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조선 후기 차문화 부흥을 이끈 인물로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를 빼놓을 수 없다. 초의의 본명은 의순(意恂)으로, 전라남도 무안에서 태어나 젊은 나이에 출가하였다. 이후 해남 대흥사 일지암(一枝庵)에 머물며 선 수행과 함께 차를 통해 마음을 닦는 삶을 평생 실천하였다. 그는 《동다송(東茶頌)》을 남겨 차의 제다법과 정신을 정리하였고, 차를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수행의 길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된다. 초의선사의 삶에 깊이 새겨진 또 하나의 이름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다. 조선 후기 최고의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였던 추사는 제주 유배 시절 극심한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지냈다. 그에게 초의가 보내준 차는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세상과 이어지는 숨줄과도 같았다. 추사는 차를 기다리는 마음을 편지에 담아 이렇게 적었다. “차 시절이 아직 이른 건가요? 아니면 이미 차를 따고 있는 건가요. 몹시 기다리고 있소. '일로향실(一爐香室)' 편액은 적절한 인편을 찾아 보내도록 하겠소.” 대흥사에 남아 있는 이 글씨는 오늘날까지도 한국 차문화의 정신적 상징처럼 회자된다. 이 편지 속 문장에는 차를 향한 갈망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추모시] 새벽을 불러온 별의 눈동자, 영원한 청년에게 윤동주 사후 81년, 시비건립 31돌에 부쳐 - 한꽃 이윤옥 북간도의 푸른 별빛을 품고 연희의 교정을 거닐며 당신은 가장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마음의 등불을 밝혔습니다. 식민지 청년의 고뇌를 자아성찰의 밑거름 삼아 간절하게 써 내려간 당신의 시편들은 조국의 아픔을 딛고 일어설 희망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81년 전 후쿠오카 감옥의 차가운 철창도 당신이 꿈꾸던 조국의 아침을 가둘 순 없었으며 그 고귀한 헌신은 마침내 우리 머리 위로 찬란한 광복의 하늘을 열어주었습니다. 동지사(同志社)에 세운 시비가 서른한 번의 계절을 지키는 동안 당신의 문장은 슬픈 한(恨)을 넘어 우리 겨레를 하나로 묶는 따스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스물일곱 청춘의 못다 핀 꿈은 이제 수천만 송이 무궁화로 피어나 이 땅의 자유를 노래합니다. 81주기를 맞는 오늘 우리는 슬픔 대신 감사를 눈물 대신 내일을 향한 다짐을 담아 당신을 부릅니다. 당신이 사랑한 별처럼 우리 또한 서로의 길을 비추는 영원한 희망이 되어 살아가겠습니다. [追悼詩] 夜明けを呼ぶ星の瞳、永遠の青年へ ― 尹東柱(ユン・ドンジュ)没後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지 포크는 1884년 11월 7일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본다.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렸다. 그림 곁에 관련 정보를 세밀히 기록해 놓았다. 모자 부분의 끝에 달린 고리의 도안이 특히 인상적이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과학성과 미학을 나름대로 갖추고 있는 작품이 아닌가 한다. 포크는 이 날짜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은진(unjin) 고을에서 미륵상으로 가는 길은 대체로 북쪽 방향이다. 풀이 자란 언덕을 넘어가 굽이진 길로 5리 거리였다. 언덕에 무덤이 매우 많았고 다랑이논들도 보였다. 차츰 내리막길로 내려가 들가에 이르렀다. 언덕 정상 부근에는 화강암 바위들이 솟아있다. 미륵상은 평야 위로 솟은 동산의 100피트 30m가량 높이에 세워져 있다. 미륵상의 이마에는 황금 명판이 새겨져 있다. 지름이 10인치(25cm)는 되어 보였다. 그 가운데에 수정구슬이 박혀 있다. 모자 부분이 무척 크고 아래 면으로 조각이 잘 되어있다. 나는 6장의 사진을 찍었다.” 다음에는 사진을 감상해 본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초원의 노래 - 타마노 세이조의 조각 ‘초원의 시’를 보며 - 이윤옥 해 질 녘 나지막한 언덕 위 먼 길 돌아온 구름 한 자락이 아이의 작은 어깨에 가만히 내려앉아 동무가 됩니다. 옻칠을 입히고 삼베를 짜듯이 차곡차곡 쌓아 올린 시간의 결은 먼 옛날, 어느 화가가 바위에 새겨 넣은 투박하고도 선한 이웃의 얼굴을 닮았습니다. 악보도 없는 바람의 노래를 아이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짚어보고 초원은 그 숨소리에 맞춰 푸른 물결을 흔들어 화답합니다. 화려한 빛깔 하나 없어도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그 모습이 고단한 하루를 보낸 우리에게 "괜찮다, 참으로 애썼다"며 등을 토닥이는 따스한 손길이 됩니다. 기교 없는 진심이 빚어낸 평화 아이가 응시하는 먼 지평선 끝에는 잊고 살았던 우리의 가장 순수한 계절이 꽃처럼 피어나고 있습니다. -------------------------------------- 草原の歌 — 玉野勢三の彫刻 『草原の詩』に寄せて 詩:李潤玉(イ・ユノク) 日の暮れゆく なだらかな丘の上遠き道を渡ってきた ひとひらの雲が幼子の小さき肩に そっと舞い降り心を通わす友となります。 漆を塗り 麻布を編むように幾重にも積み上げられた 時の重なりは遠い昔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방원이 정도전을 죽인 까닭 가운데 하나로 ‘정도전의 요동 정벌 추진’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요동 정벌을 한다면 명나라와의 충돌은 불가피할 텐데, 정도전은 왜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을까요? 원나라가 명나라에 밀려 북쪽으로 쫓겨 간 뒤, 요동은 무주공산이 되었습니다. 명나라도 새로 나라를 세워 안팎으로 나라 기틀을 잡는데, 힘을 쏟느라고 아직 요동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기에는 힘이 달린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요동은 원래 우리의 선조 고구려와 발해가 차지하고 있던 땅이라서, 명나라로서는 고려나 뒤를 이은 조선이 이를 차지하려 들까 봐 꽤 신경이 쓰였나 봅니다. 이미 공민왕 때인 1370년 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요동을 정벌하고 돌아온 일도 있으니까요. 우왕 14년(1388)에도 명나라는 공민왕이 회복한 철령위의 반환을 요구하여, 이에 반발한 고려가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무산되기도 하였지요. 이제 친명정책을 추구하는 조선이 건국되었으니 국경 분쟁은 없을 줄 알았는데, 명나라는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자꾸 시비를 겁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자마자 명나라에 조선 건국의 승인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255) 승정원은 ‘목구멍과 혀(喉舌)’에 해당하는 부서로, 왕명 출납을 맡아 옳은 것은 아뢰고, 부당하다고 여기는 것은 거부하였으니, 그 임무가 막중하다. 개국 이래로 승지에 임명된 경우 사람들이 신선처럼 우러러 보았으며, 세속에서는 은대학사(銀臺學士)라고 일컬었다. 시중드는 하인들도 모두 은패(銀牌)를 차고 자색 옷을 차려 입고 스스로 영광스럽게 여겼다. 순암집》- 승정원. 오늘날로 말하면 비서실과 같은 관청이다. 임금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할 수 있어 소속 관원들의 자부심과 권한도 대단했다. 승정원은 관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면서도,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올곧게 왕명을 전달하는 청렴함과 과중한 업무를 이겨낼 수 있는 체력이 요구되는 곳이기도 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승정원일기번역팀이 펴낸 이 책, 《후설》은 승정원일기와 승정원에서 일하던 관원들을 자세히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보다 덜 알려져 있으면서도 분량이나 내용에서 뒤지지 않는 승정원일기를 조명하는 책이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작성한 일종의 ‘국정일기’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부처별 보고와 이에 대한 임금의 업무지시를 고스란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다산의 사의재(四宜齋) 목민심서의 산실인 사의재 (돌) 주막집 사랑방에서 바뤘나 (빛) 생각과 용모 말과 행동으로 (달) 유배의 길에도 의를 세웠네 (심) ... 25.1.30. 불한시사 합작시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1801년 신유박해의 여파로 전남 강진으로 유배되어, 처음 약 4년 동안을 강진 읍내의 한 주막집 사랑방에 머물렀다. 벼슬에서 물러나 하루아침에 죄인의 몸이 되어 낯선 남도의 객지 주막방에 기거하게 된 그의 처지는, 조선 후기 지식인이 겪은 정치적 박해와 시대적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바람을 막는 허름한 방, 떠도는 장정과 나그네가 오가는 주막집 한쪽 편에서 다산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보다 오히려 마음을 다잡고 학문과 성찰에 더욱 몰두하였다. 훗날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이라 불리는 수많은 저술의 씨앗 또한 이 시기의 고독한 사색과 절제된 삶 속에서 잉태되었다. 이 주막집 사랑방 문 위에 걸린 현판이 바로 ‘사의재(四宜齋)’이다. 사의재란 ‘네 가지를 마땅히 하도록 경계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다산이 유배 생활의 혼란과 절망 속에서도 스스로 다스리기 위해 세운 삶의 규범이자 학문적ㆍ윤리적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내친김에 K 교수는 술에 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K 교수는 술을 많이는 못 마셔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매우 즐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시성(詩聖) 두보는 “사람의 마음을 너그럽게 해 주는 데는 술이 제일이요, 사람을 흥겹게 해 주는 데는 시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라고 했다. 시선(詩仙) 이태백은 “술 석 잔이면 대도(大道)에 통하고 술 한 말이면 자연과 합일하는 경지로 접어들 수 있다”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술에 관한 기록은 부여시대 영고라는 제천의식에서 술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 이미 소주가 등장했고, 조선시대에는 180종의 술이 있었다. 현재까지 전하는 민속주로는 문무백관과 사신접대용으로 쓰인 경주 법주를 비롯한, 말술을 자랑하는 사람이라도 석 잔을 못 넘기고 취한다는 면천 두견주, 대동강 물로 빚어야 제맛이 난다는 문배주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주이다. 외국의 유명한 술을 보면, 마시면 천일 동안 깨지 않는다는 중국의 천일주, 55도인데도 순하게 느껴지는 달고 아름다운 마오타이주, 위스키의 자존심 부캐넌스, 빈 병값만 7만 원 하는 코냑 루이13세 등이 유명한 술에 속한다. 술을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우리문화신문은 이번 주부터 차(茶)문화와 관련된 연재를 새롭게 시작합니다. 해당 연재의 필자는 '한국불한선차회' 라석 손병철 박사께서 맡아 주시기로 하였습니다. 손병철 박사는 오랫동안 차와 함께 한 시인으로 글뿐이 아니라 사진 또는 삽화도 함께 맡아주시기로 했습니다. (편집자 말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표적 사상가이자 행정가, 학자다. 그는 백성을 위한 정치와 제도개혁을 꿈꾸었고, 유배라는 혹독한 현실 속에서도 학문과 사색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저서 《목민심서》 ,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은 오늘날까지도 공공 윤리와 행정 철학의 고전으로 읽힌다. 특히 강진 유배 시절에 머문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그는 학문적 성취뿐 아니라 차(茶)와 자연을 벗 삼아 마음을 다스리고 삶을 성찰하는 정신적 경지를 보여주었다.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은 다산이 유배 기간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과 교류하던 공간이다. 초당 뒤편으로는 숲이 둘러 있고, 약천(藥泉)이라 불리는 샘물이 흐르며, 차를 달이던 다조(茶竈, 착부뚜막)의 흔적도 전해진다. 이곳에서 차는 단순한 음료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사람의 단점(短點)이 보이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단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향해 손가락질할 때 하나는 타인을 향하지만, 세 개가 나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린 유독 누군가의 결점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것을 집착하듯 관찰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불편함과 불만을 느끼게 되지요. 하지만, 이 감정의 근원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불편함은 상대방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서 부딪히는 그림자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마치 그림자가 물체를 따라다니듯, 타인의 단점은 내가 가장 숨기고 싶거나 아직 해결하지 못한 나의 약점을 투사합니다.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탓하기 바쁜 순간, 정작 내 눈 속에 있는 커다란 들보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의 단점을 너무 잘 알고, 너무 싫어하기에, 그것을 가진 타인을 보면 견딜 수 없는 불쾌감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우린 남의 단점을 비난하고 깎아내리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그 모습을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누군가의 조급함이 나를 괴롭힌다면, 혹시 내 안에 불안과 조급함을 숨기려 애쓰는 부분이 있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