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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문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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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을 물리친 동산동 밥할머니 석상

[고향문화통신 8]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고양시 끝자락인 덕양구 동산동에서 구파발쪽으로 가다보면 고가도로 밑에 목이 잘린 커다라 돌부처가 세워져 있는데 이름하여 고양(高陽) 밥 할머니 석상이다. 이를 두고 고양의 잔다르크 동산동 밥 할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 동산동 창릉모퉁이공원에 있는 밥 할머니 석상. 글쓴이가 찾아갔을 때는 작년 제향 때의 펼침막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밥 할머니 석상에 관한 유래는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의 산천을 피로 물들인 지 8개월이 지난 선조 26년 정월의 일이다. 무방비 상태의 조정은 긴급히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명나라는 이여송을 대장으로 삼아 명군 4만 명을 파견했다. 명과 합세한 조선군은 왜군에게 함락되었던 평양성을 탈환하고 그 여세를 몰아 한양을 향해 남진하였다. 그러나 그해 정월 26일 한양을 눈앞에 둔 고양시 벽제관의 남쪽 숫돌 고개 전투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왜군에게 참패하여 북한산으로 뿔뿔이 패주, 이여송과 장수들의 일부는 북한산 노적봉 밑에 집결하게 되었다. 왜군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이여송과 조선의 도원수 김명원은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의 진로를 구상 중에

저항정신의 으뜸 석주 권필

[고양문화통신 7] 행주산성 역사공원의 권필 시비를 찾아서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외척 중에 새로 귀하게 된 사람이 많아 붉은 대문이 궁궐을 둘러쌌네 노랫소리, 풍악소리에 놀음 잔치 일삼고 갖옷과 말은 가벼움과 살찜을 다투네 단지 영화로움과 욕됨을 따질 뿐이지 옳고 그름은 수고로이 묻지도 않네 어찌 알리오 쑥대 지붕아래서 추운 밤 쇠덕석 덮고 우는 백성을 ! (詠史, 권 3: 155) 뭔가 예사롭지 않은 글이다. 구중궁궐에서 호화호식 하면서 추운 밤 한뎃잠 자는 백성의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석주 권필의 시는 매양 이렇다. 충주의 비석 돌 유리처럼 고우니 수천 명이 뜯어내고 수만 바리 실어내네 물어보자 그 돌 실어 어디로 옮겨가나 실려가서 세도가의 신도비 된다 하네 그런 집의 신도비는 어느 누가 지어내나 글씨체도 굳세고 문장력도 기이하지 한결같이 적는 내용 이 어른 살았을 때 받은 자질 배운 학식 또래 중에 빼어났도다 임금을 섬김에는 충렬하고 강직했고 집안에 지낼 적엔 효순(孝順)하고 인자(仁慈)했다 권필, 충주석(忠州石) 가운데 일부 ▲ 고양 행주산성 아래 역사공원(행주나루터) 안에 있는 권필 시비 ▲ 권필 시비 뒷면 권필의 눈에는 천년만년 돌비석에 이름 석 자를 남기려고 발버둥 치는 관리들이 가

우리는 송강 정철을 알기나 하나?

[고양문화통신 5] 송강정철의 제2의 고향을 찾아서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신원(新院) 원주 되어 사립문 고쳐 닫고 유수청산을 벗 삼아 던졌노라 아이야 벽제(碧蹄)에 손이라 하거든 날 나갔다 하여라” * 신원(新院) : 현, 고양시 신원동을 말함 * 벽제(碧蹄) : 옛 고양군에 있던 벽제관역(驛) 고양시 신원동에는 윤선도·박인로와 함께 국문학사에 빛나는 3대 시인으로 꼽히는 송강 정철(1536~1593)이 10년간 머물렀던 송강마을이 있다. 이곳에서 그는 35살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했고 이어 38살에는 모친상으로 다시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또한 나이 50살에는 정치 일선에서 떠나 4년간 이곳에서 자연을 벗하며 지냈다. 그리고 강화 유배지에서 죽은 뒤에는 송강마을 뒷산에 부모님과 나란히 묻혔다. (사후 71년째에 충북 진천으로 이장) ▲ 송강마을 안쪽 송강문학관 앞에 세워진 안내문 “어버이 살아 실 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엇지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위는 송강 정철의 훈민가(訓民歌)의 하나로 송강이 고양땅에 머물렀을 때 지은 시이다. 양친을 모두 이곳 고양땅에 묻은 송강은 시묘살이만도 6년을 했는데 그는 평소 술을 즐겨 마셨다. “재

진천엔 농다리, 고양엔 강매동석교

[고양문화통신 5] 고양시의 가장 오래된 다리를 찾아서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비늘처럼 쌓인 보랏빛 돌들 / 서로 껴안고 / 즈믄 세월을 보냈다 / 쓸어내리려는 억센 물줄기 속 / 서로 보듬으며 / 닳아 문드러질지언정 흩어지지 않았다 / 용마 타고 다리 놓던 임 장군 떠난 지금 / 즈믄 해 흐르는 물살 위로 / 빠알간 고추잠자리 한 마리 맴맴맴 이 시는 글쓴이가 지난해 충북 진천에 있는 농다리(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8호)를 가보고 지은 진천 농다리이다. 다리는 흐르는 물위에 놓는다. 이쪽 뭍과 저쪽 뭍을 이어주는 다리에는 그래서 전설이 많고 예부터 이야기 거리가 풍부하다. 진천 농다리 뿐만 아니라 이리 오래된 다리는 전남 함평에도 고려시대 것으로 전해지는 고막천다리(보물 1372)가 있다. 고양시에도 이들 다리에 버금가는 다리가 있다. 바로 강매동석교(향토문화재 제 33호)이다. 찾는 이가 거의 없는 한적한 창릉천 변에 고즈넉하게 놓인 이 다리는 한강에 놓인 어마어마한 규모의 다리에 견준다면 보잘것없지만 소달구지가 유일한 교통수단이던 시절 더없이 소중한 마을의 공용재산이었다. ▲ 강매돌다리(석교)의 전체 모습 강매동석교는 안타깝게도 자세한 유래가 적힌 비석이 625 한국전쟁 때 사라져 고막천다리처럼

최영은 충신일까, 무능한 신하일까?

[고양문화통신 4] 고려의 마지막 장수 최영 장군 잠든 대자산에 가다

[그린경제 = 이윤옥 문화전문기자] 고려시대 왜구 퇴치의 최고 장수를 들라하면 누구든 최영장군을 꼽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최영장군은 고려 충숙왕(1294-1339)이 집권하던 1316년에 사헌부간관을 지낸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나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새기며 성장했다. 최영장군은 훗날 이성계에게 살해된 우왕(1365-1389)의 장인으로 우왕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길을 오르면 무덤 안내 팻말이 있다 우왕 4년(1378)에 왜구가 착량(窄梁, 지금의 강화)에 모여 승천부(昇天府)를 침입하니 최영장군은 이성계와 함께 적을 무찔렀는데 그 공적을 인정받아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서훈되었으며 우왕 6년에는 해도도통사를 겸하여 왜구방비에 힘썼다. 그러나 우왕은 가끔 엉뚱한 데가 있었다. 온나라에 왜구가 날뛰어 백성들의 삶이 곤궁한 가운데서도 놀러 다닐 생각을 했다. ▲ 무덤 입구 계단 오르기 전에 안내글 그러자 최영이 간하기를 요즘 기근이 자주 들어 백성이 살 수 없는 형편이며 또 곧 농사철인데 분별없이 왕께서 유람을 즐겨 백성을 괴롭히는 것은 옳지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우왕이 말하기를 우리

중국 사신이 북적대던 고양동 벽제관터

[고양문화통신 3] 일본에서 육각정자 뜯어가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벽제관 터는 수퍼나 우체국에 갈 때면 으레 들리는 곳이다. 지금은 주춧돌만 덩그마니 남아 있지만 이곳은 일제강점기 총독부 학무국에서 심의한 조선고적(朝鮮古蹟) 명소에 뽑힐 만큼(1931.6) 고색창연한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의 사신들이 조선을 방문 할 때 반드시 들러야하는 오늘날의 인천국제공항과 같은 중요한 관문이었다. ▲ 지금은 터만 남은 벽제관터(한자 지 '址'보다는 우리말 '터'로 고쳐 써야 한다) 벽제관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세종 5년(1423) 9월 5일)을 보면 세종임금이 중국 사신을 배웅할 때 벽제관까지 세자를 보내야할지 말지에 대해 묻고 있다. 예전에 사신 황엄(黃儼)이 돌아갈 때에, 세자(世子)가 벽제관(碧蹄館)까지 나가서 전송하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또 세자가 작별할 때 읍(揖)을 해야하나? 절(拜)을 해야하나? 라고 하니, 영의정 유정현(柳廷顯) 등이 아뢰기를, 예전에는 세자께서 이미 장성하였으니 벽제관까지 가서 전송하는 것이 옳았지마는 지금은 세자께서 나이 어리니 갈 수 없으며, 교외(郊外)에서 배례(拜禮)하는 것도 또한 옳지 못합니다.