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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재미(在美)국악원, 윌셔 이벨의 1,200석을 꽉 채워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498]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70년대 초, L.A에 <재미국악원>이 발족하여 3.1절이나, 광복절 등 국가적 행사, 교포사회의 문화 행사, 그리고 <연꽃축제>와 같은 아시아인의 행사 등에 초청되어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정작 자체적인 정기연주회는 미루어 오다가 궁중과 민속의 악무 10여 종목을 준비해서 <창립기념연주회>를 갖게 되었는데, 부래들리 L.A 시장의 축하 인사와 정부가 파견하는 문화 사절도 오기 어려운 시기에, <재미국악원>의 역할이나 이에 대한 기대가 높아간다는 총영사의 격려사도 소개하였다.

 

그렇다. <재미국악원>의 정기 연주회가 있던 1976년 당시의 한국은 지금과 같이 잘 사는 나라가 아니었다. 또한, 70년대는 외국을 여행한다는 그 자체가 어려웠던 시기였다.

 

국악학교를 졸업한 젊은 국악인들이 미국 L.A에 모여 살게 되면서 한국의 전통음악을 미국 문화의 일부로 키워가려는 시동을 걸게 된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미국은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사는 다민족 사회다. 그래서 각 소수민족의 문화를 존중하고 키워 감으로써 미국문화의 다양성이 미국의 국력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리라. 이것이 곧 미국의 정책이 되어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제자들이 모여 미국 땅에 <재미국악원>을 세우고, 정기연주회를 갖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당시 국악고교 김기수(金琪洙) 교장은 다음과 같은 눈물겨운 격려사를 보내 기쁨을 함께 했다.

 

“<재미국악원>이 나성에 설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어느 자리에서나 보란 듯이 자랑을 서슴치 않았다. 중국이나 일본의 음악이 그곳에 상륙한 지는 이미 오래라고 들었는데, 세계 어느 민족음악에도 손색이 없는 우리 한국의 전통음악은 왜 이제야 미국 땅에 상륙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개탄과 선망이 뒤섞이던 그 날의 심경을 옛말 삼아, 오늘날엔 떳떳이 그 기치를 드높이게 되었으니 한껏 휘날려 보아야겠다.

 

청운의 뜻을 품고 면학의 길을 떠났던 몇몇 약관의 유학도들이 주축이 되어 오늘을 형성하였다는 엄연한 사실이야말로 국악의 발달사를 장식할 한 면의 특기사항인 동시, 나라를 사랑하고 전통문화 수호의 굳건한 실천인 것이다. 벅차게 급한 마음은 단숨에 뛰어가라 하건만, 태평양이 가로막고 있으니 이 안타까움을 어찌하랴. 구성원들의 면면들이 기라성 같구나. 모두 다 일당백(一當百)의 존재들이니 의심없이 열연함으로써 크게 성공할 것을 믿을 따름이다.”

 

먼길 떠나있는 자식들을 사랑하는 어버이의 마음이 담겨있는 애절한 내용에 <재미국악원> 구성원들은 감사의 눈물만을 흘렸다고 한다. 참고로 이날 출연한 참여자들은 이동엽(대금), 박종길(대금), 박종대(대금), 이태준(피리), 이동형(피리), 손봉삼(해금), 박헌린(해금), 김민숙(해금), 문영삼(가야금), 김동석(가야금), 박희자(가야금), 김경란(가야금), 장희숙(무용), 김경희 (무용) 등이었다.

 

 

이들은 1부에 수제천, 춘앵전, 검무, 대금 독주, 부채춤, 가야금 병창, 승무, 북춤, 그리고 2부에는 관현악으로 천년만세, 화관무, 가야금 독주, 창작무용 (봄처녀), 민요합주, 풍물굿 등 다양한 종목으로 2시간에 걸친 큰 공연이었다.

 

당일, 윌셔이벨 극장은 1,200석 좌석이 교포와 외국인들로 만석이었다. 아마도 고향땅을 떠나 온 교포들이 고국의 전통음악에 목말라 있다가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은 국악인들로 구성된 <재미국악원> 단원들이 잔치마당을 마련했다고 하니 대거 방문해 주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야말로 이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쾌거를 올린 음악회였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그 후, 매년 정기 연주회는 물론이고, 강습회와 퍼레이드 그리고 다양한 공연도 계속되었다.

 

1977년 당시, 한국일보 송년 특집에 실린 김동석 교수의 글을 통해서 당시 음악문화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종종 신문에서 <문화 사절>이라는 큰 제목을 대할 때마다 내 나름대로 깊은 생각에 빠지곤 한다. 언어가 필요치 않은 외교 - 이것이 음악이요, 무용이요, 또한 다른 장르의 예술일진데,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으로 제나라 대사 구실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귀중한가는 남에게 칭찬과 찬사를 받을 때, 더 느끼게 되는 법이다. 국악과 민족무용은 우리 민족만이 향유하고 빛을 내야만 하는 것이지, 다른 누구도 내 것을 빛내어 주지는 않는다. 자칫 명맥을 잃을 뻔했던 우리의 전통음악도 이제는 민족문화의 중흥운동으로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특히 학생들에게 국악교육을 시켜 새 원동력이 되게 하고 있음은 천만다행이다. 그들 중 일부가 미주 땅으로 이주해 와, 이역만리에서 더 큰 포부를 지니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한 흐름이요, 뻗어나는 한민족의 힘이 아닐까 한다.”

 

이것은 단지 젊은 국악인들이 미주에 뿌리를 내리는 시작의 얘기일 뿐이다.(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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