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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승의 북한굿 이야기

최영장군당굿

[양종승의 북한굿 이야기 17]

[우리문화신문=양종승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1. 최영(崔瑩)의 생애

 

최영(崔瑩)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에 실려 있다. 근래에는 고려사 및 관련 사료들을 기반으로 최영의 출생 배경을 비롯한 성장기, 인간상, 애국심, 공적 등 생애 전반에 걸친 연구가 김상기, 「최영(崔瑩)」, 《조선명인전》 1939; 민병하, 「최영(崔瑩)」, 《한국의 인간상 2》 1965; 민병하, 「최영(崔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출세, 「최영 견금 여석의 일생」, 《동악어문연구》 33 1998; 유창규, 「고려 말 최영 세력의 형성과 요동공략」, 《역사학보》 143 1994; 김병섭, 《고려명장 최영의 역사 흔적을 찾아서》 2007 등에서 이루어졌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최영(崔瑩)은 고려 충숙왕 3년(1316년)에 태어나 고려 우왕 14년(1388년) 12월 만 72살로 삶을 마감하였다. 본관은 고려의 대표적 20개 문벌 중 하나였던 동주(東州, 지금의 철원)이며, 고려개국 공신 최준웅(崔俊邕)을 시조로 삼고 일천 년이 넘도록 대를 이어온 융성한 가문이다.

 

 

동주 최씨 후손인 최영은 고려 청백리 평장사(平章事) 유청(惟淸)의 5세손이며, 사헌부 관리를 지낸 최원직(崔元直)의 외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주와 위엄이 있었고 기골이 장대하였다. 키가 크고 기운이 장사였으며 용모와 풍채가 뛰어났으므로 전형적인 무인(武人)이었으며 타고난 천품(天稟) 또한 강직하고 용맹하였다. 최영의 위엄이 조정 안팎에 떨쳐 졌지만, 티끌만큼도 남의 것을 취한 일이 없이 청렴결백한 장수로 일생을 지냈다.

 

이와 같은 최영의 청렴결백한 성품은 부친 영향이 컸다. 그가 15살 되던 해, 부친 임종을 맞는 자리에서 부친은 그에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汝當見金如石)’라는 유언을 남겼다. 천부적으로 청렴한 성품을 갖은 데다 아버지 교훈이 곁들여져 최영은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고, 끼니가 없으면서도 전쟁 공로로 받은 상과 농토를 국가에 반환하거나 부하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최영은 일평생 외우내란의 전장을 누비며 나라를 위해 많은 공을 세운 명장 중의 명장으로서 80여 차례나 험난한 전투에서 항상 승리하였다. 그러나 신흥세력으로 발돋움한 이성계 일파와 싸우다 결국 참수되어 고려를 지켰던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 최영이 처형되던 날 도성의 백성들 모두가 일을 그만두고 그의 애국심과 충성심에 탄복하며 애도하였다. 정적 관계에서 최영 장군을 처형한 이성계마저도 장군의 죽음을 애석해하였고, 후일 조선왕조가 탄생한 뒤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장군의 넋을 위로하였다.

 

2. 최영장군 신앙

 

무속신앙에서 모셔지는 영웅신은 왕, 왕족, 장군 등 권력을 갖고 나라를 세우거나 통치할 정도의 높은 위치에 있었던 역사 속의 실존적 인물이다. 이들은 국가적 차원에서 깊은 애국심을 갖고 활동하다가 죽음과 함께 민중들로부터 영웅시된 경우인데 그 범주를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나라를 세워 국조(國祖)로 받들어졌던 단군, 이성계 등이 있다. 둘째, 왕족으로서 나랏일에 관여하다가 억울하거나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뒤주대왕), 명성황후, 단종, 금성대군 등이 있다. 셋째, 애국심을 갖고 나라를 위해 싸우다 크게 업적을 낸 후 전사하거나 참수된 최영 장군, 이순신 장군, 임경업 장군 등이 있다.

 

최영 장군은 깊은 애국심으로 나라를 위해 싸우다 비참하게 목숨을 잃은 민족의 영웅이다. 여기에서 영웅은 민중들 마음으로부터 그 혼령이 되살아나 무속신앙으로 신격화된 경우다. 최영 장군은 이러한 상황에 해당하는 장군신으로서 살아생전 나라를 지키려는 애국적 충정이 민중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히게 되었다. 새로운 신부세력에 의해 왕권이 바뀐 조선 시대에 와서도 백성들은 최영 장군을 생생하게 기억하였다. 그리하여 장군의 업적과 교훈적 삶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나갔고 시대가 바뀐 오늘날까지도 무속신앙을 통해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장군 신앙과 관련하여, 무속에서는 죽은 자를 위한 ‘풀이’를 중요하게 다룬다. 특히 명성을 떨쳤거나 국가에 큰 공을 세웠던 장군이 비참하게 죽거나 억울함을 간직한 채 죽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이때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죽은 자와 함께 펼쳐졌던 당시의 사회적 정서를 경험한 민중들은 죽은 영웅의 원혼을 자신들 마음속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시대적 시각으로 표출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자신들이 겪었던 한 맺힌 삶과 함께 풀어내는 것이다. 곧, 영웅의 원혼이 생산적 기능을 가진 민중들의 영혼으로 환생되어져 ‘풀이’를 반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혼 맺혀 죽은 무속에서의 장군신앙 전승의 한 면으로서 고려의 영웅 최영 장군이 이와 같은 신앙체계를 기반으로 오랫동안 민중 속에 뿌리내려져 온 것이다. 그래서 매년 때가 되면 민중들은 원혼 맺힌 최영 장군을 기리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바람인 나라가 태평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풀이를 지속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풀이 행위’는 고차원적이고 수준높은 의례로 발달하고 여기에 신성함과 영험함을 복합적으로 더해 나가면서 민중의 축제로 베풀어진다.

 

최영 장군의 자취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는 시대적인 비운과 도약의 엇갈림 속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듯했다. 그러나 최영 장군과 생사고락을 하였던 이성계마저도 새 왕조를 세운 후 최영 장군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넋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민중의 중심에서 믿어져 온 무속신앙은 장군을 우상화하고 신격화하여 신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최영 장군의 영혼은 영험하고 성스러운 신으로 봉안되고 장군의 업적과 행적은 빛을 더욱 발하면서 그를 추모하는 당굿을 통해 영험한 신격으로 되살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