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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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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보고 계십니까?”

엄마의 눈물 네 번째, 엄마의 회갑날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22]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음력 2월이었다. 겨울 나그네가 마지막 추위를 걷어안고 막 떠나갈 준비를 하는 쌀쌀한 날이었단다. 밖은 추웠어도 우리집에선 행복의 꽃 웃음꽃들이 만발하게 피어 있는 따뜻한 봄날이었지. 엄마의 회갑날이었단다. 전날부터 우리집엔 외지 친척들이 모여들어 큰형님과 큰언니는 가마목에서 개미처럼 맴돌아 쳤단다. 친척들은 30㎡도 채 안 되는 온돌집에서 엄마 주위에 모여 앉아 옛이야기에 웃음꽃을 피우시면서 밤가는 줄 모르셨단다. 그 시절엔 지금처럼 큰 식당에서 음식상 받고 정중한 마이크 소리도 없이 집의 온돌방에서 회갑잔치를 치를 때였지. 집에서 손수 만드신 음식도 나누어 먹고 축복은 하였어도 돈을 안고 다니지도 않았으며 간단한 예물로 인사를 표시하였단다. 그러나 저마다의 행복한 모습, 사랑으로 보내는 미소들은 온 집안을 눈부시게 하였지. 하얗게 회칠한 깨끗한 벽에는 고운 벽보(그때는 햇대보라고 불렀단다.)로 병풍을 대체했고 다른 한 벽에는 모 주석 초상화가 정중히 걸려 있었단다. 엄마는 고운한복 차림하고 호랑탄자 위에 꽃방석을 깔고 앉으시었다. 아버지 없는 빈자리라구 회갑 안 세겠다는 것을 큰언니 큰오빠가 토론하여 결정하셨단다. 네 자식

“그럼 그렇지, 우리 아들인데...”

엄마의 눈물 세 번째, 장춘서 날아온 편지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21]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엄마는 날마다 흥에 겨워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면서 일하려 다니셨단다. 엄마는 사범학교 교직원 식당일을 혼자 하시었지. 집에는 시계도 없었기에 새벽이면 하늘의 칠성별을 시계로 삼아 아침준비를 대강해 놓으신 뒤 바삐바삐 일하려 가시었단다. 우리집은 공원가에 있었는데 사범학교는 지금의 연변2중 동쪽에 자리잡고 있었단다. 연변병원을 지나 동쪽으로 가는 길부턴 인가가 없는 채소밭이었고 도중 길옆에는 비석 하나가 있었는데 거기에선 간혹 강도가 나타나서 행인들에게 늘 불안감을 주었다한다. 그러나 엄마는 편안히 그 식당 휴식실에서 쉴 수 없었단다. 집에는 둘째오빠와 내가 학교에 다니므로 엄마가 와서 돌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단다. 집의 밥은 비록 대부분 내가 했어야 했었지만. 그러나 엄마의 가르침이 없고 나를 깨워놓지 않으면 오빠와 나는 밥도 못해 먹었단다. 일요일이면 엄마는 또 다른 삯일을 하시면서 돈을 벌었단다. 그러나 엄마는 늘 웃음띤 얼굴로 별을 이고 다니시었단다. 이렇게 비가오고 눈이 오면서 세월이 흘러 곡식들이 우썩우썩 자라는 푸르름의 칠월말이었지. 장춘으로부터 편지 한통 날아왔단다. 지금처럼 전화가 있고 휴대폰이 있으면야 얼마나 좋

불난 집이 잘 산다는데..., 흐느끼던 엄마

엄마의 눈물 두 번째, 집에 불 나던 날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20]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훤칠한 체격은 아니었어도 늘 깨끗하게 곱게 머리를 얹고 거짓 없는 맑은 모습, 인자하시면서도 강인한 성격을 가지신 우리 엄마에겐 그 어떤 곤란도 전승(싸워서 이김) 못할 것이란 없었단다. 농촌에서 밭일을 하곤 돌아와선 또 가마스를 짜서 애들을 공부시키던 엄마는 끝내 자식들을 위하여 연길시로 혼자 이사하려고 하셨단다. 그때 큰오빠는 장춘에서 둘째오빠는 룡정에서 나는 그냥 농촌의 인민공사식당에서 밥을 먹곤 식구가 많던 둘째 삼촌집에 있게 하였단다. 엄마는 돈을 벌기위해 그리고 둘째오빠와 나의 학습을 위하여 연길에 집을 잡고 일하여 돈을 직접 벌어 우리를 공부시키려는 타산(계산)이었단다. 도문에 있던 큰 언니는 “아는 사람 한사람도 없이 어떻게 시내에 가서 살겠냐?”며 무조건 엄마를 자기집에 모셔 갔단다. 엄마가 할 수없이 농촌을 떠나 큰딸집에 갔지만 나와 둘째오빠의 공부를 위하여 언니의 권고도 마다하고 끝내 연길에 이사했단다. 처음엔 지금의 공신에다 집을 잡았다가 공신 역시 농촌구역(그때는 농촌이었다)이여서 애들이 보는 것도 또 학교도 멀기에 다시 연길시 3중 부근에 집을 마련하였단다. 집이라야 12㎡(약 3.6평) 밖에 안 되는

철부지들을 두고 어딜 혼자 갔습둥?

엄마의 눈물 첫번째, 울바자 세우던 날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19]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엄마는 자애로운 분이었다. 그리고 생활의 강자였단다. 일은 힘들고 생활은 곤란했어도 말없이 이겨냈었고 철모르는 우리를 욕하거나 때리는 법 없었단다. 그러나 나도 커가면서 종종 엄마가 흘리는 눈물을 보았었다. 엄마의 눈물은 설음의 눈물, 기쁨의 눈물, 감사하여 흘린 눈물이었다. 내가 6~7살 되던 해의 싸늘한 늦가을의 어느 날이었단다. 맑은 날씨지만 나뭇잎이 우수수 바람에 떨어져가는 늦가을의 싸늘한 날이었다. 오빠네들은 학교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엄마는 나를 보고 “오늘 시간이 있을 때 쉬바자(수숫대울타리)를 세워야겠다. 너라도 날 도와줘야겠구나.고 하셨다. 그 시절엔 겨울바람을 막기 위해 집의 3면에 수수짚으로 바자를 세웠단다. 엄마는 땅을 낮게 파고 거기에 수수대들을 둥그렇게 세웠단다. 가을바람에 세워놓은 수수대들이 떨더구나! 엄마는 바삐 띠를 대면서 나를 불렀단다. 엄마는 밖에서 나는 안에서 엄마가 밀어주는 수수끈을 되받아서 다시 수수대 사이로 엄마에게 넘겨줘야하는데 어린 나는 잘 안되더구나. 추워서 몸은 떨렸고 언손은 말을 듣지 않아 그만 세워놓은 바자를 나는 몽땅 넘어 뜨렸단다. 엄마는 어이없어 하시면서도 또 다시

인간과 벌레와의 전쟁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18]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전쟁”이라면 아마 “때리고”, “부수고”, “마스고(짓찧어서 부스러뜨리고)”, “폭격하고”, “총과 대포 비행기 출동”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힘으로도”, “총으로도” 하지 않는 전쟁이 있었는데 바로 벌레들과의 전쟁이었단다. “벌레”라는 말만 들어도 나는 무섭고 징그럽고 더러워 메스껍고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단다. 아마도 1952년이던 것 같다. 벌레와의 전쟁을 해야만 하는 인간들은 아직 그 어떤 살상화학약품도 발명해 내지 못하였단다. 아마도 해방된 지 오래지 않아서 공업이 발달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 같으면야 비행기로 쏵 분무하면 될 것을……. 도처에 파리떼가 욱실거렸고 길가의 나무에, 곡식밭에 온통 이름모를 벌레가 욱실거려 방금 자라나고 있는 곡식밭을 요정낼 잡도리를 하는가 싶더구나. 벌레들은 곡식대에 매달려 곡식의 잎사귀로부터 속대까지 먹고 있어 그대로 방치해둔다면 곡식밭은 그야말로 밀대를 놓을 것이고(뻔뻔하게 싹 없앨 것이고)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눈 뻔히 뜨고 있게 될 판이었단다. 탄알도 쓸데 없구, 힘도 쓸데없었으나 전쟁은 반드시 해야만 했었단다. 하여 전민이 동원되어 밟아 죽이고 쓸어서 태워 죽이는 방법이

너절로 가마니 짜서 필통을 사거나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17]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해도 웃고 달도 웃는 아름다운 이 세상에서 나는 오늘도 파아란 하늘을 쳐다보며 흥얼흥얼 노래하고 있는데 소학교에 다니는 손녀가 곱디 고운 필통하나를 들고 불쑥 나타났다. 아롱다롱한 필통은 나를 보고 방긋이 웃었다. “곱구나!” 내 눈길이 자꾸 필통으로만 갔다. 이 나이에도 볼수록 갖고 싶은 충돌을 느낌은 왜서일까? “엄마가 사 주었어요.” 손녀의 말이다. “엄마!” 엄마라는 손녀의 말에 왜서인지 나도 마치 어린애인양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고 서서히 내 눈앞에 내가 여나문살도 안될 때의 단발머리 소녀가 나타났다. “엄마, 나 필통사주!” 엄마는 조용히 날 달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일찍 내가 돐도 채 되기 전에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보내시고 우리 네 남매를 키우느라 아글타글(무엇을 이루려고 몹시 애쓰거나 기를 쓰고 달라붙는 모양) 눈물겨운 나날을 보내시었단다. 하기에 나는 5학년 될 때까지 그렇게 갖고 싶던 필통 하나도 없이 늘 연필을 책장 사이에 끼워 책보에 싸서 허리에 띠고 뛰어다녔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면 옆의 애가 필통을 꺼내 척 열고 연필을 꺼내는 모습 그렇게도 황홀하게 보였고 심지어 밖에서 달음질할 때 책보

마음의 열쇠는 잠그지 말아라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16]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우리집 책상 서랍을 열면 작은 함 하나가 있는데 그 함 안에는 크고 작은 갖가지 열쇠가 이쁜 고락지*에 매달려 있는 것이 십여 개도 남아 된다. 집 열쇠, 조카네집 열쇠, 친구집 열쇠, 딸집 열쇠, 창고의 이 상자 저 상자 열쇠, 트렁크 열쇠, 서랍 열쇠, 손녀일기장 열쇠, 또 트렁크 비밀번호…… 침실열쇠, 자전거 열쇠, 차열쇠, 또 거기에 마음의 열쇠까지…… 일기장하나를 펼치려 해도 집열쇠, 책상열쇠, 일기장열쇠를 써야하니 그야말로 열쇠 안에 열쇠, 또 그 열쇠 안의 열쇠를 열어야 한다. 사람들의 심리란 참 이상도 하다. 그 자그마한 자물쇠 하나에 온집 재산을 싹 맡기고 또 자기만의 각종 비밀도 숨기기도 한다. 하기야 열쇠와 자물쇠의 임무가 중요한가 보다. 그러나 먼 옛날 엄마네 시대엔 온 하루 밭에 나가 일하면서 집은 비웠건만 열쇠 잠그는 법이 없었단다. 돈이 없어서 열쇠를 살돈이 없어서였던지, 아니면 도적놈 가져갈 물건이 없어서였던지…… 엄마는 일밭으로 가실 때면 꼭 “열쇠”를 잠그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열쇠”란 문틀에 못 하나를 박고 손잡이에 끈을 매여 못과 손잡이를 끈으로 동여 놓는 것이었단다. 혹은 빗장으로 혹은

어려운 시절 함께 견딘 엄마의 절약독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15]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엄마시절, 우리집에 문 열고 들어서면 부엌으로부터 온돌위의 공상(팔걸이와 등받이가 없는 걸상)에까지 줄느런히 장독, 간장독, 물독, 쌀독……들이 있었는데 창고가 따로 없던 자그마한 집이었건만 한꺼번에 엄마의 깨끗함과 알뜰함이 한눈에 안겨 왔었다. “와~ 이 짐독(큰 단지)은 곱기두 하오? 반질반질하네……” 지금처럼 오지독이면야 얼마나 좋으련만, 그때엔 전부 토기독들이었단다. 마을의 엄마들은 만져도 보고 독을 열어도 보시더란다. “와~ 입쌀(하얀쌀)? 이렇게 많이?”모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엄마를 쳐다보시더란다. 바로 이 제일 고운 짐독은 아무도 모르는 엄마의 “절약독”이었단다. 이 독에는 늘 보기 좋게 입쌀이 넉넉히 들어 있었단다. 엄마는 우리에게 “모주석(모택동 주석)께선 랑비는 최대의 수치라고 하셨단다. 올해 풍년이지, 계속 풍년일지 알 수 없지 않니? 흉년이 들면 바가지 들고 어디 가서 빌어먹겠니? 랑비는 말아야한다.”고 하셨단다. 하기에 엄마는 밥 할 때마다 한줌씩 꺼내어 절약독에 놓고 이삭 주은 쌀도 가끔씩은 절약독에 넣곤 마음대로 꺼내지 않으셨다고 하는구나! 이것은 점차 엄마의 습관으로 되였단다. 하기에 이 고운 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