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안동립 기자] ▶봉래각(蓬莱阁, 5km) : 신선이 사는 전설 속 누각, 강북 제일각(江北第一阁)으로 1,061년 북송 때 건립, 단애산(丹崖山) 해안 절벽에 건설한 중국 10대 명루 가운데 하나이다. 여덟 명의 신선이 바다를 건넜다는 팔선과해(八仙過海) 전설과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의 '봉래'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진시황과 한 무제가 불로장생약을 구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하며, 바다 위로 신기루 현상이 자주 나타나, 인간선경(人間仙境)이라고 불린다. 백운궁(白雲宮), 삼청전(三清殿), 용왕궁(龍王宮), 천후궁(天后宮), 미타사(彌陀寺) 등과 바다 그리고 해안 절벽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멋진 풍광이다. 도교의 신선 사상이 품은 이상의 세계는 봉래, 여주, 방장으로 신선이 사는 섬이다. 봉래각에는 용왕신, 마조상(여자, 해신)을 주신으로 모셨고 또, 팔선전에는 8신선이 바다를 건넜다 하며, 주요 신으로 소동파, 여동빈을 모시는 전각이 있다. 도교는 신선처럼 살자는 뜻에서 화약과 연금술이 나와 불로장생을 기원하였다. 봉래각은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백성들이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살지 못하였는데, 이들의 정신적인 사상은 불교였지만, 불교의 이론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소동파의 문사향(聞思香) 향기를 들을 수 있는 동파여 (돌) 오감을 튕겨 가락을 듣는 이 (초) 홀로 그 얼마나 쓸쓸했기에 (달) 코호강 생각에 귀가 가렵나 (빛) ... 25.2.4. 불한시사 합작시 소동파(蘇東坡)에게 향(香)은 단순한 취미나 풍류의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난과 유배의 세월 속에서 스스로 지켜내는 하나의 수행법이자, 일상의 자리에서 도(道)를 잇는 조용한 공부였다. 옛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향을 통한 수행, 곧 ‘향공(香供)’ 혹은 ‘향관(香觀)’의 전통을 이어왔다. 향을 피우는 행위는 종교적 제의이면서 동시에 마음을 가다듬는 수련이었고, 향을 바라보고 맡고 사유하는 전 과정이 하나의 수행 체계였다. 향을 크게 나누어 보면, 연기로 드러나는 '향연(香煙)'과 보이지 않는 '향기(香氣)'가 있다. 향연은 눈앞에서 피어올랐다가 이내 흩어지는 찰나생멸의 형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생멸의 이치를 그대로 드러내는 무언(無言)의 설법과도 같다. 피어오르는 곡선과 흔들리는 흐름 속에는 미묘한 운율, 다시 말해 존재의 리듬이 깃들어 있다. 향연을 바라보는 일은 곧 무형의 형상을 관조하는 일이며, 삶의 흐름을 잠시 멈춰 세워 바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1945년생인 조영남은 음악대학을 다녔고 가수로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고등학교 때에는 그림을 잘 그려 미술반장이었다고 한다. 그는 23살 때인 1968년에 번안곡인 딜라일라를 불러서 단번에 유명 가수 대열에 끼게 되었다. 그는 음악과 미술을 동시에 잘하는 대표적인 재주꾼이다. 조영남은 스스로 자신을 화수(화가+가수)라고 말한다. 그는 미술과 음악의 같은 점과 차이점을 매우 명쾌하게 설명한다. “미술과 음악에 차이가 있다면 눈과 귀의 차이이다. 미술이 눈을 위한 기쁨조라면, 음악은 귀를 위한 기쁨조 같은 것이다. 나는 음악을 먼저 공부했기 때문에, 미술에 관한 공부를 따로 할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음악과 미술 두 가지를 다 해보면, 그 두 가지가 일란성 쌍둥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음악이나 미술이나 둘 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해주는 것이다. 내가 캔버스 위에 유화 물감으로 옛날 초가집이 있는 풍경화를 그릴 때의 감정이나, 윤용하의 '보리밭'을 내 목소리로 부를 때의 감정은 결국 동일하다. 초가집을 그릴 때도 기분이 아련하고 몽롱해져서 어린 시절 추억에 젖게 되고 보리밭을 노래할 때도 역시 기분이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제물포에 입항하기 일주일 전인 1884년 5월 21일 나가사키에서 조지 포크는 난생처음으로 조선 음식을 먹어본다. 그 소감을 고국의 가족에게 이렇게 전했다. 그리운 부모님, (…) 오늘 저는 조선 친구들을 보러 갔습니다.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하더군요(unboundedly glad to see me). ……그들이 제게 코리아 음식(Korean meal)을 대접했답니다. 매우 맛있었어요. 일반 외국인의 입에는 그게 이상할지 모르지만 저는 매우 좋았습니다. 일본 음식보다 유럽인의 구미에 더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세상의 여느 외국인과 달리 조선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극동지역의 모든 생활 방식에 이상할 정도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죠. 코리아 음식이 그렇게 좋다는 걸 발견하고 저는 무척 기뻤답니다. 걱정했거든요. 조선에서 음식 때문에 고생하지 않을까 하고요. 그런 걱정은 이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곳 나가사키를 떠나면 저는 정말 미지의 세상으로 들어갑니다. 이후로는 모든 편지가 생소한 장소에서 발송될 겁니다. 이 편지가 트렌턴호의 해군 소위로서 보내는 마지막 소식이 되겠군요. (…) 이제 우리는 조지 포크 그가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오늘날 한국 차문화계에서는 조선 말기 승려 초의 의순(草衣 意恂, 1786–1866)을 ‘한국의 다성(茶聖)’이라 부르는 관행이 거의 상식처럼 굳어져 있다. 각종 차 관련 서적과 행사, 언론에서도 ‘다성 초의’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이 과연 역사적ㆍ사상적으로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재검토가 필요하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다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해 왔으며, 차문화를 특정 인물의 성인화로 환원하는 관행이 오히려 한국 차문화의 본질적 흐름을 가린다고 보아왔다. 이 문제의식은 문화평론가 박정진의 "매월당 김시습을 다성으로"라는 논의와도 맞닿아 있다. 그는 한국 차문화의 상징 인물을 다시 묻는 과정에서, 초의 대신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차의 성인’에 더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후기 조선 중심의 통념적 서사를 넘어, 한국 차문화의 근원을 재사유하려는 문제 제기다. 먼저 짚어야 할 것은 ‘다성(茶聖)’이라는 개념이다. 중국에서 육우(陸羽)가 다성으로 불리는 것은 그의 저서 《다경(茶經)》을 통해 차를 하나의 문명사적 체계로 정립했기 때문이다. 곧 다성은 단순한 차 애호가가 아니라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어느 날 장자가 강가에서 낚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초나라 임금이 신하를 보내 장자에게 관직을 제안하지요. 초왕은 장자의 지혜와 명성을 듣고 그를 벼슬에 임명하여 자신의 치세에 도움을 받고자 했습니다. 장자는 신하의 제안을 듣고도 낚싯대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돌아보지 않은 채 묻지요. "제가 듣기로 초나라에는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있다고 하더군요. 죽은 지 이미 3천 년이 되었지만, 왕께서 그 거북을 신성시해 헝겊에 싸서 묘당 위에 모셔 두었다고 하는데 그 거북이 처지에서 보면 죽어서 귀하게 대접받기를 원했을까요?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랐을까요?" 신하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거야 당연히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랐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서 돌아가시오. 나도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고 싶으니까요." 세상은 참으로 시끄럽고 위험합니다. 임금이 되려면 화려한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하고 권력자가 되려면 찬란한 비단의 속박을 견뎌야 합니다. 어쩌면 진흙 속에 꼬리를 끌며 사는 삶은 세인이 덧없이 흘겨볼지라도, 이것이야말로 가장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자의 이야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번에도 서애학회 자문위원인 고교동기 류벽하가 《서애연구》 12권을 보내주었습니다. 《서애연구》가 발간되면 창간호부터 12권까지 꾸준히 보내주는 벽하 덕분에 저도 서애 선생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되었고, 나아가 서애 선생의 진정한 나라 사랑, 백성 사랑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존경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12권에는 권두 논문으로 최종호 교수의 <이순신의 류성룡 존모(尊慕)와 류성룡의 이순신 탁용(擢用)>이 실렸고, 일반논문으로 최진덕 교수의 <서애 류성룡의 통곡과 서애학의 본질> 등 5편의 논문이 실렸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중국 하준(何俊) 교수의 <류성룡과 중조(中朝)유학>이라는 논문이 실렸네요. 중국어로 쓰인 논문이라 저는 읽을 수가 없었는데, 마지막에 영문초록을 실어 그나마 대충 논문 요지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12권에서 특히 제 눈에 띄는 것은 백권호 서애학회장과 류을하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이 같이 쓴 글 <임란 종전 직후 전전(戰前) 체제로의 복귀와 그 결과>입니다. 서애는 1598년 주화오국(主和誤國), 곧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망쳤다는 누명을 쓰고 영의정에서 쫓
[우리문화신문=안동립 기자] (2025년 10월 27일(월)~11월 3일(월) 7박 8일, 총 이동 거리 2,260km) 글ㆍ사진 : 안동립(고조선유적답사회 회장, 동아지도 대표) 참여자 : 안동립, 고재성, 김종택, 김지환, 문부산, 배국환, 백은희, 엄수정, 이우언, 이일걸, 장형순, 정운채, 황현규, 황현득, 안내 염용철, 손광휘 고(옛)조선유적답사회, 다음 카페 : http://cafe.daum.net/map4u7 2025년 세 번째 답사인 '전설적인 인물을 찾아 떠나는 여행'으로 7박 8일 동안 중국 산둥성 일주를 하였다.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산동성의 이번 답사는 태산, 노산 등산과 장보고, 소동파, 강태공, 치우 천황, 태호 복희 씨, 순임금, 공자, 제갈량, 조조, 진시황 등 40여 명의 위대한 인물의 사상과 정신을 현장에서 직접 느끼고 배우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1일 차 : 2025년 10월 27일 월요일 아침 8시 인천국제공항 제1 여객터미널 L카운터에 모였다. 제주항공 7C 8501편으로 인천공항에서 10시 50분 출발하여 50분 만에 중국 위해 공항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마량만(馬梁灣)에서 사람만 배타나 말도 배타네 (빛) 제주에서 타고 마량에 내려 (돌) 말들처럼 늘어선 저 까막섬 (달) 만주까지 달려가야 할 자리 (초) ... 25.1.30. 불한시사 합작시 장흥의 사자산 기슭에 자리 잡은 강대철의 토굴조각을 구경 간 지가 벌써 한참 지났다. 불한시사 시벗들이 몰려가 그가 10년에 걸쳐 파고 깎고 꾸며놓은 신비스런 조각토굴을 둘러보고, 다 함께 바닷바람을 쐬자고 가보았던 곳이 마량이다. 장흥에서 비롯한 탐진강을 따라 ‘수문리’를 거쳐 오면서, 숨어 사는 조각가 강대철을 빗대어 “숨은 이가 여기 있다고 수문리인가” 보다는 재담으로 터졌던 함박 웃음소리가 귀에 어린다. 마량은 여러 곳에 지명으로 남아있지만, 이곳은 제주도에서 키운 말들이 배에서 내리던 곳이었다고 한다. 마량이란 말 마(馬) 자와 나무다리 량(梁) 자가 합쳐져서 ‘말이 건너는 나무다리’란 뜻이다. 포구의 표지판을 보니, 이곳은 조선시대에 군대가 머물던 전략요충지였다고 한다. 태종 임금 때에 마두진이 세워졌고, 정유재란 뒤에는 거북선 한 척이 묵었다고 한다. 전장을 누빌 말들이 씩씩하게 나무다리 마량을 건너오던 모습은 둘레의 까막섬을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며칠 후, K 교수는 미술대학의 ㅅ 여교수와 미녀식당에서 점심을 같이하게 되었다. ㅅ 여교수가 나이가 한 살 더 많고 ㅅ 여교수의 남편도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서 서로 아는 사이였다. 여교수와 식사할 때는 오해를 피하려고 2:1로 만나야 한다. 그날 K 교수는 화학공학과의 아 교수와 함께 나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은 미스 K가 마침 식당에 없었다. 세 사람은 스파게티를 먹으면서 주로 그림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K 교수는 그림에는 재능도 없고 관심도 없었지만, ㅅ 여교수가 말하는 것을 열심히 들어주었다. 평소에도 말이 없는 아 교수는 그날도 별다른 말이 없이 조용하였다. 독일에서 유학한 아 교수는 봄가을 1년에 두 번은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간단다. 아 교수는 R석 표를 사서 부인과 같이 가볼 정도로 부유하고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아 교수는 그림에 대해서는 K 교수처럼 문외한이었다. 그날 대화는 ㅅ 여교수가 이끌어갔다. 우리나라에서 중학교 학력 이상의 사람치고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라는 네델란드 출신의 화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는 유명한 자화상 그림을 그린 두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