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만세운동’이란 나라를 오래도록 유지시켜 달라는 기원을 구호로 하여 저항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3•1운동에서의 “만세”는 “조국이여 만년동안 계속 될 지어다”라는 뜻이다. 이때의 운동이 위와 같이 저항의 한 수단인〈만세운동〉이었음은 민중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조선인이 모두 현실의 학정에 비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구한국 정부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독립 만세를 부르는 것이니 우리 다 같이 끝까지 독립만세 시위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그 목적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경성 시내가 만세 소리에 “떴다 잠겼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 시위에 대한 스스로의 명칭에서도 ‘만세’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것은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시위를 용천리 시위에서 희생자가 많이 난 것에 대해 현북면민이 위로하기 위하여 용천리로 가서 만세운동을 벌였는데 이를 “위로 만세”라 했던 것이다. 또한 이때 만세 운동을 위해 집결한 하조대 뒷편의 고개를 “만세고개”라고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다.
또한 굳이 군수나 면장이나 구장(리장)등의 관공리를 앞장 세워 만세를 부르게 한 것도 이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개성에서 일인 군수에게 만세를 부르게 한 것과 경남 진주 시위에서 군수 민인호를 “사로잡아 제복과 제모를 벗긴 후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게 한” 경우나 함안 가야면 시위 때 관헌들에게 만세를 부르게 한 경우 등이다. 이같이 만세를 부르게 한 것은 관리들로부터 항복을 받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 수원 김향화와 33인의 기생들은 3•1만세시위에 앞장썼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만세운동에서의 무기는 없었다. 다만 시위 도구는 있었다. 그것이 바로 깃발과 구호와 노래였던 것이다. 깃발은 태극기였고, 구호는 ‘조선(대한)독립만세’가 주였고, 노래는 ‘애국가’가 주였다. 물론 태극 깃발 외에도 농민들이 사용한 ‘농기도 사용되었듯이 노래도 ’애국가‘뿐만 아니라 교가, 찬송가, ’아리랑‘ 그리고〈애국가〉류와 〈독립가>류도 불렸다. 이중에 애국가와 독립(운동)가가 가장 많이 불린 노래이다.
“이때에 일본 헌병이 쫓아와서 제일 선두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만세를 외치던 최석일의 태극기를 든 바른팔을 무도하게 일본도로 내리쳤다. 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기 팔과 함께 떨어진 깃발을 얼른 왼손으로 주워들며 그냥 만세를 불렀다. 헌병은 다시 그 왼팔마저 칼로 내리쳤다. 최는 양팔을 다 잃었지마는 안색이 오히려 태연하여 입만으로도 만세를 계속하였다. 악귀와도 같은 일본 헌병은 이번에는 이미 피투성이가 된 최의 목을 쳐서 그는 장렬하게 순사했다. 이같이 최가 쓰러져 죽자 그 바로 뒤에서 행진하던 김사걸이 최가 떨어뜨린 태극기를 주워들고 계속 앞장서서 나갔다. 이번에는 헌병 보조원이 짐승을 죽이는데 사용하던 쇠 갈구리를 들고 달려들어 그의 배를 쳐서 질질 끌고 가던 도중 일본인 헌병이 총탄을 발사해 죽고 말았다.“
이상과 같은 상황은 경남 창원군 진북면 사동리 시위에서 김수동(金守東)의 경우이기도 한데, 이처럼 태극기는 시위에서의 중요한 도구였음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3•1운동 중 일제의 제암리 학살에 이어 두 번째로 악명 높은 정주 학살 사건 그리고 진북 학살사건에서 태극기의 위상을 확연히 볼 수 있었다.
“3월 1일 오후 1시였다. 남녀교인들과 시내 지식계급에 속하는 유지들이 식장인〈숭덕학교〉교정으로 모여들어 장내는 1천 수백 명에 달했다. 선교사 모페트(馬 布三悅)도 내빈석에 와 앉았고 일본인 경찰인 사복형사들이 경비진을 지키고 있었다. 봉도식(奉悼式)은 찬송가와 기도로 간단히 조의를 표하고 끝나자 돌연히 대형 태극기가 단상에 게양되어 군중들은 꼭 10년 만에 다시 대하는 국기인지라 한편 놀라고 한편 기뻐 주목할 즈음, 도인권(都寅權)이 단상에 뛰어올라 이제부터 ‘조선독립선포식’을 거행하겠다고 그 취지를 설명했다. 이어서 목사 정일선(丁一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목사 강규찬이 연설했다. 식은 목사 김선두가 사회하였고, 애국가 봉창은 삽시간에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화하였는데 승덕학교 교사 황찬영과 윤원삼은 미리 준비했던 태극기를 날라다가 군중에게 나누어 주자 만세소리가 우뢰와 같이 터져 나왔다.”(태극기를 배부, 매일신보, 1919, 5,5)
이 상황은 평양의 3•1만세시위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3월 1일〈광무황제 봉도식〉을 가장하여 평양시의 첫 시위운동을 촉발시킨 순간이 생생하게 기록된 것이다. 기독교계 시위 집회의 전형이기도 한데,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바로 시위운동(독립선언식)에서 태극기와 ‘애국가’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결국〈만세운동〉이란 총검과 같은 공격무기 대신 태극기를 앞세우고 ‘애국가’를 부르며 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의 주장이 실현되기를 호소한 시위였던 것이다.
▲ 1919년 3월 1일 온 겨레는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애국가〉류
이제 3•1운동 현장의 ‘애국가’ 상황에서 그 명칭을 “애국가”로 한 노래들을 살피기로 한다. 이들은 운동기간에 창작된 애국가와 기존의〈애국가〉류를 말하는 것이다. 당시 불려 진 노래들은 매우 다양했다. 이 분야에 대한 별도의 조사 기록이나 논고가 희소한 형편이기에 그 종류는 정확히 제시할 수는 없으나 지금까지의 자료조사에 의하면 대략 10여종에 이른다.
곧〈애국가〉류, 독립(운동)가류, 찬송가류, 교가류, 민요류(아리랑)그리고 운동가(응원가)류 등이다. 그런데 이중에서도〈애국가〉류와〈독립운동가〉류가 가장 많이 불려 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노래들은 따로따로 개별적으로 불렸다기보다는 시위전개과정에 따라서 연계적으로 불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조사한 기록물이나 증언 자료에서는 이들 모두가 기록되지 않아 그중 하나만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마치 시위과정에서 한 가지 노래만 불렀던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다시 말하면 그중 한 가지 노래만을 거명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 이유는 시위가 대개 단계별로 진행되었는데, 그 과정마다에서 상황에 맞게 불렸던 노래를 일일이 진술하거나 기록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모의→집결→연설→만세3창→노래제창→구호제창→시위행진이 일반적인 시위 형태였는데, 이때 집결지가 예배당일 때는 주로 찬송가류가 선창되었고, 학교일 경우에는 ‘애국가’와 ‘교가’나 ‘응원가’가 주로 선창되었다.
또한 관공서(면사무소․주재소․우편소)나 시장 통일 경우는 민요나 애국창가가 주로 선창되었고, 최초 집결지나 해산 시에는 거의〈애국가〉류를 불렀던 것이다. 이 같은 선창에 있어서는 시위선도자들의 직업이나 성향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경우 외에도 특별히 지정된 노래가 불려 졌던 경우도 많았다. 그것은 미리 인쇄물로 배포하여 선도자에 의해 교육된 경우이다. 그 전형이 이어 살피게 될 평안남도 순천군 신창면 시위 등의 경우일 것이다. 이제 3•1운동 현장에서 불린〈애국가〉류와 ‘애국가’를 구체적인 상황과 함께 살피기로 한다.
대한제국애국가
이 ‘대한제국애국가’는 대한제국(1897~1910)기 흠정(欽定, 황제가 친히 제도나 법률 따위를 제정)국가이다. 당시 군대와 관립학교에서 일정기간 공식적으로 교육되어 불렸던 것이다. 때문에 시위현장에서도 불렸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1919년 전까지 비밀리에 유통되었던 애국 창가집 「도산본애국가」와 「최신 창가집 부 악전」에 게재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다.
전자는 경술국치 후 각종 신문의 항일기사와 〈애국가〉류를 담은 비밀 출판물이고 후자는 1914년 후 중국 동삼성 지역의 교민학교에서 통용된 교과서이다. 이는 물론 1906년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으로 흩어져 항일운동을 주도하였다. 3•1운동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3•1운동에 관한 기록이나 증언자료 중 “애국가”로만 표기된 것들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의병들의 애국가
위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다음의 군인들이 불렀던〈애국가〉이다. 이것은 광무 10년(1906) 발행되어 통감부의 탄압을 받으면서 병탄 전후까지 암암리에 쓰인 교과서인 「초등소학․3」에 게재된 것이다. 군인들의 훈련 모습을 다룬〈제13조 조련〉편에서 훈련 모습을 기록한 내용 중에 “일제히 애국가를 부르니 참 용맹스러운 기운이다.”라고 하며 다음과 같은 노랫말의〈애국가〉를 기록하고 있다.
〈愛國歌〉
날내고도 날내도다.
우리군이 날내도다.
반석갓치 긋은마음,
충군애국 깁히색여.
삼천리에 울이되고,
2천만에 보호소셰.
놉고놉은 태극긔는,
독립긔상 그려냇네.
압헤부는 나팔소래,
구보호령 분명하다.
나아가셰 나아가셰
용맹있게 나아가셰.
군가로 불렸음직한 노랫말이다. 이 자료는 “애국가”라는 명칭을 쓰고 있어 당시 군대나 관립학교에서의 훈련과 운동회 때에 나름대로 창작하여 부른 것들 중 하나임을 짐작케 한다. 어떻든 이 자료는 일제의 직접적인 간섭으로 군대가 해산되고 일부 관립학교가 폐교된 후로도 군인들과 학생들에 의해 불렸을 것으로 보아 실제적으로는 의병들의〈애국가〉인 셈이다.
사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의병들의 활동이 3•1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예를 들면 강원도 정선군 북면 전상요가 안동에서 숨어 들어온 의병 출신이었다는 사실이나 김화읍 시위에서 주동인물 중 한 사람인 손계원이 논산 출신의 의병이었다는 사실에서 확인이 된다. 그러므로 구한국 군대 출신들이 알고 있던 ‘대한제국애국가’나 이 교과서 속의〈애국가〉가 3•1운동 현장에서 불렸음은 분명한 것이다.
③ 광주 시위 현장의〈애국가〉
〈국사편찬위원회〉소장의 「총독부문서 각도장관 보고 철」에 의하면 3월 8일의 광주 큰 장날 시위에서 다음의 “애국가”가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기록된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애국가〉
얄루의 물 홍안의 뫼 발해에 달해
길이 길이 발 은 그때 그리움
우리속에 흐르는 피 그 나름이요
그 손발 물림이 내것이로다
(후렴)
빛나도다 빛나도다 뛰는 굳거다
앞바람에 넓음이 내것이로다.
억천만년 변함없이 새목숨 품고
범눈인지 흘긴지 얼마나 오랜가
새겨먹고 잘새겨라 풀밥이나마
몸부림할 세력 이것이로다.
3•1운동 후 까지도 불렸던 것으로 여러 기록에 나타나는, 매우 광범위하게 불렸던〈애국가〉이다. 이 노랫말은 1920년대 김좌진 장군 작사로 독립군들이 즐겨 불렀다고 전해지는 ‘승리의 행진곡’과 동일하다. 또한 ‘독립의 행진곡’과도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1992년 판 「독립군가집」에 있는 ‘승리의 행진곡’과 비교해 보면 가사 일부와 후렴부분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3•1운동 현장에서 불려 진 이 노래는 기존의 ‘승리의 행진곡’이 “애국가”로 불려 진 것임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당시 독립운동가의 전이 과정의 일단을 알려줌과 동시에 해외 독립군과의 연계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단서라고 하겠다. 실제 이 같은 해외 독립운동가 들이 부르던 노래가 국내에 전해진 경로를 보여주는 예는 다음 경우이다. 곧 1919년 11월 상해 임정요원이 국내에 잠입해서 서울, 춘천 등지에서 전단을 배포하다 검거된 사실과 미주지역 교만 사립학교에서 불렸던 ‘소년애국가’등이 국내에 유입된 경우 등이다.
총독부 조사〈애국가〉
1910년대 불려 진 다음과 같은 또 다른〈애국가〉의 존재다. 노랫말이 비교적 긴 가사체의 노래인데, 기록 과정과 번역 과정에서 그 형태가 변형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 자료는 지금까지 확인된〈애국가〉류 중에서 시대상이 잘 반영된 자료로서 특히 총독부 학무국에서 조사 기록한 자료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애국가〉
아름답고 아름답구나 우리 대한
삼천리 우리강산 절묘하니
대대 성군 우리나라 일세
충효겸손은 우리 학도의 본분일세
오리라 오리라 반드시 봄은 찾아 오리라
엄동에 잠자던 초목에도 봄은 찾아 오리라
남산의 송백은 언제자 푸르듯이
움추렸던 꽃들도 때되면 만개한다
이나라 초석은 우리들 학도라
열심분발 면학하는데 힘쓰자
우리들 철석같은 마음이 곧 대한독립 기초가 분명하다
학도야 학도야 우리 학도야
덕의를 닦고 학문을 넓히는데 우리 모두 힘쓰자
삼천리강산 2천만 동포를
우리학도들이 보전하세
충군의 의지는 恒心이요
열성어린 애국심 河海와 같다
하늘의 도움으로 우리 황실
만세 만세 독립만세
대한융회 3월 5일 대황제폐하 탄신일
대한제국 동포야 다 함께 忠君愛國하세
애국심이 없으면 自由權을 행할 수 없고
자유권이 없으면 남의 노예 분명할세
백성은 백성으로서 임금을 섬기세
나라가 망하면 백성도 멸하는 것이
오늘날의 세계적 현상이다
사천여년 예의동방 성자손손 빛나라
삼강오륜 근본으로 충신열사 무궁하니
삼각산하 우리 황실은 억천년 굳건하리
나라의 근본은 우리들 백성이다
문명세계 사람되고 2천만 동포 단결하면
어느 누가 감히 능멸하리
금수강산 삼천리
대한종교 만만세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대황폐하 만만세
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황태자 전하 천세
대한제국 억만세
이 자료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조사자료(문서번호 88-4) 「야소교에 관한 보고서」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대한종교”․ “황태자”․ “대한제국” 등 구체적인 국명과 단체명이 쓰였음이 주목된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당진 대호지 시위와 〈애국가〉
“선언문 제창이 끝나고 이어서 행동 대원은 전날 밤에 등사한 애국가를 나눠 주었다. 그리고 태극기를 앞세우고 선두에는 원로 지휘 이인정과 행동총책이 앞장섰다. -중략- 조선독립만세와 애국가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장정리를 거쳐 천의시장으로 향했다.”
1919년 4월 4일(음 3월 4일) 11시경,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의 만세 시위운동 당일을 증언한 내용이다. 이 글은 1986년 박상건의 「대조선大朝鮮 독립만세운동」에서 인용한 것인데 이 기록은 천안의 ‘아우네 장터’ 만세운동에 버금가는 대규모의 대호지 지역 시위운동에 대해 조사기록이다. 이 운동의 규모는 광복 후 3•1운동 참가자로 130여 명이 열사로 추서된 사실에서도 짐작이 간다.
바로 이 시위 현장에서 아래의〈애국가〉가 불려졌다. 그런데 이 보고서에 의하면 시위운동 당시에 창작한 것임을 밝히고 있어 주목하게 되는데, 작사자는 당시 이 지역의 한학자였던 한운(韓雲)으로 시위를 준비 하면서 면사무소에서 이를 작사하여 1천매나 등사했다는 것이다.
노랫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애국가〉
(一) 백두산 정기가 할라에 솟았으니
한반도와 사해는 우리의 터전이다
반만년 역사와 삼천리 금수강산
빛나는 백의민족 만방에 자랑하도다
(二) 무궁화 동산을 하느님이 도우시니
태극기 물결이 세계로 뻗어가도다2천만 동포여 피로 뭉쳐서
억만년 내 나라를 가꾸어가세
매우 정갈한 노랫말이다. 전체적인 내용에서나 ‘백두산’․ ‘하느님 도우시니’․ ‘삼천리’․ ‘무궁화’ 같은 노랫말의 사용에서 ‘애국가’를 염두에 두고 작사한 것임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지 못한 곳에서 〈2.8독립선언서〉를 독자적으로 낭독했던 것과 같이 지역에서 알려진 애국가나 지도자가 직접 작사하여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두 “애국가”라는 곡명을 썼다는 점에서 ‘애국가’를 인식하고 창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3•1운동 현장에서 불려진〈애국가〉류를 살폈다. 이들은 말 그대로 ‘나라사랑의 노래’로서 애국가들인 것이다. 사실 이 경우 그 위상은 당연히 나라의 노래로서의 국가 개념을 포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마치 독립선언서나 격문이 도착되지 않아 급하게 될 때 나름대로의 창작 선언서와 격문 등을 만들어 배포했던 현상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3.1 시위현장에서 애국가가 절대적인 도구였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현 ‘애국가’가 불렸던 경우들을 살피기로 한다. 3.1운동 기록에서 현 ‘애국가’가 아닐 경우는 대개 그 노랫말 일부를 부기하거나 작사자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애국가”라고만 기록된 것은 거의 현 ‘애국가’로 볼 수 있다. 이는 이미 이 시기에 ‘애국가’가 대표적인 애국가의 위상으로 확고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실례들은 다음의 상황에서 확인을 할 수가 있다.
▲ 해주기생 옥운경과 그 동지들은 직접 태극기를 그려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애국가’의 현장
① 선교사들의 기록
3•1운동에 대한 현장 기록은 당연히 특별한 계층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그 계층은 일제(총독부)와 당시 국내에 파견된 외신 기자 또는 서양선교사들이다. 전자가 그들 편의대로 축소․왜곡하여 기록한 반면, 후자는 거의 사실에 가깝게 기록했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후자의 자료들은 일본 측 기록 위주에 의한 3•1운동사 연구에 있어 이 분야에 대한 보완으로 필요하다 할 것이다.
이번에는 현 ‘애국가’의 상황을 기록한 선교사들의 기록과 외국어 표기 자료들을 살피기로 한다. Carlton W. Kendall의 기록이다.(주P:번역본은 신복용 교수에 의해 《한국독립운동의 진상》으로 발간되었고, 원본은 〈한국연구원〉에 소장 되어 있다)
“군중들은 무장하지 않았으며 행렬은 젊은이와 학생들은 물론 노인들과 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군중들은 ‘올드랭 사인’ 곡에 맞춘 한국의 국가를 부르고 국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면서 거리를 꽉 메웠다”
“정의와 인도주의에 입각해 책을 썼다”고 전제한 켄댈(Kendall)의 「한국독립운동의 진상(The Truth about Korea)에서의 일부다. 이 기록에서의 “한국의 국가”는 ‘올드랭 사인’곡으로 기록하고 있어 현 ‘애국가’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3.1운동 직후에 출판된 것으로 볼 때 기록 시점이 3•1운동 시위 기간 중이라고 볼 때 충실한 현장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당시 선교사들이 3•1운동 전후에 독립운동에 많은 역할을 했음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 바로 위와 같은 사실에서도 알 수가 있다. 예를 들면 미국 선교사 마펫 목사(교장)가 1919년 3•1운동의 시발이었던 평남집회에 참석해서 독립선포식으로 변한 광경을 보고 사진을 찍어 본국의 통신사에 보내 처음으로 3•1운동 상황을 외국에 알린 예가 그것이다.
사실 당시 3•1운동의 현장 상황을 우리 스스로는 기록으로 남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외국 선교사라는 특수한 지위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이를 본국의 언론에 공개하여 간접적으로 한국을 지원하기도 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그들의 선교 방침인 소위 ‘네비어스(Nevius) 교육방법’ 에 의한 원칙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지진전도, 자력운용, 자주치리(自主治理), 자립토착 교회 설립을 말한다.
곧 한국선교에 있어서 한국인의 인습, 전통, 가치관 그리고 민족성을 고려하여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선교한다는 원칙을 말하는 것인데 선교 초기의 민족교회 운동이나 애국충군교회운동에 적극 동참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위의 기록과 비교될 수 있는 다른 자료를 살펴보기로 한다. 《한수의 여정》이란 소설인데 서재필 박사가 쓴 자전적 작품이다. 여기서 한수(HANSU)라는 소년을 주인공으로 하여 3•1운동을 겪는 상황을 주로 다루었다. 내용 중에 주인공이 3•1운동의 만세시위에 참가하는 대목으로 군중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이 있다. 원문 일부와 번역 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The crowd was now marching out of the park, with almost everyone waving a Korean flag, some singing their national anthem, which for ten years they had been forbidden to sing in public. Others keps up their national cheer. The whole crowd seemed to have been transformed into new beings. They were not at all like the silent Korean, with downcast faces, hesitant steps and furtive glances. They laughed, talked and shouted."
(“군중들은 공원 밖으로 행진해 나가기 시작했고 저마다 태극기를 흔들면서 근 10년이나 부르지 못했던 국가를 힘차게 불렀다. 어떤 사람들은 계속 국가를 위한 환호 소리를 연거푸 소리 질렀다. 군중 전체가 마치 자기들이 새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기뻐 날뛰었다. 그들은 말도 없고 고개들을 숙이고 망설이는 걸음 거리에 슬금슬금 남의 눈치만 보던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웃을 대로 웃었고 하고 싶은 말을 다했고 떠들고 싶은 대로 떠들어 댔다.”)
비록 허구(픽션)이지만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서재필의 글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보게 된다. 이는 앞에서 살핀 C.W 켄달의 3•1운동 시위 현장 기록과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같이 외국어 기록에서 “National Anthem"이란 표기를 곧 ‘애국가’로 보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도 있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애국가’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