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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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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함께 가마스 짜던 이야기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9]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해방을 맞은 뒤 얼마 안 되어 마을에는 호조조*가 건립되었고 남편 없는 엄마는 그래도 행복하게 일할 수 있었다 한다. 마을사람들은 늘 “저 불로집댁은 남성들과 짝지지 안아유, 수레몰기, 후치질*, 씨앗두기…… 머나 다 잘 한다니깐…”하고 칭찬들 하셨단다. 정말이지 검은치마에 흰저고리, 혹은 검은 몸베에 흰저고리를 입고 허리끈을 질끈 동이고 흰머리수건을 쓰신 엄마는 궂은일 힘든 일터에서 늘 쉽게 볼 수 있었다 한다. 집체로 일하여서 아버지 없는 우리집도 농사일을 쉽게 할 수 있었다 하더구나! 이렇게 살아가던 그때 마을의 한 청년이 외지에 갔다가 우연히 가마스(가마니) 짜는 부업일을 배워가지고 돌아와서 “아주머니, 내 돈버는 부업을 배워 왔는데 해봅소.”하더란다. 돈 번다는 소리에 마음이 확 쏠려 엄마는 “하지유, 몇 전이라도 해야지, 당장 큰애가 고중에 가겠는데……”. 하여 엄마는 마을의 다른 한 엄마와 함께 그 청년의 지도하에 가마스틀을 만들고 마을에서 첫 사람으로 누구도 해보지 못한 가마스라는 걸 짜보았단다. 그런데 새끼줄도 가쭌하게* 꼬지 못하여 가마스를 짤 때 가마스바디가 잘 오르내리지 못하였단다. 두 과부 엄마들은

엄마손은 약손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8]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엄마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오려고 하시는 그런 분이시었단다. 엄마의 손은 약손이어서 이마에 닿으면 머리가 안 아프고 배를 살살 문지르면 금시 아프지도 않아 엄마의 사랑엔 병들도 달아나는가 보구나! 어릴 때부터 건강하게 자라지 못한 나는 시름시름 자꾸 앓다보니 7살이었는데도 바람에 날려갈 가냘픈 체질이었고 얼굴은 백지장 같은 애였다는구나! 하여 엄마는 근심 가득하여 내손을 잡고 마을에서 좀 떨어진 소문난 의사 리장춘 한의를 찾아갔단다. 여기저기를 검사하던 의사는 약을 좀 많이 써야 애를 춰 세우겠다는 것이더란다. 돈 한 푼 없는 엄마는 가슴속을 지지누르는 천근 돌에 아픈 가슴을 끌어안고 약 한 첩도 못 사고 내손을 잡고 조용히 의사집 사립문을 나섰단다. 엄마는 나보고 “엄만 꼭 너를 살릴 거야……”. 나는 얼떨떨해 엄마만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란다. 이튿날 엄마는 삼촌네 손수레를 빌어 나를 앉히고 마을의 다른 분들과 함께 산 두개를 넘어 “말무덤장대”라는 산에 갔었단다. 내 기억 속에 그 산은 도처에 나리꽃, 도라지꽃, 방울꽃, 소불꽃…… 이름 모를 꽃들이 곱게도 피어 있더구나! 공기도 시원하구 기분도 좋

이불하나에 네 식구가 함께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7]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이불장을 펼치면 아롱다롱한 꽃이불들이 나를 보고 해시시 웃는구나! 그렇지, 지금은 집집마다 이불장이 넘쳐나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철철이 자기 이불이 따로 있고 폭신폭신한 그 꽃이불 속에서 모두들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지 않니? 그러나 쪼들리게 가난했던 50년대 그 시절 우리집에는 서발장대* 휘둘러도 거칠 것이란 없었단다. 롱짝 위에는 이불 두 채가 휑뎅그레 올라앉아 있었는데 이 허름한 이불 두 채가 우리 온 집안의 큰 재산이었다는구나! 얼굴에 늘 웃음기가 담겨있던 엄마의 복스런 얼굴은 31살의 꽃나이에 너무나 일찍 찬서리를 맞아 두 어깨엔 천만근의 무게를 짊어지셨단다. 아버지가 하늘나라에 가신 몇 해 뒤엔 “밥그릇 하나라도 줄이라”는 삼촌의 뜻에 쫓아 “근민중학교”를 다니는 언니마저 뚝 떼어 시집보내고 철모르는 우리 3남매를 데리고 농촌에서 아글타글* 고된 일을 하시면서 눈물겨운 나날을 보내시었단다. 세월이 흘러 1957년 큰오빠가 연변1중에 입학하였단다. 학비와 숙사비도 마련해야 했지만 이불도 큰 문제였단다. 우리집 형편에서 새 이불을 해 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단다. 엄마는 말없이 이불 한 채를 뜯어 씻고 끓이

통일된 나라의 고향에 가고 싶다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6]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누구나 다 자기의 소원이 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도 해마다 봄이 와 어김없이 피어나는 울타리안의 살구꽃을 보면 버릇처럼 엄마손 잡고 “또 살구꽃이 피였소. 얼마나 곱소? 내 고향에두 감나무 잘 자라고 있겠지?” 하곤 “난 정말 고향에 가보고 싶소. 해방된 내 나라 충주에서 우리 족보를 펼치고 떳떳이 충주김씨 가문회의를 열어야겠는데…… 언제면 이 소원 이룰지? 우리애들 잘 키워 학문으로 대를 잇게 하기요……” 먼 옛날 아버지는 남쪽의 감나무 우거진 충주에, 엄마는 또 멀리 북쪽의 갑산골에 태를 묻었다고 한다. 얼마 세월이 흘렀는지 지금도 북과 남은 그 “작은 금” 하나 그어놓고 동강난 땅덩어리 위에서 친인을 서로 그리며 목메어 설음에 흐느끼고 있지 않니? 일제 강점시기 나라 잃고 땅 잃고 살길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녔다는 수많은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지금도 메아리쳐 들려오는구나! 여섯 살에 아버지의 쪽지게에 앉아 사품치는* 두만강을 건넜다는 엄마의 서러운 이야기…… 애를 업고 물함지이고 남편 따라 두만강에 들어섰다는 외할머니의 구슬픈 이야기…… 열서너살에 동생들 손을 잡고 자기 아버지 따라 넘실거리는 압록강을 허둥지둥 건

하늘도, 아기도, 엄마도 울더란다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5]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집”이란 가족의 보금자리이고, “집”이란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행복의 요람일 것이다. “집”이란 엄마한테선 남편이고 우리에겐 “집”이란 곧 부모이지, 아버지 없는 우리집은 집 기둥이 뭉텅 끊어진 집이어서 쓸쓸한 기운이 꽉 차 있었다한다. 아버지가 온 집안의 병을 혼자 걷어 가지고 저 멀리 하늘나라로 떠나간 며칠 뒤였단다. 8살짜리 큰오빠가 깍재(갈퀴)로 검불을 끌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허약한 엄마는 연 며칠 울다보니 더욱 수척하여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더란다. 그런데 돌도 채 안 되는 어린 내가 먹구살겠다고 허둥지둥 기어가서 엄마 가슴만 허비더란다. 엄마가 밀치면 또 후둘후둘 기어가선 젖무덤에 매달려 울더라는구나! 엄마는 일어나지도 못하는데 어린 것은 울어대고…… 엄마는 기가 막혀 죽그릇을 들고 온 시동생보고 이렇게 말하더란다. “저앨 한족집에라두 주기요. 그게 더 좋지 않을까?” 시동생은 억이 막혀 말도 못하였다는구나! 그 뒤 며칠은 시동생만 오면 “애를 데려 가자는 집 없소?”하고 엄마가 자꾸 물었단다. 또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단다. 아침부터 가을바람에 검은 구름이 막 밀려오고 당장 큰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해방과 훈장 아버지의 죽음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4]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아버지네집은 8칸짜리 큰 초가집이었는데 뽀얀 흙으로 집벽과 가마목(부뚜막)을 곱게곱게 매질하여 아주 깨끗해 보이더란다. 집에는 재산이란 없지만 억대우(덩치가 매우 크고 힘이 센 소) 같은 삼형제가 부모님들을 모시고 소작농생활을 하면서 화목하게 살아가는 화기로운 대가정이더란다. 아침에 엄마가 정주 칸(부엌)에 나타나니 다섯 살짜리 녀자애가 쭁그르 달려와 엄마품에 매달리며 “엄만 어데 갔다 인제야 왔니?” 하면서 까만 눈에 맑은 빛이 흘러넘치고 엄마 뒤만 졸졸 따라 다니더란다. 엄마는 부끄러웠으나 어린 것이 불쌍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여 처음엔 동생처럼 돌보던 것이 점점 착한 엄마로 되었다는구나! 시집간 지 며칠 안 된 어느 하루 엄마는 시어머님과 함께 정주 칸에서 삼을 삶고 있는데 난데없이 웃방에서 글소리가 들려오더란다 엄마는 그 글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더란다. 하여 저도 몰래 살금살금 다가앉아 문틈으로 훔쳐보았는데 저도 몰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시어머님을 쳐다보았단다. 글쎄 새서방님이 흰 두루마기에 팔각모자를 쓰고 올방자(책상다리) 틀고 앉아 위엄스레 서당훈장질하고 있더란다. 엄마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몰라 멍해 있는데 시어

16살에 불로집 큰 며느리 되어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3]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세월이 흘러 분녀는 어느 사이 함치르한* 머리태가 치렁치렁한 북간도 예쁜 처녀로 자라나기 시작했단다. 분녀가 16살 되던 해의 단오절이었다는구나. 검은색 치마에 흰저고리를 입고 긴 머리태에 붉은색 댕기를 드리운 분녀도 처음으로 엄마 따라 그네터로 놀러 나갔단다. 하야말쑥한 동그스럼한 얼굴, 살포시 머리 숙이고 웃는 모습은 제법 아리따운 처녀라구 모두 칭찬하시더란다. 그런데 어떤 아주머님 두 분이 분녀 가까이 다가와 살뜰하게 이것저것 묻더란다. “와, 머리태가 좋기도 하구나! 몇 살이지?” 분녀는 안면 없는 사람과 처음 대면하는지라 부끄러우면서도 봉긋한 가슴이 이상하게 뛰더란다. 그러나 분녀는 엄마와 함께 기분 좋게 놀다가 집에 왔었단다. 그 후로부터 얼마 안 되어 분녀네 집에선 분녀를 시집보낸다고 하더란다. 과연 분녀는 뭐가 뭔지도 몰라 엄마에게 물으니 “사람 좋다는구나!”하더란다. 분녀는 그저 “사람 좋다는구나!” 그 말 한마디에 모든 시름 다 놓고 더 묻지도 안았단다. 하여 분녀는 신랑이란 사람은 한 번도 못 보았으나 데리러 온 그분을 따라 자그마한 보따리를 들고 걸어서 시집이라 하는 그 집에 갔단다. 그때 분녀는 “시

두만강을 건너온 소녀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2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이 연재는 엄마가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체로 되어있다) 1915년 음력2월 초봄을 맞는 따스한 날이었단다. 조선 함경도의 갑산골안 자그마한 오두막에서 감실감실한 머리에 까만 눈을 가진 오동통한 계집애가 이 세상에 고고성을 울리였단다. 집 앞에 늘 분꽃이 곱게 피어 가난하던 이 집에도 아름다움을 선사해 주던 고운 분꽃을 떠올리면서 그 애 아버지는 갓난애 이름을 분녀라 했다는구나! 분녀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갑산골에서 감자를 주식으로 하고 산나물 먹고 아버지가 꿀벌을 길러 만들어낸 꿀물을 마시면서 시름없이 건강하게 자라났단다. 분녀가 6살 되던 해란다. 흉년이 들어 먹을 것도 없는데다가 왜놈의 침략에 나라 잃고 땅 잃은 분녀의 아빠 엄마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부득불 살길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타국으로 떠났다는구나! 분녀 엄마는 어린 동생을 업고 보따리를 이고, 아버지는 지게를 지고 분녀와 12살 나는 분녀 오빠의 손을 잡고 길을 떠났단다. 가도 가도 끝없이 산을 넘고 고개를 지나 밤낮으로 걷기만 하더란다. 지금처럼 버스나 기차를 본적도 없는 분녀는 기진맥진해도 걸어야만 했단다. 걷고 또 걷고…… 걷다보니 앞에 큰 강이 있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