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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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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열쇠는 잠그지 말아라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16]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우리집 책상 서랍을 열면 작은 함 하나가 있는데 그 함 안에는 크고 작은 갖가지 열쇠가 이쁜 고락지*에 매달려 있는 것이 십여 개도 남아 된다. 집 열쇠, 조카네집 열쇠, 친구집 열쇠, 딸집 열쇠, 창고의 이 상자 저 상자 열쇠, 트렁크 열쇠, 서랍 열쇠, 손녀일기장 열쇠, 또 트렁크 비밀번호…… 침실열쇠, 자전거 열쇠, 차열쇠, 또 거기에 마음의 열쇠까지…… 일기장하나를 펼치려 해도 집열쇠, 책상열쇠, 일기장열쇠를 써야하니 그야말로 열쇠 안에 열쇠, 또 그 열쇠 안의 열쇠를 열어야 한다. 사람들의 심리란 참 이상도 하다. 그 자그마한 자물쇠 하나에 온집 재산을 싹 맡기고 또 자기만의 각종 비밀도 숨기기도 한다. 하기야 열쇠와 자물쇠의 임무가 중요한가 보다. 그러나 먼 옛날 엄마네 시대엔 온 하루 밭에 나가 일하면서 집은 비웠건만 열쇠 잠그는 법이 없었단다. 돈이 없어서 열쇠를 살돈이 없어서였던지, 아니면 도적놈 가져갈 물건이 없어서였던지…… 엄마는 일밭으로 가실 때면 꼭 “열쇠”를 잠그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열쇠”란 문틀에 못 하나를 박고 손잡이에 끈을 매여 못과 손잡이를 끈으로 동여 놓는 것이었단다. 혹은 빗장으로 혹은

어려운 시절 함께 견딘 엄마의 절약독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15]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엄마시절, 우리집에 문 열고 들어서면 부엌으로부터 온돌위의 공상(팔걸이와 등받이가 없는 걸상)에까지 줄느런히 장독, 간장독, 물독, 쌀독……들이 있었는데 창고가 따로 없던 자그마한 집이었건만 한꺼번에 엄마의 깨끗함과 알뜰함이 한눈에 안겨 왔었다. “와~ 이 짐독(큰 단지)은 곱기두 하오? 반질반질하네……” 지금처럼 오지독이면야 얼마나 좋으련만, 그때엔 전부 토기독들이었단다. 마을의 엄마들은 만져도 보고 독을 열어도 보시더란다. “와~ 입쌀(하얀쌀)? 이렇게 많이?”모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엄마를 쳐다보시더란다. 바로 이 제일 고운 짐독은 아무도 모르는 엄마의 “절약독”이었단다. 이 독에는 늘 보기 좋게 입쌀이 넉넉히 들어 있었단다. 엄마는 우리에게 “모주석(모택동 주석)께선 랑비는 최대의 수치라고 하셨단다. 올해 풍년이지, 계속 풍년일지 알 수 없지 않니? 흉년이 들면 바가지 들고 어디 가서 빌어먹겠니? 랑비는 말아야한다.”고 하셨단다. 하기에 엄마는 밥 할 때마다 한줌씩 꺼내어 절약독에 놓고 이삭 주은 쌀도 가끔씩은 절약독에 넣곤 마음대로 꺼내지 않으셨다고 하는구나! 이것은 점차 엄마의 습관으로 되였단다. 하기에 이 고운 독

엄마가 몹시 아끼셨던 놋그릇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14]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한가위도 오래지 않은 따뜻한 가을의 어느 날이었단다. 나는 아버지산소에 올릴 메밥을 담을 그릇으로 덥개가 있는 자그마한 불수강식기(스테인리스 스틸 식기)를 하나 사들고 집에 왔었다. 그 식기를 한참 보시던 엄마는 불쑥 “너 놋그릇 기억나니?” 하여 내가 “예, 놋이면 동으로 만든 구리그릇인데 옛날 엄마가 그 그릇에 밥이랑 떠주었잖아요?” “너 어릴 때 일인데 그래도 기억있구나!”하셨다. ‘ 그때엔 전부 구리(놋)로 만든 밥식기, 놋대접, 놋소래, 놋다라 같은 것들을 쓰셨다 한다. 우리집은 큰집가문으로 이런 그릇들이 많아 살강엔 보기 좋게 올망졸망 앉아있었다는구나! 이런 놋그릇들은 벼짚으로 닦아야 윤기가 돌기에 그릇을 보고도 그 집의 엄마들의 깨끗하고 알뜰함을 갸늠했다는구나! * 놋소래 : 놋으로 만든 소래기, ‘소래기’는 굽 없는 접시 모양의 넓은 질그릇 우리 조선민족도 여느 민족처럼 아주 깨끗하고 례절바른 민족이 아니니? 윤기 도는 놋식기에 하얀이밥(새하얀 쌀밥)을 담고 덮개로 꼭 덮고 올망졸망한 놋공기에 김치며 젖갈들을 담고 놋대접에 국을 떠서 놋숫가락 놋젖가락을 놓아 동그란 밥상에 받쳐 흰앞치마 두른 며늘아기가 손수 시

눈물 흘리며 먹었던 엄마의 고추장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13]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조선족하면 고추장은 빠질 수 없는 음식 가운데 하나가 아니니? 하기에 파, 마늘, 고추는 우리의 식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저항력을 키워주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어릴 때 체질이 약했던 나는 냄새가 나는 마을, 파, 당근, 썅채* 등은 무조건 싫어했고 고추장은 맵다고 그 언저리에도 안가는 나쁜 습관이 있었단다. 엄마가 아무리 말해도 이 습관만은 고칠 수 없었단다. 엄마는 알뜰하기로 마을에서 소문 높았고 음식솜씨도 누구한테 짝지지* 않은 분이었단다. 늘 음식을 만들 때면 하얀 앞치마를 꼭 두르고 머릿수건을 쳤는데 고추장을 만들 때에도 잘 말린 고추를 씨를 털어내곤 잘 찧었단다. 그리고 눅게 한 하얀 찰밥과 물엿을 넣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게 빨갛고 달콤한 고추장이었지 이것을 작은 항아리에 꼭 넣고 조금씩 꺼내어 먹군하였단다. 엄마표 고추장은 색깔도 맛도 좋아서 동네 엄마들이 늘 칭찬을 하셨고 종지를 가지고와선 좀씩 빌어가면서 “이 고추장 하나면 다른 반찬 필요 없겠는데. 이집 저 새끼는 안 먹는다면서요? 저 새끼 몫을 우리 다 먹자구……”하면서 나를 놀려도 주었단다. 엄마는 봄이면 달래, 세투리*, 민들레, 반짜

력사의 한 페이지로 남은 엄마의 학교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12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학교”하면 누구든지 백양나무 우거진 넓다란 운동장,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운 화단, 글소리 랑랑히 들려오는 아담한 교실, 뽈소리, 노래소리,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들려오는 유리창문의 큰집을 눈앞에 그려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우리 엄마들은 학교를 얼마나 부러워했을까? 그러던 1954~1955년 가을이라고 기억되는구나! 하루는 엄마가 나보고 “정부에선 문맹퇴치를 하라는구나. 우리를 눈뜨게 해준단다.” 하시면서 환한 웃음을 피우시더구나. 나는 어리둥절하여 “엄마, 문맹퇴치가 먼데?” “우리를 글을 배우라는구나. 눈을 뜨라구…” “머요? 그럼 엄마두 나와 같이 학교에 붙어요?” “글쎄, 나두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기회에 배워야겠는데… 후유…” 며칠 후였단다. 엄마는 웃으면서 “됐다. 나도 글을 배우게 되였단다. 이젠 우리집이 ‘엄마의 학교’로 되는 거야.” 나는 무슨 말인지 몰라 말똥말똥 엄마만 쳐다보는데 엄마는 “내가 집일도 해야겠기에 우리집을 내놓아 엄마네 학교로 하자구 하였단다.” 하시더구나. 이튿날 엄마는 산에 가서 보얀 흙을 파다가 집벽을 깨끗이 매질하고 집 깔개도 말끔히 닦더구나. 또 그 이튿

엄마의 ‘마술’, 흰 광목이 검은빛 천 되어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11]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지금은 옷가게나 천가게에 가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천들로 하여 나는 마음은 자못 흥분되고 감탄의 함성까지 나오군 한단다. 나도 처음엔 종종 곱고도 좋은 천들을 보면 가끔씩 흥분하여 보자기감으로 조금씩 사기도하는 버릇이 있었단다. 집에 있는 이러저런 꽃보자기들을 볼 때마다 나는 엄마의 자그마한 꽃주머니 속에서 엄마가 모아두었던 꽃천 조각들을 회상해 보군한단다. 엄마는 얼마나 갖고 싶었으면 그런 보잘것없는 헝겁오리까지 두고 보았을까? 멀고먼 옛날 1950년대 초 해방된 지 5~6년 밖에 안 되어 잘 살지 못 할 때였단다. 그런데다 아버지까지 없는 우리집은 가난할 때로 가난하였고 검은색바지 하나 사입자 해도 돈도 없었지만 천도 구하기 퍽 힘들었단다. 그렇다하여 학교 다니는 오빠들에게 흰광목 그대로 옷을 해입힐 수도 없었다는구나. 벌써 가을이 다가왔으니 겨울 준비도 해야했었다한다. 하루는 엄마가 나에게 “너 오늘 새끼줄 잘 꼬면 검은색바지 하나 해줄게, 엄마는 산에 갔다가 좀 늦게 온다.”고 하시더구나. 엄마는 큼직한 보자기를 들고 앞집 엄마랑 같이 산쪽으로 가시더구나. 나는 이상하여 머리를 저으며 집에 들어와 새끼줄을 꼬았단다. 이

5점짜리 개구쟁이가 대학교 교수 되다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10]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옛날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공부시키기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하였다는 “맹모삼천”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오늘까지도 우리들에게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지 않니? 나의 엄마도 네 자식을 홀로 키워야하는 중임을 떠메고 농촌에서 눈물겨운 고생을 꺾었었단다. 하지만 “자식은 공부시키고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늘 마음속에 간직했었다한다. 하여 애들의 장래를 위하여 농촌을 떠나 먼저 큰딸이 살고 있는 도문시에 갔다가 다시 연길시 공신에 이사를 하였다는구나! 공신이 연변대학과 가까워 좋다고 여겼지만 그때의 공신은 여전히 농촌이어서 안 되겠더란다. 하여 또다시 연길시 3중에 가까운 공원가에 이주하니 학생들도 많이 보고 아침이면 공원에 나가 공부도 할 수 있었기에 (그때 연길공원은 문표*가 5전이였는데 아침시간엔 표를 받지 않았고 학생들이 공부하는 장소로 되었단다.) 제일 좋은 곳이라 생각되어 오막살이일망정 우리에겐 고대광실로 여겨졌단다. 자식들을 위하여 세 번이나 이사한 엄마는 이 오막살이집에서 심혈을 기울여 최후로 자식들을 성장 시켰단다. 그중에서도 반급 꼴찌였던 100점제에서 5점을 맞던 둘째오빠를 대학교 교수로 성장시킨 엄마의 사랑

엄마와 함께 가마스 짜던 이야기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9]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해방을 맞은 뒤 얼마 안 되어 마을에는 호조조*가 건립되었고 남편 없는 엄마는 그래도 행복하게 일할 수 있었다 한다. 마을사람들은 늘 “저 불로집댁은 남성들과 짝지지 안아유, 수레몰기, 후치질*, 씨앗두기…… 머나 다 잘 한다니깐…”하고 칭찬들 하셨단다. 정말이지 검은치마에 흰저고리, 혹은 검은 몸베에 흰저고리를 입고 허리끈을 질끈 동이고 흰머리수건을 쓰신 엄마는 궂은일 힘든 일터에서 늘 쉽게 볼 수 있었다 한다. 집체로 일하여서 아버지 없는 우리집도 농사일을 쉽게 할 수 있었다 하더구나! 이렇게 살아가던 그때 마을의 한 청년이 외지에 갔다가 우연히 가마스(가마니) 짜는 부업일을 배워가지고 돌아와서 “아주머니, 내 돈버는 부업을 배워 왔는데 해봅소.”하더란다. 돈 번다는 소리에 마음이 확 쏠려 엄마는 “하지유, 몇 전이라도 해야지, 당장 큰애가 고중에 가겠는데……”. 하여 엄마는 마을의 다른 한 엄마와 함께 그 청년의 지도하에 가마스틀을 만들고 마을에서 첫 사람으로 누구도 해보지 못한 가마스라는 걸 짜보았단다. 그런데 새끼줄도 가쭌하게* 꼬지 못하여 가마스를 짤 때 가마스바디가 잘 오르내리지 못하였단다. 두 과부 엄마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