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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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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 이름은 ‘큰엄마’였다

이불을 쓰고 장밤을 울었던 큰엄마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28]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사람마다 이름이 다 있건만 둘째 고모의 이름은 무엇인지 모두 큰엄마라 불러 고모의 이름은 결국 큰엄마였단다. 엄마에겐 이상 시누이 셋이 있었는데 둘째 시누이는 중국에서 살다가 해방 뒤에 조선 함경북도 청진군 온성에서 살았다고 한다. 어느 하루 엄마는 “이제 며칠 뒤에 우리 고모네 집에 가보자. 그 집엔 고모가 두분 계시는데 큰고모가 너희 아버지의 누님이시란다.”. “예? 그럼 한 분은 누구시죠? 고모라면서……” 하여 엄마는 “넌 아직 어려서 말해도 잘 모를 것이니 더 묻지 말고 그저 례절만 지켜주면 된다.”라고 하셨단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단다. 과연 며칠 뒤(1959년 겨울방학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도문해관을 걸쳐 조선 온성으로 갔단다. 온성고모는 달려 나와 우리를 맞았는데 훤칠한 키에 쌍겹진 두 눈, 말쑥한 얼굴은 이미 60살을 넘으셨다는 고모의 미모를 감추지 못하였더라. 고모는 한겨울 아침에 찾아간 나의 꽁꽁 언 두 손을 자기 가슴속에 넣어 녹여 주시면서 “너 많이 컸구나! 아버지 없이 막내로 서럽게 보냈겠구나!” 하여 난 불시에 눈물을 뚝 떨구면서 고모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단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가 보더라. 작은고모라

흰 행주치마를 두른 엄마

백의민족의 하얀넋을 지켰다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27]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행주치마” 하면 우리 백의민족 부녀들의 맑고 깨끗한 모습들이 확 떠오른다. 지금은 주방에서 남녀가 모두 즐겨 입는 것이어서 모양도 색깔도 가지각색이다. 이 “행주치마”를 보통 “앞치마”라고 한단다. 우리 엄마는 특별히 “흰 앞치마”를 사랑하시는 깨끗한 분이시란다. 어린나이에 시집온 뒤 늘 가마목*의 큰집며느리로 살아오시면서 흰 저고리 검은색치마를 깨끗이 입고 흰 앞치마를 입고 가마목일을 하셨다하더구나! 이것은 일종 습관으로 되여 부엌일을 할 때면 우리가 옷을 입는 것처럼 여기시었단다. 흰 앞치마를 두르고 일하시는 엄마를 보면 어린 나는 “우리 엄마가 제일 멋진 엄마”로 보여 늘 흐믓한 기분이었단다. 뒤에 내가 커가면서 교과서에서 “행주치마” 이야기 곧 조선의 녀성들이 행주치마폭에 돌을 날라 왜놈들과 싸웠다는 미담을 배웠을 때 이렇듯 행주치마는 조선 녀성의 고귀한 품성을 길이 전해가고 있음을 느끼었단다. 엄마가 칠십고개에 올라섰을 때란다. 엄마는 흰천으로 보기 좋게 크고 작은 앞치마 두벌을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엄마에게 “왜 또 앞치마예요? 아직도 주방을 못 잊어서요?” “아니, 이 좋은 세월에 내손으로 한 번 더 일해보구

하얀설기, 깨끗한 백의동포 마음의 상징

이국땅에서 화전땅 일구어 하얀 설기떡를 빚었다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26]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나는 하얀설기(백설기)를 무척 좋아한다. 오늘도 나는 시루떡(설기떡 또는 셀기떡이라고도 함) 소리에 그만 그 옛날 엄마의 시루떡을 눈앞에 그려보게 되였다. 하얀 머리수건을 쓰고 하얀 앞치마를 두른 함박꽃 같은 엄마의 고운 얼굴 모습이 떠오르는 중에 고향집 온돌 가마목에서 엄마가 큰쇠가마 뚜껑(솥뚜껑)을 연다. 그러면 피어오르는 흰 안개 속을 헤치고 둥그런 쇠가마 안에선 반듯한 흰설기가 어린 나를 보고 활짝 웃어준다. 와!- 보기만 해도 입이 함박만해지고 군침이 꼴깍 넘어간다. 나는 혼자 시무룩이 웃었다. 사실 우리 민족음식 문화엔 설명절이거나 잔치상을 물론 최근에는 또 대학입학 시험 때에 학교대문에 보란 듯이 척 붙어있는 아주 급 높은 찰떡도 있지만 잔칫상, 생일파티, 아가의 백일잔치에도 빠질 수 없는 백설기도 그 이름을 더욱 뽐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엄마는 이런 하얀설기를 잘 만드셨고, 나는 또 엄마의 하얀설기를 무척이나 좋아하였고 그 매력에 푹 빠졌다. 하얀설기의 매력은 하얀 깨끗함이다. 하얀 깨끗함은 깨끗한 백의동포 마음의 상징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깨끗함을 즐겼고 흰옷을 즐겨 입었기에 “휜옷 입은 사람”, “백

구류당한 큰오빠

한족대학에 당당히 붙어 기뻐하다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25]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푸름의 계절이다. 해맑은 하늘가엔 꽃구름 피고 전야(논밭과 들)엔 푸른 물결이 출렁이고 싱그러운 풀냄새가 그윽이 풍겨오는 계절이다. 저기 하얀 감자꽃들은 그 어여쁨을 뽐내면서 활짝 웃어준다. 울타리안의 파란 채소들이 서로 키돋움하고 가지 고추 오이…… 들은 제가 먼저 컷노라 웃어 보이고…… 앞내에선 아이들의 물장구 소리가 와짝 들려온다. 젊음과 랑만의 계절 희망의 계절이었단다. 큰오빠는 연변1중 필업장(졸업장)을 안고 대학시험도 마치고 부풀어 오르는 심정을 안고 고향길에 올랐단다.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대학시험 치는데 요란한 대부대 응원단도 없었고 대문에다 찰떡, 차표를 부쳐놓는 일도 없이 그냥 조용히 저 혼자 시험을 마치고 이불짐을 메고 고향에 돌아왔단다. 고향이야기 대대로 전해주는 백살도 넘는 아바이 비술나무가 7자로 자라 동구 밖에서 오빠를 맞았고 늘 고향이야기 싣고 조잘조잘 흐르는 시내물이 오빠를 맞았으며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이 오빠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단다. 마을에 들어서자 아랫집 말뚝의 얼룩배기 황소가 음메하고 오빠의 귀향을 알렸고, 바빠서 신발도 바로 못 신고 엎어질세라 한 녀인이 달려나간다……. “왔구나! 시험

제사상 차림을 들고 30리길을

60여 년 선산을 지켜 엄마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24]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선산이란 곧 우리 선조들의 넋이 주무시는 곳이란다. 우리 백의민족의 넋도 장백산 높은 봉에서 늘 아래를 굽어보며 민족의 번영창성을 기원하고 있단다. 력래로 사람들은 어느 집 가문이 잘되면 “선산을 잘 썼겠다.”라고 잘 안되면 “선산을 잘못 썼는가? 선산에 가서 제를 잘 지내라.”고 하는 소리 가끔씩 들리지. 그래서인지 우리 백의민족은 선산을 잘 모시고 제사상 잘 갖추는 것을 한낱 례의로 문화전통으로 전해지고 있지. 엄마는 16살에 큰집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늘 알뜰살뜰 제사상을 준비하여 80살까지 60여 년 동안 한해라도 빠짐없이 선산에 다녀오셨단다. 1946년 10월 아버지가 저세상 가신 뒤에도 우리들을 데리고 10상이나 되는 선산들에 일일이 제사상 올리시었지. 1958년 자식들의 공부를 위해 고향을 떠나 연길시에 이주 했어도 선산을 모시는 엄마의 정성은 여전했었단다. 엄마는 제사상 차림을 들고 버스도 없는 30리길을 걸어 고향마을의 어느 집에 미리 맡겨두었던 낫과 삽을 이용하여 선산들을 일일이 보살피시고 술향기, 미나리향기를 올리는 것을 잊지 않으셨단다. 그리고 물고기는 제사상의 어느 자리에 놓아야하고 후토로부터 제사상 올

무꼬랭이를 쥐꼬리로 둔갑시키다

나의 첫 거짓말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23]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엄마는 내가 어릴 때 늘 “례절이 바르고 거짓말하지 말며 남의 물건을 탐내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단다. 엄마들 마음이란 항상 자식에게 “먼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이었지. 하기에 어릴 때 거짓말을 한다면 엄마들은 사정없는 교육을 했단다. 얼마 전에 손자놈이 나하고 “할머닌 어릴 때 선생님과 거짓말 해봤습까?”하고 불시에 묻더구나! 하기에 내가 “너 무슨 일 있었니?” 하였더니 자기네 반급의 어느 애가 선생님과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에 나는 갑자기 내가 1학년 때 선생님과 첫 거짓말하던 그때를 눈앞에 그려 보면서 “거짓말? 어떤 거짓말? 나도 빨간 거짓말은 해본 적 있지.”하고 웃었단다. “할머니, 거짓말에 무슨 빨갛구 까만 것이 있나요? 별난소리 다 한다야.” “응, 거짓말에도 남에게 기쁨을 주는 아름다운 거짓말이 있는가하면 나쁜 마음으로 남을 기편하는(사람을 속이고 재물을 빼앗는) 거짓말도 있기에 색갈이 있다고 하는 거다. 빨강, 파랑, 노랑, 하얀, 까만, 거짓말 말이다.” “너 들어봐라, 혁명시기 놈들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하던 혁명가들은 ‘모른다. 죽어도 모른다……’ 당연히 알면서도 비밀을 지켜가는

“아버지 보고 계십니까?”

엄마의 눈물 네 번째, 엄마의 회갑날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22]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음력 2월이었다. 겨울 나그네가 마지막 추위를 걷어안고 막 떠나갈 준비를 하는 쌀쌀한 날이었단다. 밖은 추웠어도 우리집에선 행복의 꽃 웃음꽃들이 만발하게 피어 있는 따뜻한 봄날이었지. 엄마의 회갑날이었단다. 전날부터 우리집엔 외지 친척들이 모여들어 큰형님과 큰언니는 가마목에서 개미처럼 맴돌아 쳤단다. 친척들은 30㎡도 채 안 되는 온돌집에서 엄마 주위에 모여 앉아 옛이야기에 웃음꽃을 피우시면서 밤가는 줄 모르셨단다. 그 시절엔 지금처럼 큰 식당에서 음식상 받고 정중한 마이크 소리도 없이 집의 온돌방에서 회갑잔치를 치를 때였지. 집에서 손수 만드신 음식도 나누어 먹고 축복은 하였어도 돈을 안고 다니지도 않았으며 간단한 예물로 인사를 표시하였단다. 그러나 저마다의 행복한 모습, 사랑으로 보내는 미소들은 온 집안을 눈부시게 하였지. 하얗게 회칠한 깨끗한 벽에는 고운 벽보(그때는 햇대보라고 불렀단다.)로 병풍을 대체했고 다른 한 벽에는 모 주석 초상화가 정중히 걸려 있었단다. 엄마는 고운한복 차림하고 호랑탄자 위에 꽃방석을 깔고 앉으시었다. 아버지 없는 빈자리라구 회갑 안 세겠다는 것을 큰언니 큰오빠가 토론하여 결정하셨단다. 네 자식

“그럼 그렇지, 우리 아들인데...”

엄마의 눈물 세 번째, 장춘서 날아온 편지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21]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엄마는 날마다 흥에 겨워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면서 일하려 다니셨단다. 엄마는 사범학교 교직원 식당일을 혼자 하시었지. 집에는 시계도 없었기에 새벽이면 하늘의 칠성별을 시계로 삼아 아침준비를 대강해 놓으신 뒤 바삐바삐 일하려 가시었단다. 우리집은 공원가에 있었는데 사범학교는 지금의 연변2중 동쪽에 자리잡고 있었단다. 연변병원을 지나 동쪽으로 가는 길부턴 인가가 없는 채소밭이었고 도중 길옆에는 비석 하나가 있었는데 거기에선 간혹 강도가 나타나서 행인들에게 늘 불안감을 주었다한다. 그러나 엄마는 편안히 그 식당 휴식실에서 쉴 수 없었단다. 집에는 둘째오빠와 내가 학교에 다니므로 엄마가 와서 돌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단다. 집의 밥은 비록 대부분 내가 했어야 했었지만. 그러나 엄마의 가르침이 없고 나를 깨워놓지 않으면 오빠와 나는 밥도 못해 먹었단다. 일요일이면 엄마는 또 다른 삯일을 하시면서 돈을 벌었단다. 그러나 엄마는 늘 웃음띤 얼굴로 별을 이고 다니시었단다. 이렇게 비가오고 눈이 오면서 세월이 흘러 곡식들이 우썩우썩 자라는 푸르름의 칠월말이었지. 장춘으로부터 편지 한통 날아왔단다. 지금처럼 전화가 있고 휴대폰이 있으면야 얼마나 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