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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우수성은 이미 세계의 저명 언어학자들이 인정한 것이다. 이제는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본질적 차원에서 한글에 내재된 보편적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편적 가치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인류문화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인류 모두에게 유익함을 줄 수 있는 가치를 뜻한다. 한글은 과연 어떤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한글에 내재된 보편적 가치는 세 가지다. 첫째는 민주성, 둘째는 과학성, 셋째는 철학성이다. 먼저 한글의 민주성은 세종대왕이 밝힌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에 나타나 있다. 세종은 문자 사용에서 소외돼 온 일반 백성들이 제 뜻을 널리 펴게 하기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글이 태생적으로 민주성을 내포한 문자임을 의미한다.
한글의 민주성은 창제 후 수백 년 동안의 쓰임에서 자연스럽게 검증됐다. 특히 한글 편지는 왕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전 계층이 주고받은 소통의 매체였다. 이 점은 한문 편지가 양반 지식인 간의 소통 매체로 국한된 점과 크게 대조된다. 신분 계층을 뛰어넘은 문자로서의 한글 사용은 한글이 가진 민주성이란 가치를 증명해줬다. 한글에 내포된 민주성은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지구적 과업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한글이 지닌 두 번째의 보편적 가치는 과학성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한글은 발음기관의 작용 모습과 발음기관을 본뜬 음성 과학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말소리는 발음기관에서 생성되므로 음성학적 관찰에 의거해 문자를 만든 것은 매우 과학적이다. 발음기관의 작용을 본떠 만든 문자는 한글이 유일하다. 이런 점에서 한글은 과학성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가진다. 현대 지구인의 삶은 과학적 탐구와 그 성과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한글이 현대의 보편적 가치인 과학성을 내포하고 있고, 과학성이라는 한글의 본질적 바탕은 현대 사회의 주류인 과학적 세계관에 잘 부합된다.
한글이 지닌 세 번째 보편적 가치는 철학성이다. 철학성은 한글에 내포된 음양론, 오행론, 삼재론을 근거로 한다. 음양론은 디지털 기술의 기본 원리인 이진법과 본질적으로 같은 원리다. 오행론은 우주 만물의 구성 원리를 다섯 가지 구성 요소로 환원해 이들의 상호작용으로 천지간의 모든 현상을 설명한다. 이런 설명 방법은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를 설정하고, 이것으로써 모든 물질 현상을 해명하려는 현대 과학의 방법론과 상통한다.
삼재론은 천지인(하늘, 땅, 사람)의 세 가지 요소가 상호작용해 조화를 이루는 원리다. 세종은 한글의 모음 기본자 세 개를 만들 때 하늘, 땅, 사람의 형상을 본땄다. 또 삼재론은 초성(하늘), 중성(사람), 종성(땅)이 합해 하나의 소리마디를 만들어내는 원리로 작용했다. 한글의 글자꼴에 삼재의 각 요소가 내포돼 있고, 글자가 결합해 소리마디를 생성하는 원리 속에 삼재가 합해 조화되는 원리가 내재돼 있다.
삼재론이 현대의 산업사회에서 갖는 의미 또한 적지 않다. 삼재론은 인본주의이면서 동시에 인간과 자연의 공존과 조화를 전제로 한다. 환경 문제로 위기에 처한 지구에서 이 삼재론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중요한 가치관으로 활용될 수 있다.
한글에 내재된 민주성, 과학성, 철학성은 한국인의 사유에 작용하면서 우리의 가치관을 형성해 왔다. 21세기에 이르러 한국인의 창의적 능력이 산업 분야는 물론 음악, 영화, 문학 등 예술 분야에서도 세계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현대 한국인이 발휘하고 있는 창의적 능력이 한글에 내재된 보편적 가치와 무관할 수 없다. 한글에서 성취된 보편적 가치는 한국인에게 유전인자처럼 각인돼 한국인의 긍지와 창의성을 북돋우는 원천이 돼 왔다.
이제 우리는 한글에 내재된 민주성·과학성·철학성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주목하고, 이것을 현대 한국이 직면한 사회적 과제의 해결에 활용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나아가 인류의 행복 증진에 한글의 보편적 가치가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가야 한다.
독자 백두현 / 경북대·국어국문학과 교수
* 백두현 교수는 경북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어사 자료 중 특히 훈민정음 관련 자료, 음식조리서 등 한글 필사본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훈민정음학회장을 지냈고, 현재 국어사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