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소위 지성인이라는 사람들 대부분은 어려운 한자말이나 영어 쓰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유식함을 증명하는 것이라도 되는 양. 하지만, 2살 때 일본에 건너가 70여 년을 우리말을 사랑하며, 토박이말로 시조와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바로 교토의 김리박 선생이 그분인데 우리도 잊었던 토박이말 사랑에 평생을 바치고 있다. 토박이말을 쓰면 훨씬 글이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선생은 일찍 깨달았던 것이다. 이제 우리도 토박이말 사랑에 빠져볼까?
자연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토박이말
1) 꽃보라 맞으며 꽃멀미 해보셨나요?
봄철이면 눈 속을 뚫고 나와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는 매화를 시작으로 진달래, 산수유, 개나리가 흐드러진다. 이때 ‘눈보라’처럼 꽃이 휘날리는 모습을 ‘꽃보라’가 인다고 하며, 꽃의 아름다움이나 향기에 취하여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은 ‘꽃멀미’다. 또 ‘꽃보라’ 비슷한 말로 ‘꽃눈깨비’도 있는데 이는 흰 눈같이 떨어지는 꽃잎을 말한다. 편지 쓸 때 “꽃보라 맞으며 꽃멀미 해보셨나요?”라는 문구를 써보면 멋지지 않을까?
▲ 저렇게 흐드러지게 달린 꽃이 한꺼번에 떨어지면 모두가 꽃멀미를 한다. |
또 산과 들에 가보면 우리의 토종 들꽃인 뽀리뱅이, 복주머니꽃, 줄딸기꽃, 양지꽃, 대극들이 이름만큼이나 그 순수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특히 가을철에 흔히 보는 꽃 코스모스의 토박이말 이름은 ‘살사리꽃’이다. 또 무나 배추 따위의 줄기에 피는 꽃은 ‘장다리꽃’인데 씨를 받으려고 장다리꽃이 피도록 가꾼 무나 배추를 ‘장다리무’, ‘장다리배추’라고 한다. 이 장다리무나 장다리배추는 꽃을 피우고 씨앗을 여물게 하는데 모든 양분을 소모하는데 그런다 보면 뿌리에는 바람이 들고 잎사귀는 노랗게 시들어 죽는다. 자식에게 일생 통해 사랑을 쏟아 붓는 부모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2) 봄에는 산모퉁이에서 마파람이 분다
여름날 더위가 극성일 때 시원한 바람 한 줄기는 정말 고맙기까지 하다. 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 붙인 이름을 보면 ‘샛바람(동풍)’, ‘하늬바람(서풍)’, ‘맞바람(마파람:남풍)’, ‘높바람(뒷바람:북풍)’ 따위가 있다. 아직도 뱃사람들은 이 토박이말로 바람을 이른다. 그밖에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른 이름은 북동풍을 말하는 ‘높새바람‘, 북풍을 이르는 ’된바람‘과 ’뒤바람‘, 북쪽에서 부는 큰바람인 ’댑바람‘, 북서풍을 말하는 ’마칼바람‘, 서풍을 이르는 ’가수알바람‘, 동남풍을 이르는 ’간새‘와 ’사마‘ 그리고 ’든바람‘, 서풍이나 서남풍을 말하는 ’갈바람‘, 동풍을 이르는 ’동부새‘도 있다.
계절에 따라 부는 바람 이름도 살펴보자. 우선 이른 봄에 부는 찬바람인 ‘꽃샘바람’, ‘살바람’, ‘소소리바람’과 솔솔 부는 봄바람인 ‘실바람’, 보드랍고 화창한 ‘명지바람’이 있고, 초여름에 오면 모낼 무렵 오랫동안 부는 아침 동풍과 저녁 북서풍인 ‘피죽바람’이 있다. 또 가을이 되면 초가을 남쪽에서 불러오는 시원한 ‘건들마’, 초가을에 부는 동풍 ‘강쇠바람’과 ‘색바람’, 가을에 부는 신선한 ‘막새바람’, 서리 내린 아침에 부는 ‘서릿바람’이 있으며, 겨울엔 문틈 사이로 부는 매우 춥게 느껴지는 ‘황소바람’, 살을 에는 듯 독하게 부는 몹시 찬 ‘고추바람’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꽁무니바람’이라고 했다.
바람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바람의 세기(보퍼트 13 등급)가 있는데, 기상청은 이 등급에 맞춰 우리말 이름을 붙여 놓았다. 연기가 똑바로 올라가 바람이 거의 없는 상태(풍속 초당 0~0.2m)는 '고요', 풍향계에는 기록되지 않지만 연기가 날리는 모양으로 보아 알 수 있는 ‘실바람(0.3~1.5m)'부터 시작하여 ’남실바람‘, ‘들바람’, ‘건들바람’, ‘된바람’, ‘센바람’, ‘큰바람’, ‘큰센바람’, ‘노대바람’, ‘왕바람’이 있으며, 지상 10m 높이의 풍속이 초속 32.7m 이상으로 육지의 모든 것을 쓸어갈 만큼 피해가 아주 격심한 것을 ‘싹쓸바람’이라 한다.
3) 여름에는 잠비, 가을에는 떡비
또 여름에는 한바탕 소나기가 내리거나 비가 갠 뒤에 바람이 불고 시원해지는 ‘버거스렁이’를 기다린다. 하지만, 폭우 곧 ‘무더기비’는 되지 말아야 한다. 봄에는 ‘가랑비’, ‘보슬비’, ‘이슬비’가 오고, 여름에 비가 내리면 일을 못하고 잠만 잔다는 ‘잠비’, 가을에 비가 내리면 떡을 해먹는다고 ‘떡비’, 겨우 먼지나 날리지 않을 정도로 찔끔 내리는 ‘먼지잼’, 모종하기에 알맞게 오는 ‘모종비’가 있다. 여기에 모낼 무렵에 한목 오는 ‘목비’, 비가 오기 시작할 때 떨어지는 ‘비꽃’, 볕이 난 날 잠깐 뿌리는 ‘여우비’, 아직 비가 올 기미는 있지만 한창 내리다 잠깐 그친 ‘웃비’ 따위가 있다. 그리고 세차게 내리는 비는 ‘달구비’, ‘무더기비’(폭우, 집중호우), ‘자드락비’, ‘채찍비’, ‘날비’ ‘발비’, ‘억수’ 따위의 비들이 있다.
4) 비를 머금은 거먹구름, 가을 하늘엔 새털구름
가을 하늘 아득히 높은 곳에 ‘새털구름’이 있다. 그런가 하면 높은 하늘에 생겨서 햇무리나 달무리를 이루는 ‘위턱구름’도 있고, 또 여러 가지 빛을 띤 아름다운 ‘꽃구름’, 외따로 떨어져 산봉우리 꼭대기에 걸린 삿갓모양의 ‘삿갓구름’, 바람에 밀려지나가는 ‘열구름’, 밑은 평평하고 꼭대기는 둥글어서 솜뭉치처럼 뭉실뭉실한 ‘뭉게구름’도 보인다. 물고기 비늘 모양으로 하늘 높이 열을 지어 널리 퍼져 있는 ‘비늘구름’, 실 모양의 ‘실구름’ 따위도 있으며, 또 비를 머금은 ‘거먹구름’과 ‘매지구름’, 한 떼의 비구름은 ‘비무리’, 비행기나 산꼭대기 등 높은 곳에서 보이는, 눈 아래에 넓게 깔린 '구름바다’, 길게 퍼져 있거나 뻗어있는 구름 덩어리인 ‘구름발’ 등도 있다. 구름은 아니지만 골짜기에 끼는 ‘골안개’, 산 중턱을 에둘러 싼 ‘허리안개’도 볼 수 있다.
5) 도둑눈, 떡눈, 숫눈을 아시나요?
한겨울에는 눈과 함께 찬바람이 몰아치는 눈설레가 있고, 몰아치는 바람에 흩날리는 눈발, 즉 ‘눈보라’가 있으며. 소나기와 대비되는 폭설은 ‘소나기눈’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밤사이에 몰래 내린 눈은 ‘도둑눈’, 조금씩 잘게 부서져 내리는 눈은 ‘가랑비’처럼 ‘가랑눈’, 거의 한 길이나 될 만큼 엄청나게 많이 쌓인 눈은 ‘길눈’, 물기를 머금어 척척 들러붙는 눈송이는 ‘떡눈’이다. 또 얇게 내리는 눈은 ‘실눈’, 눈이 와서 덮이고 나서 아직 아무도 지나지 않은 상태의 눈은 숫총각, 숫처녀처럼 ‘숫눈’, 발자국이 겨우 날만큼 조금 온 눈은 ‘자국눈’, 초겨울에 들어서 약간 내린 눈은 ‘풋눈’이라고 한다. 눈도 비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이름이 많다.
6) 도랑이 개울·시내·내·가람을 지나 바다로 간다
▲ 길에는 굽돌이길, 에움길도 있다. |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이 빗방울들이 어떻게 모여 바다로 갈까? 이 과정을 토박이말로 이어가 보자. 맨 먼저 이 빗방울이 모여 폭이 좁은 작은 도랑이 되고, 도랑이 커지면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물줄기 곧 개울이 된다.
그 개울이 모이면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물줄기란 뜻의 시내가 되고, 시내가 모여 내가 되며, 내가 모이면 다시 가람으로 흘러간다. 가람은 원래 강의 토박이말인데 이제토박이말은 사라지고 한자말 강만 남았다. 이 가람이 모여 모여서 바다로 간다.
바다는 다시 바닷가에 가까운 든바다가 있고, 뭍에서 멀리 떨어진 난바가다 있다. 하지만, 강처럼 이 든바다·난바다는 잊히고 근해·원양만 남았다. 바다에는 파도가 일 때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라 곧 메밀꽃이 있고,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은 크고 사나운 물결이 넘실거리며 너울이 친다.
7) 에움길ㆍ거님길ㆍ굽돌이길, 아름다운 길 이름들
▲ 비가 내리면 폭이 좁은 작은 도랑이 되고, 도랑이 커지면 개울이 되고, 개울이 모이면 시내가 되고, 시내가 모여 내가 되며, 내가 모이면 다시 가람으로 흘러간다. 가람이 모여 모여서 바다로 간다. |
우리 토박이말에는 아름다운 길 이름들도 있다. 늘어선 집들의 뒤쪽으로 난 길로 마을 앞 ‘큰길’에 상대되는 ‘뒤안길’, 차나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 길은 ‘한길’, 나지막한 산기슭에 경사지게 있는 좁은 길은 ‘자드락길’ 같은 말은 지금은 잊혔지만 예전에 많이 쓰던 아름다운 말이다. 이밖에 정겨운 말들로 우회로는 ‘에움길’, 등처럼 굽은 길은 ‘등굽잇길’, 본디 길이 없던 곳인데 많은 사람이 지나가 한 갈래로 난 길은 ‘통길’, 산책로는 ‘거님길’이라고 하며, 강이나 냇가에 돌이 많이 깔린 길은 ‘서덜길’, 미로(迷路)는 ‘홀림길’, 풀이 무성하게 난 길은 ‘푸서릿길’, 이라고 한다.
흔히 관공서에서 마을 안에 나있는 길을 ‘이면도로(裏面道路)’라고 억지 한자말을 만들어 쓰는 데 원래 있던 토박이말 ‘속길’을 살려 쓰고, 외래어와 우리말을 합친 커브길은 ‘굽돌이길’로 쓰면 좋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