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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처순과 조광조와의 해후(邂逅)

사제당(思齊堂)과 영사정(永思亭)


안처순과 조광조와의 해후(邂逅)


사제당(思齊堂)과 영사정(永思亭)

[그린경제=제산 기자] 남원의 서남쪽에 위치한 금지면(金池面) 내기(內基) 마을에 사제당과 영사정이라는 고옥(古屋)이 있는데 관광가이드가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특히 2000. 9. 2에 설립된 사제당 기념관에는 1994년 각각 보물 제 1197호와 제 1198호로 지정된 기묘제현수필(己卯諸賢手筆)과 기묘제현수첩(手帖)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보물은 한국학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황폐를 겪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기묘제현수필은 사제당(思齊堂) 안처순(安處順)선생이 구례현감으로 부임할 때 동료와 붕우(朋友)들이 송별의 정표로 써준 서(序)와 시(詩)들을 모아 하나의 첩(帖)으로 장정(裝幀)한 것으로 이 속에는 조광조·김정·김구·기준 등의 글이 들어 있다.

   
▲ 영사정(永思亭)

2代에 걸친 효도

지금으로부터 사백여년 전에 사제당을 처음 지은 안처순 선생의 약력을 먼저 소개하고 넘어가야겠다.

1492(성종23)~1534(중종29). 자는 순지(順之). 호는 사제당 또는 기재(幾齋).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문성公 안향(安珦)의 9대손. 기(璣)는 성균관 전적. 조부는 전주부윤 지귀(知歸) 1513년 진사에 오르고 이듬해 문과에 병(丙)과로 급제. 기묘사화에 연좌되기도 했다. 구례현감과 봉상시 판관을 역임. 영천(寧川)서원에 제향 됨.

사제당은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부(仲父)인 판서 침(琛)의 은혜를 입었다. 등과 후 26세에 성균관 박사로 경연관과 춘추관의 직을 겸하고 있다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낙향의 뜻을 비치자 임금이 구례현감 겸 춘추관 기사의 직을 제수했다.

부임 후 향교를 세우고 근사록을 간행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519(중종14)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당고(黨錮)에 연좌되었다가 풀리기도 했다. 그는 1521(중종16)에 벼슬에서 물러나 순자강변에 사제당을 짓고 후학양성에 힘쓰다가 다시 벼슬길에 나갔으나 곧 사직했다.

노모가 와병중일 때는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다스리기도 했고 별세하자 3년간 여묘살이를 했다. 그는 사후 송동면 백평(白坪)에 안장되었다. 사제당의 아들 죽암(竹巖)처사는 산소가 너무 멀어서 날마다 성묘 다니기가 어려웠으므로 궁리 끝에 내기 마을의 백호(白虎)자락 끝, 높은 돈대에 정자를 하나 짓고 하서 김인후가 영사정(永思亭)이라 이름하였다. 영사(永思)란 어버이를 길이 생각한다는 뜻이다. 죽암 처사는 날마다 영사정에 올라 아스라이 먼 곳에 자리한 선친의 음택을 향해 망배를 올리며 선친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달래곤 했다.

영사정 팔경(八景)

영사정은 탁 트인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사방 십리의 드넓은 금지평야가 한눈에 쏘옥 들어오고 순자강물이 그 중심부를 관통하여 흐르면서, 남북도(南北道)의 분계(分界)를 이루며 동류(東流)하는 섬진강과 만나 곡성을 비켜 압록방면으로 남하(南下)하고 평야 건너 동남쪽으로는 지리산 지맥(支脈)의 능선이 열두 폭 병풍을 한일자로 펼쳐 놓은 것처럼 길게 뻗어 만리 풍운을 막아주는 듯 한 느낌을 주고 있다.

   
▲ 영사정8경도 일부

영사정의 전경(全景)은 다음과 같이 팔경으로 요약된다.

창송냉월(蒼松冷月) 푸른 솔에 어린 시린 달빛
수죽청풍(脩竹淸風) 대숲에 이는 맑은 바람

순강모우(鶉江暮雨) 순자강에 내리는 저녁 비

방장청운(方丈靑雲) 지리산에 피는 푸른 구름

야도고주(野渡孤舟) 들판을 가르는 한 척의 배.

단애쌍루(斷崖雙樓) 벼랑 위에 선 한쌍의 누각

폐성잔조(廢城殘照) 옛 성터에 비낀 저녁 놀

장교효설(長橋曉雪) 장교에 쌓인 새벽 눈

영사정 팔경을 읊은 여덟 편의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수년전에 필자가 한번 국역(國譯)한 것 같은데 누구에게 주었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그 내용은 지면관계상 생략하겠다.

현재 영사정에는 정유재란 때 명나라 총병이었던 사대수(査大受)를 포함, 33人의 글이 남아있고, 또함 呂永明, 吳宗道의 시와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도 1605년(선조38)에 와서 현판을 써 준 일이 있다.

정암 조광조가 남원에 남긴 것

율곡은 일찍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를 가리켜 김굉필·정여창·이언적과 함께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일컬었다. 정암은 조선조 중기의 문신으로 도학군자의 표본이요 왕도정치의 선구자였다.

정암은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사제당과 교분이 매우 두터웠던 것 같다. 사제당의 기묘명현수첩에 정암의 글이 여러 편 실려 있는데 그 중 일부가 시비로 만들어져 현재 내기 마을 모정 앞에 세워져 있다.

시비의 원문의 제목은 “남쪽으로 떠나는 순지(사제당)를 송별하며(送順之南行)”이다. 이 시는 25운(韻)에 50구(句)로 된 장편의 오언시(五言詩)인데 시비에는 그 중 10구만 새겨져 있다.

송별시 속에는 정암의 사제당에 대한 석별의 정이 잘 나타나 있으며 후일을 기약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암은 기묘사화 때 귀양 가서 사사됨으로써 그 후 사제당과는 영영 만날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 대신 우리 남원에 불멸의 문화유산을 하나 선물하고 간 셈이다.

사제당과 정암이 왜 그렇게도 교유관계가 돈독했는가를 짐작케 하는 정암에 대한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다. 이 일화는 어떤 사람의 인품을 알려면 그가 사귀는 벗을 보라는 말이 과연 허언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을 들게 해 준다.

정암에게 종아리를 맞은 처녀

정암은 소시적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다. 그때는 사화(士禍)가 잦았는지라, 사람들은 그를 화태(禍胎) 또는 광인(狂人)이라고 불렀다. 화태란 재앙의 모태(母胎)라는 뜻이다.

그의 글 읽는 소리는 청아하기가 마치 벽계수가 흐르는 것 같아 지나가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아녀자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고도 남았다.

어느 날 밤 이웃 집에 사는 허집(許緝)판서의 딸이 정암의 글 읽는 소리에 끌려 자기도 모르게 월장하여 방으로 들어왔다. 정암은 그 규수를 준엄하게 꾸짖으며 칼을 뽑아주었다.

“낭자 이 칼로 자결하여 허씨 가문의 명예를 지키시오.”

허낭자는 칼을 받더니 자기 목을 찌르려고 했다. 정암은 허낭자의 당돌한 행동에 오히려 당황하여 급히 제지하여 칼을 거두어들이고 그 대신 말했다.

“낭자는 나가서 매화나무 가지를 꺾어 오시오.” 정암은 허낭자의 종아리를 세 번 때려 그녀를 징계 했고 그녀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갔다.

어머니의 청춘고백

허낭자는 좋은 가문에 출가하여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현달하여 간관의 직책에 있었다. 그런데 아들 삼형제는 그 아버지와 함께 모두 남곤·심정 등 간신의 무리와 한편이 되어 정암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허씨 부인은 세 아들을 급히 불러 앉혔다. 그리고는 치마를 걷어 올리고 종아리에 난 상처를 보였다. 그 상처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맷자국이었다.

“너희들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어머니 혹시 맷자국이 아니옵니까?”

“그래, 맞다. 이것이 없었으면 너희 아버지도 못 만났을 것이고 너희들과 모자지간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너희들이 이렇게 현달하여 부귀를 누리는 것도 이 맷자국 덕택이니라.”

허부인은 세 아들 앞에 부끄러운 과거를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리고 신신당부했다.

“정암선생은 대인군자이시다. 그런 어른께서 나라에 죄를 지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없는 죄를 만들어 죽인다면 하늘이 반드시 재앙을 내릴 것이다.”

세 아들은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다짐했다.

“어머니, 소자들은 어머니 명을 따를 것이옵니다.”

그 후 세 아들과 그 아버지는 남곤·심정의 무리와 인연을 끊고 정암을 탄핵하는 일에서 손을 떼었다. 정암의 절의(節義)가 한 여인의 들뜬 마음을 바로 잡아 주었고 그것이 덕이 되어 그녀의 세 아들과 남편까지 잘못을 깨우치게 하였으니 정암의 감화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두 명현의 영원한 만남

사제당과 정암은 모두 단명했다. 물론 정암은 불과 서른여덟의 나이로 비명에 갔기 때문에 단명할 수 밖에 없었지만 사제당도 마흔 셋의 아까운 나이에 병사했으니 어쩌면 두 사람은 비슷한 숙명을 타고 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의 기묘명현은 오늘날 정암이 사제당에게 써준 송별시 속에서 다시 만나고 있다. 그 글은 순자강변의 한 작은 마을 앞에 단단한 돌에 새겨져 있어 앞으로 풍설에도 녹슬지 않고 헤일 수 없이 많은 나날을 견디어 내리니, 바야흐로 사제당과 정암두 명현의 영원한 만남이 시작 된 것이라고나 할까?

<출전 : 기묘제현수필과 수첩. 사제당 순흥 安公 處顺의 약전. 한국민족문화 대 백과사전. 청학집(靑鶴集)>

 

□순자강의유래
옛날 송동면 두동리에 전주 판관을 지낸 사람이 병이 들었다. 아들이 지극 정성으로 병구완을 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어느 날 부친은 메추라기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메추라기는 가을에나 찾아오는 새인데 그때는 초여름인지라 불가능한 일이었다.

효성이 지극한 아들은 혹시나 하고 강변을 따라 올라가 보았다. 그때 난데없는 메추라기 한 쌍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아들이 그것을 주어다가 부친을 공양하니 부친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나라에서 그 효자를 표창하고 메추리가 떨어진 그 강을 메추리 순(?)에다 그 효자를 뜻하는 아들(子)를 붙여 순자강이라고 이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