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세상이 온통 ‘빠름’이라는 홀림에 걸린 듯합니다. 인공지능이 눈 깜짝할 새 답을 내놓고, 짧은 움직그림들이 우리의 눈길을 훔쳐가는 때입니다. 남들보다 한발 앞서지 못하면 뒤처질 것 같은 마음졸임에, 우리는 늘 숨 가쁘게 열매만을 쫓습니다. 당장 눈에 띄는 바뀜이 없으면 허탕이라 단정 짓고, 어제와 같은 오늘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를 들볶곤 합니다. 서른 해 가까이 토박이말의 숨결을 지켜온 저는, 오늘 이 조급한 발걸음들 앞에 아주 고요한 낱말 하나를 놓아두려 합니다. 바로 ‘시나브로’입니다. 본디 ‘시나브로’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쌓였던 눈이 햇살에 녹아 흐르는 소리, 철이 바뀌며 나뭇잎의 빛깔이 옅어지는 모습처럼, 온누리가 일구어내는 가장 참된 속도를 말합니다. 거창한 외침도, 요란한 소문도 없이 세상의 밑바탕을 바꾸어 놓는 끈덕진 힘이 이 말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바뀜’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시나브로’가 일구는 놀라운 일을 믿지 않습니다. 한 번의 투자로 큰 부자가 되길 꿈꾸고, 한 달의 공부로 실력이 부쩍 늘기를 바랍니다. 거치는 길이 켜켜이 쌓여야 비로소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날마다 보거나 듣는 기별 가운데 이웃 사이의 험악한 다툼을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립니다. 위층에서 들리는 쿵쾅거림, 앞차의 갑작스러운 끼어들기에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날을 세웁니다. 상대방이 어떤 사정이 있는지, 어떤 마음인지 살피기보다 내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로 거친 말을 쏟아내기 바쁩니다. 서른 해 가까이 우리말을 갈고닦아 온 저는, 오늘 이 메마른 누리에 함께 생각해 볼 낱말 하나를 다시 꺼내 봅니다. 바로 '알뜰하다'입니다. 우리는 흔히 '알뜰하다'고 하면 돈을 아껴 쓰는 것만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 말의 참 알맹이는 '정성이 지극하고 속이 깊다'는 데 있습니다. 옛 어른들은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을 대할 때도 "참 알뜰하게 챙긴다"는 말을 쓰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겉치레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 구석구석까지 정성을 다해 살핀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내 지갑 속 돈은 '알뜰하게' 아끼면서,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알뜰하게' 살피는 데는 너무나 짭니다. 이웃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려 들기보다 내 불편함을 먼저 내세우고, 상대의 처지를 정성껏 헤아리기보다 내 화풀이를 먼저 합니다. 사람을 아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지 17년 뒤인 1460년(세조 6년)에 정책 기관인 예조에서 《훈민정음》을 문과 시험 과목으로 채택하자고 건의하는 일이 일어났다. 사대부들은 세종대왕 사후 하급 관리 시험에서 《훈민정음》을 퇴출했다. 하지만 세조는 세종대왕의 뜻을 이어받아 한글 보급 정책을 다시 추진하였다. 그 뒤 실생활에서 한글이 유용하게 쓰이자, 한글 사용을 반대했던 사대부들도 한글을 모르면 불편한 상태가 되었고,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 사대부들은 《훈민정음》을 정식 문과 시험 과목으로 채택하자고 청했다. 세종대왕 때에는 세종이 직접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으로 채택했지만, 세조 때에는 예조에서 자발적으로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으로 채택한 것이다. 더군다나 하급 관리를 뽑는 시험이 아닌 문과 시험 과목으로 채택한 것이다. 이 일을 통해 《훈민정음》은 명실상부한 고급 관리 시험 과목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Selecting High-Ranking Officials Through Hangeul Seventeen years after King Sejong had created Hangeul, in 1460 (the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날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많은 기별들을 보고 듣기가 무섭습니다. 서로 손가락질하고 깎아내리거나 상대방이 한 실수나 작은 잘못을 이 잡듯 뒤져서 누리에 까발리는 모습들 때문입니다. 나랏일을 서로 꼼꼼히 살피겠다는 다짐은 간데없고, 오직 상대방을 무너뜨릴 빈틈만 돋보기로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서른 해 가까이 우리말을 갈고닦아 온 저는, 오늘 이 서글픈 바람빛 앞에서 아주 날카로운 낱말 하나를 꺼내 들었습니다. 바로 '톺다'입니다. 본디 '톺다'는 삼베를 짤 때 껄끄러운 껍질을 훑어내어 부드럽게 만드는 정성스러운 손길을 뜻했습니다. 또는 험한 산길을 한 발 한 발 더듬으며 꼭대기를 향해 나아가는 끈질긴 마음을 말하기도 했지요. 참으로 귀하고 단단한 마음이 담긴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남을 마주하는 '톺기'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상대의 참마음을 살피는 대신, 상대의 못난 모습과 허물만 '톺아'냅니다. 먼지 하나라도 더 찾아내려 눈을 부라리고, 빈틈만 보이면 샅샅이 뒤져서 기어이 상처를 내고야 마는 칼날 같은 말들. 이제 '톺다'는 누군가를 돕기 위한 손길이 아니라, 누군가를 끌어내리기 위한 '말의 갈고리'가 되어버린 듯합니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이건자 명창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꾸민 제13회 <경기산타령 발표회> 이야기를 했다. 이건자 명창은 서울 성북구가 자랑하는 국가무형문화유산 <선소리 산타령>의 ‘전승교육사’로 활동하는 국악인이다. 국악계에는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국가로부터 해당 분야 전승교육사로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은 말처럼, 그렇게 쉽고 간단한 과정이 아니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성북구에 개인 소리 학원을 개원하여 찾아오는 제자들과 함께 산타령을 부르고 있다. 지난해도 해를 보내는 길목에서 모처럼 마련된 <이건자 명창의 소리판>이 지역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 주었다고 얘기했다. 이번 주에는 다시 서도소리로 돌아가서 서도소리의 정석을 담은 민요음반이 유지숙에 의해 세상에 소개되어 그 관련 이야기를 시작해 보고자 한다. 항상 서도소리의 새로운 자료를 찾아다니고, 또한 입수한 자료들을 매만지는 유지숙 명창과 그의 후배들에게 격려의 말을 보낸다. 서도민요로는 현재 다양한 형태의 노래들이 전해오고 있으나. 이 음반에서는 <긴아리>, <자진아리>, <산염불>, <자진염불>,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창문을 열면 어느새 바람의 끝이 부드러워졌음을 느낍니다. 벌써 봄을 맞이하기 위해 가게 안팎 바닥을 물청소하고, 겨우내 덮었던 두꺼운 이불을 빠는 이웃들의 바쁜 이야기들이 곳곳에서 들립니다. 먼지를 털어내고 물을 뿌리는 그 모습만 봐도 가슴 속이 탁 트이는 기분입니다. 이처럼 지저분한 것을 없애거나 상태를 깨끗하게 바꾸는 일을 두고, 우리 할머니들은 참 살가운 말을 쓰셨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께 알려드릴 말은 바로 '가시다'입니다. 우리는 흔히 "입가심한다"거나 "매운 기운이 가셨다"는 말을 자주 씁니다. '가시다'는 단순히 닦아내는 것에서 나아가, 물로 깨끗하게 헹구어 내어 원래의 맑은 상태로 되돌리는 힘이 있습니다. 얼룩진 그릇을 맑은 물에 '가실' 때의 그 가뿐한 소리를 떠올려 보세요. 더러운 것뿐만 아니라, 우리를 힘들게 했던 나쁜 기운이나 걱정거리까지도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듯한 시원함이 담겨 있습니다. '세척'이나 '제거' 같은 한자말과는 다른 우리말만의 개운한 맛입니다. 묵은 마음을 가시고 새봄을 맞이하세요 집안 구석구석의 먼지를 가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의 묵은 때를 가시는 일입니다. 겨우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하얀 눈 위를 거침없이 가르며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는 한 소녀의 모습에 온 국민이 숨을 죽였습니다. 열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세계 정상에 우뚝 선 스노우보드의 최가온 선수 이야기입니다. 자기 키보다 몇 배는 높은 눈 벽을 타고 날면서도 얼굴에는 두려움보다 즐거움이 가득했습니다. 어디 최가온 선수뿐인가요? 띠동갑도 넘는 선배들을 앞에 두고도 싱글벙글 웃으며 매서운 공을 날리던 탁구의 신유빈 선수, 무릎이 까지고 피가 나도 끝까지 셔틀콕을 쫓아 마침내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배드민턴의 안세영 선수도 떠오릅니다. 이 어린 선수들을 보고 있으면 입안에 맴도는 딱 알맞은 우리 말이 있습니다. 바로 '안차다'입니다. '안차다'라는 말을 가만히 소리 내어 읽어 보세요. 겉으로만 센 척하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 옹골차게 꽉 들어차서 웬만한 바람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단단함이 느껴집니다. 말집, 사전에서는 이 말을 '겁이 없고 야무지다'라고 풀이합니다. 덩치가 작아도, 나이가 어려도, 상대가 아무리 무시무시한 실력자라도 기죽지 않고 제 실력을 다 발휘하는 모습이지요. "그 녀석 참 안차게 대드네!"라는 말속에는, 작지만 결코 얕볼 수 없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어제 새벽 밀라노의 얼음판 위에서 우리 선수들이 보여준 모습은 그야말로 하나된 마음의 본보기였습니다. 마지막 바퀴에서 김길리 선수가 번개처럼 튀어 나가며 금메달을 따냈을 때, 온 나라가 환호성으로 가득 찼지요. 하지만 그 열매는 마지막 주자 혼자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앞에서 심석희 선수가 최민정 선수를 힘차게 밀어주며 제 힘을 모두 실어준 덕분이었고, 함께 땀 흘린 선수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버텨준 덕분이었습니다. 이렇게 여럿이 엉켜 있는 곳에서 우리 편의 자리를 정하고 등수를 나누는 것을 우리 토박이말로는 '가름하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승부를 결정지었다"는 말을 씁니다. 하지만 '가름하다'라는 말을 가만히 읊조려 보세요. 엉클어진 실타래를 한 올 한 올 풀어내듯, 혹은 뒤섞여 있던 여러 선수 사이에서 우리 선수들의 자리를 시원하게 나누어 정해놓는 기분이 듭니다. 어제 경기는 그야말로 '가름'이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누가 1등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여러 나라 선수들이 엉켜 있었지만, 우리 선수들의 믿음이 마침내 승패를 가름했습니다.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이끌어준 그 뜨거운 손길이 엎치락뒤치락하던 흐름을 딱 끊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2월 19일)은 겨울 동안 꽁꽁 얼었던 냇물이 풀리고 눈이 녹아 비가 된다는 스물네 철마디(절기) 가운데 하나인 '우수'입니다. 한자로는 '비 우(雨)'에 '물 수(水)'자를 씁니다. 이때가 되면 추운 북쪽지방의 대동강물도 풀린다고 했지요. 아직 추위가 남아있지만, 저 멀리 산모퉁이에는 마파람(남풍:南風)이 향긋한 봄내음을 안고 달려오고 있을 겁니다. 바르고 아름다운 우리말 지킴이 <토박이말바라기>에서는 이 오랜 철마디(절기)를 조금 더 살가운 이름을 하나 더 지어 '싹비'라고 합니다. 예부터 이 싹비 때 나누는 인사에 "꽃샘잎샘에 집안이 두루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이 있으며 "꽃샘잎샘 추위에 반늙은이(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도 있지요. 이 꽃샘추위를 한자말로는 꽃 피는 것을 샘하여 아양을 떤다는 뜻을 담아 화투연(花妬姸)이라고 합니다. 봄꽃이 피어나기 전 마지막 겨울 추위가 선뜻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앙탈을 부려보기도 하지만 봄은 이제 시골집 사립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이때쯤 되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물이라며 한양 상인들에게 황소 60 마리를 살 수 있는 4천 냥을 받고 대동강을 팔았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오늘(2월 19일)은 겨울 동안 꽁꽁 얼었던 냇물이 풀리고 눈이 녹아 비가 된다는 스물네 철마디(절기) 가운데 하나인 '우수'입니다. 한자로는 '비 우(雨)'에 '물 수(水)'자를 쓰지요.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물이라는 자연의 이치를 뚜렷하게 담아낸 이름입니다. 저희 토박이말바라기에서는 이 오랜 철마디(절기) 이름 곁에 나란히 두고 쓸 수 있는, 조금 더 살가운 이름을 하나 더 지어 달력에 담아 쓰고 있습니다. 바로 '싹비'입니다. [다듬은 토박이말] 싹비 풀과 나무의 싹을 틔우게 하는 비 (토박이말바라기가 다듬은 말) '우수'라는 말이 눈이 녹아 비가 되는 모습에 몸과 마음을 모은다면, 저희가 다듬은 '싹비'는 그 비가 땅에 닿아 어떤 구실을 하는지 그 '구실'에 마음을 모읍니다. 마른 땅을 적셔 잠자던 씨앗들이 껍질을 깨고 기어이 풀빛 새싹을 틔우게 하는 살가운 손길 같은 마음을 담았습니다. 익은 한자말을 갈음한 이 말을 골라 써보면, 차가운 빗방울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응원으로 바뀌는 남다른 즐거움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굳이 '싹비'라는 이름을 새로이 다듬어 말씀드리는 까닭은, 우리 삶의 무늬를 조금 더 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