이의 사랑도 변하기 때문에 수많은 대중가요가 사랑의 덧없음을 노래한다. 심지어는 모든 사고의 기본 틀이 되는 시간과 공간도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시간은 실제로 길어지거나 짧아지기도 한다. 공간 또한 늘어나기도 하고 줄기도 하며 심지어는 휘어지기도 한다.

 

인간의 성장단계를 살펴보면 어린아이의 사고 속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어린아이는 장난감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움직이지 않으면 자동차가 변한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울기만 한다. 色은 항상 色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른의 사고 속에서는 모든 色은 시간이 흐르면 空이 된다는 인식이 가능하다. 달리 표현하면 色+시간=空 이라는 것을 관념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는 색즉시공을 잊고 사는 것이 대부분의 중생이다.

 

내가 이해한 반야심경의 색즉시공은 이렇게 풀이할 수 있겠다. “色은 변하여 空이 되나니 色에 너무 집착하지 말지어다.” 색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 《반야심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색에 집착하면 괴로움이 된다. 색즉시공을 “그렇겠구나”라고 머리로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절실히 깨닫고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색에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는 적게 소유해야 한다. 환경적으로 사는 사람은 적게 소유하고도 만족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환경주의와 불교는 통하는 바가 있다.

 

나는 불교가 친환경적인 종교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