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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

백성 구휼한 군수,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의병총사령 되다

[한국종가의 철학을 찾아서(22)] 전북 군산 임병찬 종가

[우리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돈헌 임병찬 선생(1851~1916)은 1906년 전남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경술국치 후 광무황제의 밀명을 받고 전국적 규모의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의병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제에 체포되어 거문도에 유배되었으며 고초를 겪던 중 순국했다.


 

 

▲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앞에 우뚝 선 임병찬 선생 동상


 명성황후 시해 후 원수 갚으려 가산정리‧노복 해방

돈헌 선생은 집안이 궁핍한 가운데서도 1888년 전라도에 큰 흉년이 들자 돈 4000냥과 조 70석을 내어 구휼하고 1석에 25전의 저리를 받아 백성을 구하였다. 이듬해 봄 도내 유림의 천거로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의 직첩을 받았다. 그 뒤로도 구휼을 잘한 공로로 7월에 낙안군수(樂安郡守)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백성에 대한 관아 벼슬아치들의 행패를 막았음은 물론 한 대의 매일지라도 억울하게 맞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감독했다.


그뿐만 아니라 체납된 세금 6만 7000량과 쌀 1800여 섬을 추징하여 문란했던 세정을 바로잡는 개가도 올렸다. 그러나 39세 때인 1890년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그 동안의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향리에서 백성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 궁궐 쪽을 바라보며 통곡했으며, 동생과 함께 원수를 갚을 계획을 세워 가산을 정리하고 노복을 해방하였다.


 을사늑약 때 무성서원서 최익현선생과 의병 일으켜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던 중 1906년 정월 당시 백성의 존경을 받던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이 호남으로 내려왔다. 이때 돈헌 선생은 최익현을 맞아 사제(師弟)의 의(義)를 맺었으며, 같은 해 6월 4일 전북 정읍군 칠보면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사방에 격문을 돌리고 그 날로 태인을 정복하여 군량과 군기를 확보하였다. 이어 정읍, 순창을 격파하고 8일에는 곡성을 점령하는 동안 근방 포수들이 모여 의병은 900명으로 늘어났다. 
 


 

 

 

이와 같은 면암과 돈헌 선생이 지휘하는 의병진 앞에 왜군은 도망가고 군수와 그 관속(官屬)은 엎드려 사죄하였으며 백성의 호응도 대단하였다. 6월 12일 의병진이 순창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관군이 공격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 때문에 동족끼리 죽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의병을 해산했다.


그러나 관군의 공격을 받아 중군장 정시해(鄭詩海)가 전사하였으며, 선생을 비롯하여 최익현 등 13명은 대마도(對馬島)로 끌려갔다. 그 후 면암 최익현 선생은 단식항쟁(斷食抗爭)으로 대마도에서 순절(殉節)하였으며 돈헌 선생은 이듬해 1907년 1월에 유배가 해제되어 귀국하였다.


 의거 발각 후…日帝 총리대신에 "국권반환" 요구서
일경에 체포돼 거문도로 유배 후 고초 겪다가 순국


 

 

▲ 임병찬 선생에게 내린 <대한독립의군부 순무대장> 칙명서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국권이 완전히 상실되자 재차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하던 중 1912년 음력 9월 28일 공주 유생 이칙(李侙)으로부터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북도 순무대장(全羅南北道巡撫大將)”으로 임명한다는 광무황제(光武皇帝, 고종)의 밀명을 받았다. 고종은 열강들에 대하여 국권을 만회할 원조를 구할 목적으로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으로 조직하여 무력항쟁을 추진하려고 1906년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던 선생을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으로 지명한 것이었다.


이에 선생은 그동안 구상했던 의병전략과 당시 일제하에서 독립운동방략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독립의군부 활동방법을 제시한 문서를 작성하여 상소하였다. 이 문서는 누구나 쉽게 보고 행할 수 있도록 국한문 문답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독립의군부 종합활동계획서 성격을 띠었다. 이 상소가 받아들여져 1913년 2월 고종으로부터 사령총장(司令總將) 겸 전남북순무총장(全南北巡撫總將)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1914년 2월 한양으로 올라가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으로 조직했음은 물론 대한독립의군부 편제를 구성하고 선생이 총대표를 맡았다. 독립의군부의 활동목표는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 및 주요 관리들에게 한국강점의 부당성을 깨우쳐 주고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1914년 5월 3일 선생은 함경남도 관찰사 겸 순무총장에 중임되어 조직을 북부지방까지 확대하던 중 5월 23일 동지 김창식이 일경에 붙잡힘으로써 독립의군부 활동이 일경에 들키고 말았다.


 

 

▲ 의친왕이 친필로 찬양한 임병찬 선생


독립의군부 계획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총사령인 선생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에게 직접 면담을 요구하고, 윤 5월 23일자로 일본 내각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에게 ‘국권반환요구서’(國權返還要求書)를 보냈다. 5월 29일 총독 대리로 온 경무총감 타치바나 코이치로(立花小一郞)에게 국권침탈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국권반환 및 일군의 철병을 요구하였으며, 한국의 독립만이 동양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역설하였다.


그 해 6월 1일 다시 데라우치 총독과 일본 총리대신에게 편지를 보내 일제의 한국침략을 크게 꾸짖었다. 그러자 일제는 선생을 체포하고 거문도에 유배를 보냈다. 선생은 유배지에서 향년 66세의 삶을 마감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생가 낡고 초라…아무런 표식조차 없어 안타까움






 

 

▲ 생가터임을 알리는 표지석 앞에 선 후손 임인길 선생, 하지만 표지석은 생가에서 300여m 떨어진 기찻길 옆 산비탈에 외로이 서 있다.


돈헌 선생의 후손을 만나러 전북 군산으로 내려가는 길은 자못 설레었다. 고종으로부터 직접 밀명을 받은 의병총사령 후손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다가 그곳은 바로 내 고향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후손 임인길 선생(82)은 해마다 군산문화원과 함께 임병찬 선생의 충혼제를 지내고 있었다. 대담을 마치고 돈헌 임병찬 선생의 생가를 안내 받았는데 낡고 초라한 집엔 빨래가 걸려있고 이 집이 의병총사령관이 태어났다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문득 얼마 전 다녀온 충남 서천의 이상재 선생의 생가와 잘 지어놓은 유물전시관이 떠올랐다.


생가 복원이전에 생가터 표지석이라도 세웠으면 하는 생각에 물어보니 여러 문제로 생가 표지석을 생가와 300여m나 떨어진 기찻길 옆 선산입구에 세웠다고 한다. 겨울의 황량한 바람을 맞으며 집에서 꽤 떨어진 표지석까지 가보았지만 생뚱맞고 쓸쓸해보였다. 임인길 선생은 이에 대해 “표지석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어 할아버님께 무척 죄송스럽다. 지금이라도 표지석이 제자리를 찾고 생가를 복원하는 것은 물론 기념공원이나 기념관을 세웠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라고 소회를 말했다.


 

 

▲ 초란 모습의 임병찬 선생 생가


사람들은 김좌진, 이범석 장군이나 백범 김구 선생은 잘 알지만 고종 황제의 밀명으로 독립의군부 사령총장이 되어 위기의 나라를 구하려고 온몸을 던진 임병찬 선생은 모른다. 우리가 독립투사를 흠모하고 그들의 정신을 받드는 진정한 배달겨레라면 돈헌 임병찬 선생을 기리는 일에도 더욱 마음을 써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 최익현 곁엔 언제나 '제자 임병찬'이 있었다
함께 의병 일으키고 함께 대마도로 끌려간 '師弟'


“아, 어느 시대엔들 난적(亂賊)의 변고가 없겠는가만 그 누가 오늘날의 역적과 같을 것인가? 또한 어느 나라엔들 오랑캐의 재앙이 없겠는가만 그 어느 것이 오늘날의 왜놈과 같겠는가? 의병을 일으키라,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슬프다, 저 불난 집 기둥 위의 제비나 솥 안에든 물고기처럼 곧 죽을 운명이거늘 어이해 떨쳐 싸우지 않는가?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죽어서 충의로운 넋이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우리 모두 창과 방패를 수선하고, 전심전력을 다해 역적의 무리를 섬멸하여 놈들의 고기를 먹고 놈들의 가죽을 깔고 자며, 저 원수 오랑캐를 무찔러 그 씨를 말리고 그 소굴을 소탕하자. 그리하여 어떻게든 옛 모습을 회복하여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백성을 구원하라. 우리의 거사는 정당하고 떳떳하다. 적이 강하다고 두려워 말라. 자 이제 함께 힘차게 일어나자!”


한말 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의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창의격문(倡義檄文)]이다. 대한제국 말기 최고의 의병장으로 온 백성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3~1907). 그는 항일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편지를 써서 판서 이용원, 판서 김학진, 관찰사 이도재, 참판 이남규 등에게 제의했으나 아무도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면암은 “나와 더불어 일을 계획할 사람이 없으니 세상인심이 이와 같을진대 참으로 나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좁디좁아서 달릴 곳이 없구나.”라고 탄식하기에 이른다. 이에 호남 제자 고석진(高石鎭)의 권유로 돈헌 임병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국사가 이에 이르렀는데도 아직은 말을 참아야 할 것인가. 벙어리나 귀머거리 그리고 신체장애자라 할지라도 인간이라면 불구대천의 원수를 치기 위하여 집안에만 틀어박혀 앉아서 편안하게 쳐다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항차 유학자로서 말할 나위가 없다. 필시 고명한 견해로 마음에 정하는 바가 있을 것인즉, 의병을 일으킬 방안을 묻는 바이오.”


이에 돈헌은 곧바로 “진즉 만나 뵙기를 원하는 바였으나 기회가 없었던 바 먼저 기별하심을 받자와 황감하기 그지없습니다. 당장 뛰어가서 진배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 편지를 받자 면암은 먼저 돈헌을 찾았고 돈헌은 면암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러자 면암은 “앞으로 대사를 모두 돈헌에게 의탁하겠다.”하였다.


 

 

▲ 대마도로 끌려갈 때의 면암 최익현 선생(왼쪽)과 늘 면암의 옆에서 활약한 임병찬 선생


이후 돈헌은 스승 면암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면암의 곁에는 언제나 돈헌이 그림자처럼 따랐고, 면암이 행한 모든 일에는 돈헌이 간여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또 둘은 함께 대마도로 끌려갔는데 그곳에서 면암이 죽자 돈헌은 <곡만 면암선생(哭輓 勉庵先生)>이란 시를 지어 바쳤다. “천지의 형황이 뒤섞여 바람 천둥이 옥천(玉川, 순창 옛 이름)을 움직이누나. 충의는 천고에 드물고, 험한 간난(艱難, 힘들고 고생이 됨)은 반년을 지났도다. 별은 엄원(嚴原, 대마도 중심지) 밤에 떨어지고, 무지개는 부산항 배를 뚫었구려. 머리를 돌려 서원(武城書院)에 앉으니 목소리나 얼굴빛이 아직은 의연하오이다.” 스승 면암과 제자 돈헌은 대한제국 말기 찬란히 빛나는 우국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